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선의 역사 #2
연회장의 음악이 순간 멈췄다. 소네 통감의 비서가 급히 달려와 심각한 표정으로 귓속말을 전하고 있었다. 무언가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 틀림없었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의 수근거림이 커져갔다.
“대감! 대감!”
완용의 비서가 소리치며 달려왔다. 무슨 일일까. 완용의 머릿속에는 온갖 불안한 생각들이 스쳐갔다. 그렇지 않아도 대한제국과 일본사이의 복잡한 외교문제들을 조율하느라 머리가 아픈 터였다. 대규모 의병봉기가 일어난 것인가? 아니면 폐하의 신상에 문제라도 생겼는가?
“이등방문 각하께서, 살해당하셨습니다!”
완용은 귀를 의심했다. 이등박문이 죽다니, 게다가 살해라니. 조선통감부의 초대 통감이자 일본과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정치지도자. 완용과는 많은 일들을 협의하고 협상해온 상대였다. 부드러운 말투 속에 힘이 있고 무엇보다 상대를 꼼짝달싹할 수 없도록 옭아매는 그의 협상력에 완용은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고 탄복하기도 했다. 완용은 동아시아 약소국들이 일본의 우산아래에서 보호를 받아야 독립을 지킬 수 있다는 ‘동양평화론’에 공감하고 있었다. 이등박문 또한 완용을 신뢰하여 그를 상대로 협상하는 과정에 만족감을 표하곤 했다.
“누가···, 누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이냐···!”
“안중근이라는···. 조선인입니다.”
완용은 탄식했다.
조선인에 의한 암살. 이등박문은 조선을 무력으로 즉시 병합할 것을 주장하는 일본내 강경파들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지켜주었던 인물이다. 을사년 보호조약 체결에 항의한다며 임금이 헤이그에 밀사를 보낸 일로 일본정계가 발칵 뒤집어졌을 때에도 이등박문이 그들의 거센 목소리를 잠재웠다. 그는 일관되게 보호국으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해 줄 것을 약속해왔다. 그런 이등박문이 죽다니, 그것도 범인이 조선인이라니.
완용은 절망감을 느꼈다.
“어서, 폐하를 뵈어야겠다.”
완용은 황급히 채비를 했다. 일단 일본정부에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고 당장 조선을 병합하자고 날뛸 강경파들을 누그러뜨려야 했다. 조전도 보내야 하고 직접 방문해 조문도 해야하고 일본에 파견할 조문단도 꾸려야 했다. 어떻게든 안중근이라는 암살자는 조선인의 감정과는 완전히 무관한 무뢰배라는 것, 조선은 일본의 보호를 한결같이 감사해하고 있다는 것을 전달해야만 했다.
<총리 이완용 각하께 올리는 합방청원서>
일진회장 이용구 등 1백만 회원은 2천만 국민을 대표하여 머리 숙여 총리대신 이완용 각하께 간절히 청합니다. 우리 대한국은 대일본제국의 도움과 보호에 의해서 그 안전을 보전해 왔습니다. 그러나 장래를 생각할 때, 우리 대한국의 앞길은 멀고 아득하여 깊은 근심을 금할 수 없습니다. 세계정세는 급변하고 국제경쟁은 점점 치열하여 싸움에 이기는 자는 흥하고 지는 자가 망함은 하늘의 이치요 필연입니다. (···).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대일본제국이 용맹으로써 우리를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의 종묘사직이 무슨 수로 오늘까지 남았겠습니까. (···). 그렇지만 우리가 그 협약만을 믿고 무사태평한다면 우리의 앞날을 기약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하루아침에 동아시아의 평화가 깨어지고, 나라간의 세력균형이 무너진다면 우리나라는 안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우리 사직과 백성을 보폐하여 영원케 하는 길은 오직 일본과의 합방을 실행하는 것뿐입니다. 대일본국은 청일전쟁에서나 러일전쟁에서나 한결같은 나라입니다. 일본은 우리 대한국의 사직과 인민을 보폐하며, 동양의 지켜줄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런즉 우리 측이 스스로 일한합방을 제언하여 일본과 한국이 일가를 이루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완용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일진회장 이용구가 한일합병을 요청한다며 일진회원 100만 명의 이름으로 일본정부와 조선정부에 제출한 청원서였다. 일진회는 이등박문 서거에 사죄하기 위해 조선 13도 대표들을 모아 사과대죄단을 일본에 파견해야 한다며 법석을 떨고 있기도 했다. 완용은 일진회가 자신이 주도하는 내각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일본에 접근하는 꼴을 참을 수 없었다. 전 내부대신 송병준은 아예 일본을 오가며 일본정부를 상대로 합병안까지 제출하며 합병공작을 벌이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틈만 나면 일본과 자신을 이간질하고 자신이 주도하는 내각을 비판하며 자리를 넘봤다.
“약아빠진 놈들. 합병을 기회로 자리나 차지하려는 놈들.”
완용은 청원서를 집어 던지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총리대신 이완용이 송병준, 이용구 따위 시정잡배들과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어야 하다니···.”
완용의 예상대로 이등박문 서거 이후 일본 내에서 조선을 즉시 병합할 것을 주장하는 강경론이 힘을 얻고 있었다. 게다가 2대 통감 소네가 군부출신이며 강경파인 데라우치로 교체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일본의 합병요구에 대한 협상전략을 치밀하게 준비해야 하는 이 시기에 일진회 따위 무뢰배들의 소란은 자신의 입지를 약화시켜 협상전략을 흐트러뜨릴 뿐이라고 완용은 생각했다.
“폐하께서 위로금을 보내셨습니다.”
병상의 완용이 힘겨워하며 몸을 일으켰다. 무리할 필요가 없다는 시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완용은 기어코 일어나앉아 임금이 보낸 위로의 말을 새겨들었다. 고종, 순종 두 임금의 시종들이 매일같이 완용의 회복경과를 알아보고 위문하기 위해 찾아오고 있었다.
완용은 한 달 전 이재명이라는 괴한에게 칼을 맞았다. 완용은 자신을 칼로 찔러 쓰러뜨린 괴한이 태극기를 꺼내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피가 철철 흐르는 와중에도 그 사내의 외침이 참 우렁차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괴한의 칼은 완용의 어깨와 허리를 깊게 베었지만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못했다. 일본인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외과의사들이 조선에 와있던 것이 완용에게는 천운이었다.
“폐하께서는 대감께서 하루 속히 쾌차하여 정무를 맡아주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완용은 매일같이 전해지는 임금의 요구가 부담스러웠다. 암살위협까지 받은 마당에 다시 앞장서서 일본과의 협상을 맡으라니. 을사오적으로 지목되어 온갖 저주를 받아온 완용이지만 망국의 책임자가 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임금은 매일같이 시종을 보내어 하루 빨리 조정에 나와 일본을 상대해달라는 것이다. 임금은 자신을 가장 믿을 만한 협상자로 생각하고 있었고 을사년의 보호조약체결 때에도 ‘외교권’만을 이양하게 된 것에 임금은 만족하는 눈치였다. 조선정부 내에 완용만큼 지식과 경험을 겸비한 관료가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완용이 병상에 누운 동안 나라 안은 일진회가 제출한 합방청원 때문에 시끄러웠다. 일진회의 합방청원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합방청원 자체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통감부는 특별히 개입하지 않고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통감부는 그들이 우려했던 것에 비해 조선인들의 저항이 강렬하지는 않다고 판단하는 것 같았다. 머지않아 일본정부가 합병을 요구해올 것은 분명했다.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현명한 것일까. 완용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완용은 말없이 마주앉은 통감 데라우치를 바라보았다. 육군출신의 정치가. 단호하고 명령에만 충실하는 군인. 고개를 들어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에게서 무자비함이 엿보였다. 임금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협상에 임했지만 사실 협상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데라우치는 일본정부가 제시한 합병안이 변경될 수 없는 최종안임을 강조했다.
“조선 전체에 대한 일체의 통치권은 완폐하게, 영구히 우리 대일본국 천황폐하께 이양되어야하며 조선인 관리에 의한 자치안은 받아들일 수 없소. 조선은 일본정부가 파견하는 일본인 관리의 통치를 받아야 하며 다만 조선인 명망가들이 참여하는 중추원을 두도록 하겠소. 실권은 없지만 자문기구로서 조선인의 의견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오.”
완용은 며칠 전 참정대신 한규설이 그에게 퍼부었던 비난들을 떠올렸다.
“공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는 오명이 두렵지도 않소?”
완용은 답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나라의 중대한 결단을 어찌 이해하겠소. 나의 노력으로 왕의 호칭과 왕실의 안위를 보장받았소. 왕실을 지키고 백성을 보존한다면 언젠가 힘을 얻어 나라를 회복할 날이 올 것이오. 험난한 국제사회에서 그나마 우리가 이웃 일본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천운인 줄 아시오”
한규설은 노기띤 목소리로 소리쳤다.
“자신을 속이지 마시오. 을사년에는 나라가 부강해지면 국권을 돌려준다더니 이제 다섯 해 만에 나라를 통째로 내어놓으라고 하고 있소. 나라가 없어진 마당에 왕실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그들이 껍데기만 남은 왕실을 언제까지 보존해줄 거라고 보시오? 필경 후일에는 조선인에게 일본 옷을 입고 일본 이름을 쓰라 할 날이 올 것이오.”
완용은 그의 비웃음이 거슬렸다.
“일본과의 합병은 피할 수 없는 대세요.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 그들을 물리치겠소?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최대한 얻을 것을 얻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상책이오. 어리석은 자들이 의병이다 뭐다 하면서 분별없이 행동하다가 모두 죽어가는 것을 보지 않았소? 나라를 지킬 수 없다면 왕실과 가문을 지키는 것이 나의 본분이오?”
한규설은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임금과 신하가 죽기를 각오하고 일본의 요구를 거절하고 맞선다면 어찌 일본이 무작정 강요할 수 있겠소? 저들은 우리가 목숨을 내놓고 저항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소. 모두가 제 몸 하나를 지킬 궁리에만 빠져있으니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니오?”
완용은 국제정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한규설의 어리석음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지금은 약한 나라가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세상이오. 조선처럼 약한 나라들은 하나같이 강대국의 식민지가 되어있소. 일본이 아니었더라도 조선은 러시아나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을 게요. 설령 조선이 나라를 되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일본의 보호 속에서 왕실과 백성들이 편히 살 수 있다면 그것도 받아들여야 할 나라의 운명 아니겠소? 수백 년 동안 중국을 섬겼는데 이제 중국 대신 일본을 섬기는 것이 뭐가 문제란 말이오?”
한규설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완용을 노려보았다. 완용은 스스로를 위로했다. 어리석은 자들은 앞뒤 분별없이 싸우자고 할 뿐이고 정세를 이해하고 협상의 이로움을 아는 자는 오직 자신뿐이라고.
완용은 창밖으로 조금씩 붉은빛을 띠어가는 정원의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느덧 가을이 다가왔음을 실감했다. 완용은 정성스레 먹을 갈았다. 조선최고 명필의 글씨를 간직하고 싶다는 총독부관리에게 선물로 몇 자 써 줄 참이었다. 조선최고의 명필. 참으로 멋진 호칭이 아닌가.
지난 여름, 조선이 일본이 되던 날은 의외로 평온했다. 우려했던 폭동이나 테러는 없었다. 몇몇 지식인들이 자결했다는 소식이 뒤따랐지만 그 이상의 소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완용은 백작의 작위를 받고 중추원의 고문이 되었다. 15만 원의 은사금도 받았다. 김석진은 작위를 거부하고 자결했고 한규설 등 몇 사람도 작위를 거부했지만 완용을 비롯한 68명의 지도층인사들은 작위와 은사금을 받아들였다. 완용은 더 이상 난처한 협상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기분좋게 받아들였다. 무엇보다도 변함없는 조선의 평온함이 좋았다. 병합이 되면 당장에 일본이 조선사람을 노예처럼 부리고 세상이 결단날 것처럼 설쳐대던 자들은 틀렸던 것이다. 조선이 일본이 되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밤과 아침이 뒤바뀌는 것이 아니질 않은가. 백성들은 변함없이 땀흘려 일하고 시장은 언제나처럼 활기를 띠고 있었다. 하늘도 땅도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완용은 이 새로운 조선의 가을날들이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