감정을 참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되다

by 삐약이

어릴 적부터 우리 집은 늘 아빠의 기분에 따라 달라지곤 했다. 아빠의 기분이 좋은 날은 평온하게 넘어 갔지만, 그게 아닌 날에는 늘 고함과 싸움 때로는 물건이 던져지는 걸 봐야 했다. 그리고 술에 취한 아빠가 오빠에게 늘 말하는 걸 들어야 했다.

"네가 우리 집 기둥이다. 그러니까 네가 잘 해야 돼. 앞 못 보는 동생도 네가 잘 챙겨야 하고, 네가 집을 이끌어야 해."


지금 와 생각해보면 오빠도 그 말을 거의 중학생 때부터 들었으니 어지간히 질렸겠다 싶었다. 그리고 어린 나와 달리 오빠는 아빠에게 종종 혼도 많이 나고, 때로는 맞기까지 했으니 그 말이 와 닿지 않았을 것이다. 내 생각이지만, 오빠는 그 현실에서 달아나고 싶지 않았을까?


늘 하는 똑같은 말과 술에 취한 아빠를 보는 게 싫지 않았을까? 그리고 거기에 나를 보살펴야 한다는 것까지... 어린 오빠에게는 중압감이 컸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때의 오빠에게 미안하다. 나까지 포함해서 오빠가 당했던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렇기에 오빠에게는 한없는 연민이 들 뿐이다.


그리고 그 때의 나는 어린 나이였다. 거의 초등학교 저학년쯤 됐으려나? 그런 나도 그 말들이 지겹게 느껴졌다.


'맨날 같은 소리만 하고... 저 얘기 언제 끝나는 거야?'


아빠가 술을 마시며 하는 넋두리를 들으며 제발 빨리 끝이 나기를, 그래서 잠을 잘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당시 엄마는 낮에 나를 돌보느라 집 안 일을 하다 야간 일을 갔기에 나는 늘 낮에 하교 후 엄마와 잠깐 있다 헤어지곤 했다. 그래서 그 때마다 아빠의 지겨운 말들을 들으며 남 몰래 불만을 가졌다.


하지만, 그걸 대놓고 말할 수 없었다. 어려서 몰랐던 것도 있었지만 아빠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고함 소리와 술상이 엎어질 것 같아 차마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마 그래서 오빠도 묵묵히 듣는 걸 택했을지 모른다. 그저 들으며


'빨리 끝나기를.'


하고 빌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오빠가 아니기에 그 때의 오빠를 모른다. 그러나 그 때의 참는 습관이 나에게, 오빠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줬음은 부정할 수 없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오빠도 고등학생이 되면서 집 안은 여러모로 많이 힘들었다. 앞서 말했듯 아빠는 가정에 무책임했고 늘 가정을 꾸려 나가는 건 엄마 몫이었다. 아빠는 그저 돈이 있으면 나갔다 없으면 들어오는 그런 생활을 하셨다. 그러면서 일도 조금씩 했으나 늘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시는 일이 잦아 엄마와 싸움도 많이 했다.


엄마뿐 아니라 다른 친척들이나 가족들이 뭐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아빠는 그저 아빠였을 뿐이었고 우리도 그저 우리였을 뿐이었다. 그 즈음 나는 참는 게 다 답이라는 생각으로 살았다. 내가 참아야 아빠에게 덜 혼나고 엄마가 덜 힘들어 한다는 생각에 감정을 누르고 지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 감정이 2년 전 터지자, 나도 모르게 알게 됐다.


'너무 참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구나.'


어떤 것도 참는다고 해서 될 일이 있고 아닌 게 있음을 그 때서야 알았다. 내 감정을 내가 달래주고, 안아 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터진 감정은 나를 거의 몰아갔다. 결국은 심리 상담과 약으로 겨우 나를 지탱했고, 지금은 많이 안정이 돼 엄마와 어릴 적 힘들었던 것들을 이야기하며 서로의 상처를 나누는 사이가 됐다.


어릴 때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내 감정을 누르는 것에 집중하느라 나만 봤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감정적으로 누를 때가 많다. 내가 어떤 말을 해야 할 때 그저 다른 사람 말에 맞다며 말하면서 정작 내 생각은 내보이지 못하는 그런 부분이 있어 점점 고치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형성된 습관이 잘 될 리 없었다. 지금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걸 말하기까지의 용기는 남들보다 많이 필요한 것 같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다른 사람의 말에만 끌려 다닐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달라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불안감을 잡아주는 약을 먹자 많은 부분에서 개선이 돼 내 의견을 내는 데에 한결 나아지기도 했다.


지금은 그럭저럭 사람들과 소통하며 때로는 아님을 말하고, 의견을 말하며 지내는 걸 연습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참아야 할 것들이 있다. 그러나 그게 너무 지나치게 되면 감정은 언젠가 펑 하고 터져 나를 괴롭히는 무기가 될 수 있다. 풍선에 자꾸 바람을 넣다 펑 하고 터지듯 그렇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걸 겪었기에 알 수 있다. 그게 얼마나 힘든지를. 그렇기에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감정을 조금씩이라도 내비치며 힘들면 힘들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화가 나면 화가 난다고 말해보는 연습을 해보자. 그러면 나도 상대방도 더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여태 참았던 걸 한꺼번에 터뜨리기보다 말하는 것. 그게 중요함을 나는 배웠다. 그래서 말할 수 있다. 감정에도 참는 연습뿐 아니라 말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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