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여행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 여행의 준비

by 수정

시어머니와 같이 사는 내가,

그것도 추석 명절에,

친정엄마와 동생, 나 이렇게 세 사람만의 해외여행을 가도 괜찮을까?

우리 집에 며느리는 나 혼자뿐이고 시누네 식구들도 다 우리 집으로 올 텐데?


출발일이 가까워질수록 이런 생각들이 점점 커져갔지만, 이 여행은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 작년 추석 때부터 계획되어 있었다. 명절을 맞아 친정에 모인 나와 동생은 2025년 추석이 딱 좋은 시기라고, 엄마의 칠순이 있는 해이기도 하고, 우리를 위해 이렇게 긴 추석연휴가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로든 떠나야 한다며 의기투합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보다 훨씬 전, 엄마의 환갑을 맞아 우리 셋이 함께 스위스로 여행을 다녀왔던 9년 전부터 이미 마음속에 품어왔던 계획이라고 말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때의 기억이 너무 좋아서 우리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언제일지 모를 그날을 위해 나와 동생은 미리 적금을 들어두었고, 남미나 스페인을 여행지로 점찍어 두었던 동생은 사이버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각자의 가정과 일에 매인 몸이다 보니 실행에 옮기기가 쉽지 않았는데, 2025년 달력의 추석연휴를 보고 기회는 이때다 싶었고,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여행지가 스페인으로 최종 결정된 후, 거의 1년 전부터 항공권을 검색하고 알아보았지만 누구나 해외여행을 노리는 황금연휴이다 보니 비행기값이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때가 아니면 세 사람의 일정을 맞추기가 힘들 것 같아 비싼 비용을 감수하더라도 떠나기로 했다. 검색에 검색을 거듭해 그나마 조금 덜 비싼 항공권을 예매했다. 갈 때는 환승으로 올 때는 직항으로.

패키지가 아닌 자유여행으로 갈 계획이라서 동생이 총대를 메고 일정과, 숙소, 스페인 안에서 도시를 이동할 때의 비행기, 열차, 버스표, 당일 가이드 투어 등을 전부 예약해 주었다. 동생이 우리의 가이드 역할을 하느라 제일 고생이 많았다. 우리 여행의 일등공신, 똑순이 우리 동생, 고마워!


여름방학에 친정에 갔을 때 간략한 여행일정과 숙소 예약 서류들을 동생에게 받았을 때에도 우리 셋이 스페인을 여행하는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스페인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했거니와 아직은 먼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든 날,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날, 항공권과 여행 일정표를 행운의 부적처럼 들여다보며 ‘언젠가 그날이 오겠지’하는 막연한 기대감만 가질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의 여행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 사이 나는 겨울을 위해 양 볼 가득 도토리를 저장하는 다람쥐처럼 야금야금 여행에 필요한 몇 가지 물건들을 사며 조금씩 기대감을 쌓아갔다.

제일 먼저 산 것은 잠금장치가 있는 여행용 크로스백이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그 가방이 왜 자꾸만 눈에 들어오는지. 한번 클릭을 했던 기록이 남아서인지 내가 SNS를 할 때마다 자꾸만 광고가 따라다녔다. ‘이래도 안 산다고’ 싶을 정도로 광고가 계속 나와 결국 사버리고 말았고, 스페인에서 같은 가방을 멘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나처럼 다들 광고에 넘어간 모양이다. 그래도 꽤 유용했고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출발일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을 때 샤워기 필터를 샀다. 동생은 '뭘 그렇게까지...'라고 했지만, 엄마는 스페인을 다녀온 지인이 샤워기필터는 꼭 사라고 했다고 전했다. 한번 구입해 놓으면 다른 곳에 여행을 갈 때도 쓸 수 있는 것이니 준비하기로 했다. 종류가 다양해 고르기도 힘들었지만 제일 심플하고 가벼운 것으로 구매했는데 이것 역시 유용하게 잘 썼다.


트레블월렛 카드도 하나 만들었다. 요즘은 해외 구멍가게에서도 카드 사용이 가능하다고 하니 지폐나 동전을 들고 다니는 것보다는 편할 것 같았다. 체크카드처럼 일정 금액을 적립해 놓고 원하는 나라의 화폐로 바로 환전할 수 있어 편리했고, 혹시 카드를 분실하거나 소매치기를 당하더라도 충전된 금액 외에 더 결제할 수 없으니 그것도 안심이 됐다. 여행을 와서 보니 실물화폐는 버스킹 공연 관람 때 팁으로 준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용한 일이 없었다.


그 외에 긴 비행시간 동안 내 목을 지탱해 줄 목베개와 옷가지들을 담을 파우치, 화장품 소분용기, 휴대용 옷걸이 등 소소한 물건들은 다이소에서 장만했다. 옴짝달싹하기도 힘든 좁은 비행기 안에서 목베개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나머지 것들은 유용하게 잘 사용했다.

공항버스를 예매하고 이심도 준비했다. 장롱 속에 처박혀있던 캐리어도 꺼내어 소독약을 뿌리며 깨끗이 닦고 말렸다. 거의 10년 가까이 사용하지 않아 상태가 괜찮을지 걱정이었는데 다행히도 멀쩡했다. - 이때까지는 그런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뭐든 책으로 배우려는 습성을 가진 나답게 스페인 여행 관련 책들도 도서관에 빌려와 읽었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스페인의 관광지나 음식, 상점 이름 때문에 읽어도 무슨 말인지, 어디가 어딘지 실제로 가보기 전에는 도통 감이 오질 않았지만 말이다. 실은 여행을 다녀온 지금도 잘 모르는 게 많다.

세부사항들을 점검하고 여행준비를 해 나가며 이제는 정말 우리의 여행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여행을 목전에 두고 찾아온 감기로 미열과 인후통에 시달렸지만 여행 전에 아픈 게 차라리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감기 때문인지 여행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모를 흥분과 들뜸으로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앞으로 남은 일주일 동안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 내 일신상의 문제뿐 아니라 천재지변이나 전쟁 같은 -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다.


막상 추석명절에 가족들을 두고 혼자서만 떠나려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이들과 남편도 걱정이고, 특히나 시어머니나 시누이 가족들 입장에서는 명절에 저 혼자만 해외여행을 가는 막돼먹은 며느리가 되는 거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에이 뭐 그러든가 말든가 떠나기로 했으니 그런 생각들은 접어두고 마음 편히 즐기고 오기로 마음먹었다.

어떤 예상치 못한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행 전의 설렘으로 들뜬 하루하루가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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