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불출 같지만.. 그렇습니다.

by 수정

주말 아침은 가족들 모두 여유로운 시간이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까지 이불속에서 꼼지락거려도 되고 아침 식사 준비도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가끔은 이불에서 뭉기적거리는 게 좋아 일요일 아침은 거르기도 한다. 그러면 남편은 알아서 혼자 밥을 차리고 시어머니와 함께 먹는다.(우리는 시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다.) 처음에는 못된 며느리가 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는데 남편은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있으라며 이불까지 덮어주고 안방 문을 조용히 닫고 나간다. 밥을 먹으면 설거지도 깔끔하게 해 놓는다. 어머님이 보시기에 나는 남편 잘 만나 호사를 누리는 며느리일 거다.


재수 없게 들리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사실이다.

우리 남편은 참 착하고 다정하다. 친구들과 모임을 하면 다들 남편 험담을 하곤 하는데(애정이 담긴 불평이라는 것은 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할 말이 없어 조용히 듣기만 한다.이런 나를 신기하게 보기도 하고, 남들에게 말 못 할 사연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정말로 나는 남편에 대해 딱히 흉볼 것이 없다. 남편은 술도 담배도 안 한다. 자기 입을 것, 먹을 것을 위해 큰돈을 쓰거나 쓸데없는 곳에 돈을 낭비하지도 않는다. 성실하고 가정적이다. 나에게 큰소리를 내며 화를 내거나 성질을 부린 적도 없다.


다른 남편들은 주말이면 소파와 한 몸이 되어 하루종일 TV만 보거나 혼자만의 취미를 즐기러 나간다고들 하던데 우리 남편은 주말이면 설거지며 청소며 집안일을 더 많이 한다. 주중에 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하지 말고 쉬라고 말려도 평일에 당신이 매일 하니까 주말이라도 내가 해야지 하며 뭐라도 거든다. 오늘 아침에도 남편이 청소기를 돌리겠다는 걸 말리고 내가 하겠다고 하니 내 뒤에서 강아지처럼 졸래졸래 바퀴 달린 유선청소기를 손으로 들고 따라다니는 것이 아닌가. 바퀴가 달려있으니 알아서 굴러 올 청소기를 뭐 한다고 힘들게 들고 따라다니는지 그 모습이 너무 웃겨서 청소하다 말고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그냥 바닥에 두라고 하니 이렇게 하면 무선 청소기 같은 느낌으로 청소할 수 있고, 자기도 뭐라도 돕는 것 같으니 그렇게라도 하겠다고 말하는 남편을 보니 어디서 이런 천사 같은 사람을 만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 우리는 대학생이었고 선후배 사이였다. 내가 선배이고 남편이 일 년 후배이다. 그 당시 나는 연애에 별 관심도 없었고 불꽃 튀는 사랑이라던가 운명적인 만남도 믿지 않았다. 그런 건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있는 일이고 현실세계에서 영원한 사랑은 없는 거라고 여겼었다. 지금 생각하면 20대의 나는 자존감이 낮았던 건지 아무튼 뭐가 그리 염세적이고 부정적이었나 싶다. 그래서 남편이 고백했을 때도 내가 어디가 왜 좋다는 건지 의심스러웠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그 마음도 변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 사람과 결혼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십 년 가까이를 만났고 자연스럽게 결혼해 어느덧 17년을 함께 살았다.


그동안 좋은 일만 있었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 기억 속에 안 좋은 기억들은 거의 없다. 남편과 살아온 대부분의 시간들이 좋았고 행복했고 감사한 날들이었다. 어느덧 중년에 접어든 우리는 우리의 노년에 대해 종종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이가 들어서 직장에서도 은퇴하고, 아이들도 다 커버려서 더 이상 우리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을 때 우리끼리 뭐 하고 살면 좋을까 생각하며 말이다.


- 캠핑카 하나 사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살까?

싸고 좋은 캠핑장도 많으니까 우리 둘이 지낼만한 캠핑카 하나 장만해서 동해안 따라서 여행도 다니다가 전국 일주도 했다가.

아니다. 캠핑의 낭만도 하루이틀이지. 씻는 것도 불편하고 음식 해 먹는 것도 힘들 거야. 나이 들면 운전도 위험하고.

-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에서 사는 건 어때?

별장 같은 시골 작은 집에서 아침에는 함께 차도 마시고, 낮에는 책도 보고 낮잠도 자다가 산책도 하고. 작은 밭이 있으면 이것저것 심어서 우리 먹어도 좋겠다.

근데 막상 시골에서 살면 하루종일 일해야 할 거야, 그치? 병원도 없고 마트도 없을 텐데... 나이 먹으면 병원이랑 편의시설 가까운 곳에서 사는 게 최고래. 그냥 도시에 편히 살면서 둘이 여행이나 자주 다니자. 근데 그러려면 아프면 안 돼. 건강하게 나이 들어야 돼. 그리고 둘 중에 누구라도 먼저 빨리 죽으면 안 돼.

더 중요한 건 저렇게 살려면 무엇보다도 돈이 많아야 돼. 돈 많이 벌려면 뭘 해야 하나?

결국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 눈앞에 있는 삶이나 열심히 살자고 결론 내리며 둘이 웃고 만다.


아직은 먼 일이지만 나는 남편이 나보다 하루라도 더 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순전히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다. 나만 혼자서 남편을 보내고 뒷정리를 하고 공허하고 쓸쓸한 마음이 드는 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러다 다시 생각한다. 내가 먼저 가면 남편은 더 힘들 텐데 차라리 내가 하루라도 더 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이 사람에 대한 나의 사랑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천천히 스며들어 그 안에서 헤엄칠 만큼 가득 차올라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앞으로 살아가며 또 어떤 위기와 어려움을 만나게 될지 모를 일이지만 그 사랑의 힘으로 잘 헤쳐나갈 것이라는 걸 믿는다. 평소에는 오글거려서 잘 표현하지 못했지만 이 글을 읽을 남편에게 정말 고맙고 사랑한다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함께 재밌게 살자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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