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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다리필름 Jul 14. 2020

무계획의 시대

무계획이 계획인 이 시대의 '봄'




하루 벌어 하루 먹기


하루 벌어 하루 먹어야 하는 건 운동 이랬다. 하루에 한 달 치를 미리 해 놓을 수 없으니 어제 것은 잊고 매일 한 것으로 그날의 건강을 산다는 뜻이다. 요즘 또 핫하게 뜨는 ‘하루 벌어 하루 먹기‘가 있다. 바로 기업의 ‘사업 계획‘이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라는 말을 귀 따갑게 듣던 ‘유신의 시절’에 청춘을 보냈던 사람으로서, 명색이 사업을 한다면서 1개년 계획은 고사하고 ‘3개월 마스터플랜’도 못 짜는 게 현 시국이다. 코로나가 덮쳐서 그렇다 하지만 이미 그전부터 세상은 ‘4불가지(변화의 폭을 알 수 없고, 변화의 속도를 잴 수 없고, 변화의 복잡성이 무한하고, 변화 현상이 애매한)’의 시대로 돌입 한지 오래다. 한마디로 ‘모른다‘이다. 세계적인 대기업조차도 ‘연간 계획’ 같은 것은 사실상 폐기 한지 오래다. 길어야 한두 달을 내다보면서, 매일매일 계획을 수정해 나가는 세계, ‘애자일(Agile)‘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머리 털 뽑히는 직원 뽑기


제대로 된 직원을 뽑는 거보다 더 어려운 일이 ‘직원을 뽑기로 결정하는 일’이다. 오늘은 문의가 10개인데 다음 날은 갑자기 ‘0’이 된다. 저번 주엔 ‘망하나 보다’ 했는데, 이번 주엔 일 손이 없어서 밤을 새우고 있다. 중저가 정책을 밀고 있는데 고가만 팔린다. SNS 영상에 포지셔닝을 했는데 교육 영상 매출이 갑자기 70%에 육박한다. 그리고 그 다음 달은 또 딴 판인 판타지 어드벤처가 펼쳐진다. 이러니 힘들어 죽어도 정규직원 하나 뽑는 결정은 ‘목숨을 걸고 지르는 일’ 이 될 수밖에 없다. ‘장기 계획‘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 세상,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아니, ‘하루 보고 하루 정하는’ 세상에 우리는 이미 들어와 있다. 혹시 ‘나만 그런가‘라고 생각하신다면 틀렸다. 우리 모두 그렇다. 날마다 정신없이 변하는 세상에 돌아가시겠다고? 장점도 있다. 

아니, 이게 더 좋은 거 같다. 사다리 같은 소기업에겐.






Small is beautiful


예전의 물건들은 전부 수년간의 조사와 연구로 만들어졌다. (짝퉁 베껴 만드는 것 빼고는) 완벽한 물건이나 서비스를 만들려면 ‘완벽한 준비‘가 필수였다. 그런데 지금은 ‘완벽한 계획‘같은 건 없다. 시장에 그 물건이 나올 때쯤은 이미 그건 한 물간 고철덩이가 되기 때문이다. ‘태극기 휘날리며‘를 성공 시킨 강제규 감독이 7년의 각고 끝에 300억을 들여 ‘세계적 버전‘으로 만들어 낸 전쟁 영화 ‘마이 웨이‘는 그 사이 변해 버린 시장에서 처참하게 외면당했다. 완벽한 준비를 기획하는 순간 이미 실패 미로로 진입 한 것이다. 요즘 시장이 그렇다. ‘완벽한 라면집‘은 연구와 계획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직 MVP (Minimum Variable Product : 최소한의 기능을 가진 물건이나 서비스)를 ‘지금’ 시장에 던지고, 고객의 피드백을 받아 내일 또 조금 개선된 것을 내놓되 이를 n 번 반복하는 루프를 민첩하게 돌리는 것이다. 필요한 미덕이라면, 부실한 것이라도 일단 내 놓고 보는 뻔뻔함(?), 피드백을 경청하는 열린 귀, 그리고 바로바로 고쳐 나가는 부지런함, 마지막으로 거의(?) 완벽한 수준에 이를 때까지 그만두지 않는 집념이다. 바로 이 지점이다. 대자본이 없어도, 장기간의 연구 개발이 없어도, 소기업으로도 얼마든지 꼬물꼬물 하면서 꿈을 향해 갈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agile 은 ‘민첩하다‘는 뜻이다. 공룡은 죽는데 소형 포유류는 살아남았다. 급변하는 환경이 그들의 운명을 갈랐다. 작은 것들에게 빙하기가 왔다고 언론은 말한다. 하지만 반대다. 온 것은 봄일지도 모른다.







작고, 빠르고. 지구력 있게


사다리는 4년 전 한 푼도 없이 카페 한편에서 메뚜기처럼 옮겨 다니며 시작했다. 첫 작업은 20만 원짜리 동창회 출사(영상도 아니고 사진 찍기)였다. 그때도 지금도 달라지지 않은 건 ‘내일을 모른다‘는 사실, 그리고 ‘매일 계획을 수정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힘들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나에게 위로를 준다. 매일 날씨를 예측할 수 없다면 항공모함도, 사다리 같은 작은 어선도 매일 동일한 선상에서 출발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매일 바꿔 갈 수 있는 자유로운 행보는 어쩌면 작은 사업체만의 특권일지도 모른다. 안갯속에서 멀리 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참새는 뱁새를 다다다 쫓아 앞지를 수도 있다. 스타 유튜버들을 보라. 몇 년 전만 해도 그들은 무일푼의 한량들(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대부분) 이었다. 민첩함과 바지런 함으로 그들은 새로운 계급을 형성하고 있다. 꽃봉오리가 맺히면 봄이 오는 줄 알아야 한다.


 

‘민첩의 시대’가 온다. 작은 것들의 시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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