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 환승지옥을 맛보다

by 수정

우리 비행기의 출발 시각은 9월 30일 화요일, 오전 11시 50분이었다.

국제선의 경우 넉넉히 세 시간 전까지는 공항에 도착해야 한다는 권유에 따라, 나는 새벽 4시 30분에 출발하는 공항버스에 올랐다.

전날 밤, 혹시 늦잠을 자서 버스를 놓칠까 봐 알람을 맞추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잠이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눈을 떴다. 비몽사몽인 상태로 나갈 준비를 하고 캐리어와 크로스백을 메고 집을 나섰다. 고맙게도 남편이 그 이른 새벽에 터미널까지 데려다주고 배웅해 주었다. 잠을 푹 자지 못해서 공항까지 가는 동안 눈을 붙여보려 했지만, 여행을 앞두고 들뜬 탓인지 눈은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았다. 가는 동안 해가 떠오르고, 출근길 차량들로 막히는 도로를 보며,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향한다는 사실에 묘한 설렘과 해방감이 밀려왔다.


공항에 들어서니 정말로 여행을 떠난다는 실감이 났다. 거의 10년 만에 다시 찾은 인천공항의 모습은 여전히 새롭고 낯설었지만, 기된 표정의 사람들과 경쾌한 캐리어 소리가 반가웠다. 출국하는 아이돌이라도 있는 건지 누군가의 팬인 듯한 수많은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고 출입구를 바라보며 무리 지어 앉아 있었다. 세계 각국으로 떠날 사람들, 누군가를 배웅하는 사람들, 이제 막 한국에 도착한 사람들공항 안은 붐볐다. 엄마와 동생은 아직 오는 중이라고 해서 혼자 공항 곳곳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녔다. 여행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가끔 공항에 놀러 간다는 누군가의 말이 이해되었다. 공항이라는 공간이 가진 특별한 분위기가 확 느껴지면서, 어디로든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깃털 같은 가벼움과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될 것 같은 기대감이 밀려왔다.


잠시 뒤 엄마와 동생이 도착했다. 우리는 짧은 인사를 나눈 뒤 출국 절차를 마치고 동생의 마일리지로 대한항공 라운지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와인에 컵라면까지 야무지게 먹고 남은 시간 동안 면세점 구경이나 하자며 둘러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캐리어에서 엄청난 소음이 나기 시작했다. 남들 캐리어는 조용히 굴러가는데 내 캐리어에서는 마치 비행기 엔진 같은 소리가 나는 게 아닌가! 울퉁불퉁한 돌바닥도 아닌데 이게 무슨 일일까?

바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세상에나, 너무 오랜만에 세상 빛을 본 탓인지 캐리어 바퀴가 삭아 일부가 깨져버린 것이었다. 캐리어를 끌 때마다 그 소리가 얼마나 거슬리고 신경이 쓰이던지, 모든 사람이 내 캐리어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당장 바퀴를 갈든지 새 캐리어를 사든지 하고 싶었지만, 출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공항에서 파는 캐리어는 너무 비쌌다. 어쨌든 굴러가긴 하니까 조금 더 버텨보자며 비행기에 올랐다.


우리 비행기는 출발하기 전부터 이미 30분 넘게 지연이 되어, 암스테르담에서 환승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약간 걱정이 되었다. 다음 비행기까지의 여유가 고작 한 시간 반 정도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승무원께서 미리 몇 번 게이트로 이동해야 하는지 알려주셨고, 내리면 직원이 안내해 줄 것이라며, 혹시 다음 비행기를 놓치면 헬프데스크에 문의하라고 친절히 설명해 주셔서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우리 말고도 환승 편을 이용하는 승객이 제법 있어 어떻게든 되겠지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좁은 공간에서 10시간 넘게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는 건 쉽지 않았다. 잠이라도 푹 잘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자리가 불편해서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나마 작년에 큰 인기를 끌었지만 보지 못했던 드라마〈선재 업고 튀어>를 정주행 하며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우리 선재, 선재가 이래서 인기가 많았구나 공감하면서.^^

비행기 안에서 나와 동생은 객실 불이 켜지고 승무원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질 때마다 ‘이제 뭐 먹을 거 주나 보다’ 하며 신나 했고, 서로를 보며 파블로프의 개가 떠오른다며 킥킥거렸다. 좁은 좌석에 앉아 시간마다 제공되는 기내식과 간식을 먹으며 잠시 사육당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말이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화장실도 편히 갈 수 없어 빨갛게 충혈된 눈과 허옇게 뜬 얼굴을 하고서도 우리는 마냥 신나고 좋았다.


무사히 암스테르담에 도착하긴 했지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환승까지 30분뿐이었다. 내리자마자 승무원이 알려준 게이트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다른 승객들도 마음이 급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모두가 한마음으로 우르르 뛰다가 걷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처음 와보는 공항에서 어느 순간 우리는 무리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다들 어디로 가셨지? 우리만 비행기를 놓치면 어쩌나' 쫄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망가진 캐리어 바퀴에서는 끊임없이 굉음이 났고, 나는 너무 신경 쓰여 캐리어를 끌지도 못하고 번쩍 들고 달렸다. ‘이놈의 캐리어, 이것만 아니었어도 더 빨리 뛸 수 있을 텐데, 공항에서 그냥 새로 살걸…’ 후회하며. 엄마는 엄마대로 지쳐서 동생에게 너라도 먼저 가서 비행기를 잡고 있으라고 말했다. 그런데 한참을 앞서 달리던 동생이 저만치에서 다시 되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이쪽이 아니래. 게이트가 바뀌었대.”

하…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모든 기력과 의욕을 상실해 버렸고,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마음마저 들었다.


‘이미 다음 비행기는 떠났겠지’ 하는 체념 속에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공항 직원이 새로 알려준 게이트를 향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동생은 의무감으로 앞서 뛰었고, 나는 열심히 표지판을 보며 엄마에게 “여기서 우회전, 다음은 좌회전!” 방향을 알려주며 함께 걷다 뛰기를 반복했다. 환승을 대비해 미리 여러 분들의 블로그에서 이 공항의 내부에 대해 사진으로 보기도 하고, 글로 읽어보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간접 경험이었고, 처음 도착한 크고 낯선 공항에서 실제로 길을 찾는 건 더 어렵고 복잡했다.


중간에 만난 대한항공 직원분이 바르셀로나행 비행기가 연착되어 여유가 있으니 천천히 가셔도 된다는 말을 듣고 안도했지만, 이미 앞서간 동생은 보이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게이트에 도착해 보니 과연, 아직 게이트는 열리지도 않았고 늦어진 출발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동생은 땀을 뻘뻘 흘리며 서 있었고, 나 역시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뛴 탓에 땀범벅에 팔과 다리까지 뻐근했다. 하물며 '일흔'의 엄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 이후로도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느릿느릿 탑승준비를 하는 외국 항공사의 승무원들을 보며 괜히 힘들게 뛰었다고 투덜거렸지만, 처음 와본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길 잃은 미아처럼 이리저리 헤매며 미친 듯이 뛰던 우리 모습이 떠올라 한참 웃었다. 여행의 시작부터 이런 예상치 못한 일을 맞닥뜨렸지만, 우린 이런 게 또 여행의 묘미 아니겠냐며 잠시나마 아찔했던 순간들에 대해 재잘거렸다. 평소에 탁구와 국선도로 체력을 다져서인지 엄마 진짜 잘 뛴다는 칭찬도 건네고, 땀에 절은 우리한테서 쉰내가 나겠다며 걱정도 했다가, 바르셀로나에 도착하면 당장에 캐리어부터 사야겠다고 다짐하듯 말하면서.

우리보다 앞서 뛰었던 동생은 “공항에서 하루를 날려버릴까 봐 정말 걱정했는데 다행이라며, 나라도 먼저 도착해서 비행기를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온 힘을 다해 뛰었다”고 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말로만 듣던 ‘환승 지옥’을 제대로 맛본 순간이었다.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걱정했던 우리는 마침내 바르셀로나 국제공항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현지 시각으로 밤 12시가 가까운 시간이었고, 내가 집을 나선 지 24시간이 넘는 시간이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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