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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현 Mar 21. 2019

'노비 춘봉'의 일생

다른 시선의 역사 #3

 양인이었던 어미     

양인이었던 내 어미가 최진사댁 노비가 된 것은 삼년이나 계속된 흉년 때문이었다. 가뭄과 홍수가 해를 번갈아 닥치는 바람에 소출이 반으로 떨어져 땅주인에게 지대(임대료)를 주고 나면 먹고 살길이 막막했다. 조부는 급한 불부터 끄자고 고리대를 썼다가 흉년이 이어지자 파산하고 말았다. 전답을 모두 내어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어쩔 수 없이 열두 살이던 내 어미를 산청 최진사 댁에 스무 냥을 받고 팔아 겨우 빚을 갚았다고 한다. 어미는 그 이후로 다시는 가족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 모두들 뿔뿔이 노비로 팔려갔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최진사는 산청에서는 체통있기로 이름난 양반이라 어미는 별 탈 없이 종살이를 했다. 되려 주인마님이 어린 나이에 팔려온 내 어미를 측은히 여겨 여러 모로 돌봐주어 어미는 부모가족을 잃은 슬픔을 달랠 수 있었다 한다.   

어미는 열여덟 때 주인댁의 심부름으로 건너마을을 오가다 박생원 댁 흥종이라는 노비와 혼인했다. 노비 사이에 태어난 자식은 여종의 주인이 갖게 되는 법이어서 최진사는 혼기가 찬 흥종을 염두에 두고 일부러 박생원 댁에 자주 심부름을 보냈다 한다. 같이 붙어 살 수도 없는 노비 처지에 혼인이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그 일로 내가 태어났다. 하지만 그 흥종이란 노비는 곧 도망을 쳐버려서 나는 아비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최진사댁 노비 춘봉     

최진사 댁에는 나를 포함해 노비가 열일곱이었다. 여덟은 나와 함께 주인댁과 함께 살았고 아홉은 30리 밖에 떨어져있는 문태리의 전답 근처에 모여 살았다. 우리는 주인댁 바로 옆에 ‘호지집’이라는 조그만 초가를 지어놓고 살았다. 멀리 떨어져 사는 노비들은 주인댁의 잔심부름에 불려다니지 않아도 되는 것을 좋아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들이 안쓰러웠다. 흉년이 계속되어 주인댁에 정해진 양의 소출을 바치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그들은 틈나는 대로 텃밭도 일구고 짚신도 만들어 팔며 스스로 살 궁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비하면 주인댁과 함께 사는 나는 밥 굶을 걱정은 해본 적이 없었다.

내 나이 열아홉이던 임술년,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 마을까지 소동이 번질까 양반들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어느날 밤중에 박생원 댁 노비였던 막선이라는 놈이 찾아와서는 봉기에 참여하러 간다며 내게도 함께 가자고 했다. 보름 전 막선이 술에 취해 박생원을 두들겨패고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터였다. 막선은 자신이 좋아하던 여종을 박생원이 첩으로 들인 일로 앙심을 품고 있었다. 막선이 분통을 터뜨리며 거듭해서 함께 가자고 하는데 나는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그 밤에 어미를 남겨두고 따라나섰다. 겁쟁이, 비겁자라는 막선의 조롱을 견뎌낼 재간이 없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진주에 채 이르지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진주로 향하던 길에 목이 잘린 사내의 머리가 줄줄이 매달려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지나던 노인의 말로는 진주의 민란이 벌써 진압되어 주동자들의 목을 잘라 인근 고을마다 하나씩 걸어두었다는 것이다. 갈 곳이 없어 망연자실한 막선을 버려두고 나는 내달려 돌아왔다. 내가 이틀이나 말없이 사라진 일로 집안은 난리가 났지만 최진사는 도망친 죄를 묻지 않고 매를 몇 대 치는 것으로 일을 덮어주었다.      


주인집 아들 기종     

나는 그 무렵에 열일곱이던 여종 무향과 혼인했다. 무향도 본래 양인이었는데 아홉 살 무렵에 빚을 지고 우리 어미처럼 팔려왔다. 최진사는 무향이 다른 마을 노비와 혼인하기를 은근히 바라기는 했지만 무향이 마음이 굳은 것을 알고는 더 이상 막지 않았다. 나는 이전보다 열 갑절 열심히 일하겠다고 다짐하고는 혼인을 허락받았다. 최진사가 본래 우악스런 양반이 아니기도 했지만 혼인을 막아섰다가 장성한 내가 행패를 부리거나 다른집 노비들처럼 홧김에 도망을 쳐버리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최진사는 그해에, 아들 기종을 얻었다. 딸밖에 없던 집이라 온 마을 사람을 불러 잔치를 벌였다. 나도 무향과 사이에 아들 만석을 얻었다. 하지만 주인마님이 몸이 약해 젖이 돌지 않았다. 유모를 구할 길이 없어, 할 수 없이 무향이 주인집 아들과 만석, 둘 다 젖을 물렸다. 

한 어미가 둘을 먹이니 젖이 모자라 두 아기는 하루 종일 울며 보챘다. 무향은 젖이 모자라도 주인집 아들을 먼저 물릴 수밖에 없었다. 주인집 귀한 아들이 잘못되기라도 하는 날엔 아무리 체통있는 최진사라도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주인마님은 기종이 배고파 울 때면 우리에게 온갖 화풀이를 하고 닦달을 해댔다. 젖을 제대로 못 물렸기 때문인지 결국 내 아들 만석은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래도 주인집 아들 기종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을 우리는 다행으로 여겼다. 최진사도 만석이 잘못된 것이 미안했는지 우리가 살던 초가를 새로 지어주고 사례라며 다섯 냥을 내밀었다. 나는 극구 사양하다 두 냥은 받고 나머지는 돌려주었다.

기종은 제 아비보다도 나를 더 따랐다. 점잖빼는 아비보다는 직접 젖을 물리고 함께 흙놀이를 해주는 무향이나 내가를 더 가깝게 느껴졌을 것이다. 만석을 잃은 우리는 기종을 아들처럼 돌보았다. 기종은 다섯이 넘으면서 아랫사람에게 하대하는 법을 배웠지만 그래도 나를 특별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는지 나이가 들어서도 이놈, 저놈은 하지 않고 꼭 “춘봉아재”하고 불렀다.     


최진사의 죽음     

갑신년(1884년)에 최진사 어른이 세상을 떴다. 딸 셋이 모두 시집을 가버려 이제 이 집에 남은 것은 주인마님과 나이 스물을 조금 넘긴 아들 기종 내외뿐이었다. 

최진사는 벼슬길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소과에 합격하여 능력을 인정받은 이 고을의 수재였다. 너그러운 성품으로 거느리던 노비들이나 소작인들에게 욕을 듣는 일이 없었고 다른 양반들처럼 젊은 여종들을 함부로 건드리거나 첩실을 들이지도 않았다. 재물을 다루는 수완도 있어 물려받은 가산들을 잘 유지했다. 그에 비하면 아들 기종은 학식도 인품도 수완도 없이 유약하기만 한 인물이었다. 어려서는 제법 글도 읽고 성품도 온화해서 기대를 모았지만 모질지 못하고 무엇 하나 끈질기게 해내지 못하는 성격 탓에 과거에 몇 차례 낙방하고 나서는 향리 자제들과 어울려 주색잡기로 소일했다. 

최진사 어른이 돌아가시고 나자 거듭되는 기근 속에서도 붙어있던 노비들이 죄다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문태리에 떨어져 살던 노비들은 죄다 어딘가로 떠나버려 한때 스무 명이 넘었다던 노비들 중에 남은 것은 나를 포함해 여섯뿐이었다. 

그 즈음에 노비들이 도망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양반들은 도망친 노비를 잡아들인다고 사람을 보내기도 했고 직접 찾아나서기도 했지만, 사생결단하고 도망친 노비들은 순순히 잡혀오지 않았다. 오히려 잡으러 간 사람이 잔뜩 두들겨맞거나 조롱을 당하고 돌아오기 일쑤였다. 기종도 노비추쇄 경험이 많다는 사람을 구해 보내봤지만 소득이 없었다. 기종은 도망한 노비 몇이 영월에 모여산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영월 관아에 정식으로 노비를 잡아달라는 청원을 넣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영월관아는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핑계를 대며 협조하지 않았다.       

도망친 노비들을 다시 데려올 수 없게 되자 기종은 스무 마지기나 되는 전답을 열 마지기만 남기고 팔아버렸다. 노비들이 죄다 도망쳐버려 농사지을 사람이 없던 탓도 있지만 기종은 그 땅을 소작이라도 놓아 어떻게든 가세를 일으켜보리라는 의지를 잃은 듯 보였다. 기종은 일하는 곳에 나와보지도 않고 예전처럼 술판만 찾아다녔다.       

동학란과 민보군     

갑오년에는 잊지 못할 난리가 있었다. 동학란이었다. 동학군 무리가 온 세상을 휩쓸고 있다는 소식은 금세 우리 마을에도 전해졌다. 동학군은 수령과 양반들을 잡아들여 곤장을 친다고 했다. 아예 동학군이 동헌을 차지하고는 직접 조세를 걷거나 송사를 다루고 노비문서를 불태웠다는 얘기도 들렸다. 동학군에 합세하면 양반, 노비 ‘구별’ 없이 대접받으며 살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동학군에 합세하기 위해 마을을 떠났다. 몇몇 동네 양반들은 떠나는 노비에게 뺨을 얻어맞거나 엉덩이를 걷어차이는 수모를 겪었다. 

양반들은 세상이 망하려는 징조라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더니 나라를 어지럽히는 동학도를 때려잡아야 한다며 장정들을 모아 민보군을 만들었다. 양반 댁에 딸린 노비들은 전부 민보군이 되었고, 등짐장수 보부상이나 향리, 사냥하던 포수들도 얼마씩 돈을 받고 합세했다. 나도 민보군이 되어 동학군과 싸웠다. 

민보군은 관군과 함께 패퇴한 동학군의 퇴로를 막는 일을 맡았다. 일본군이 관군에 가세하면서 동학군은 위세는 금방 사그라들었다. 사기를 잃은 동학군은 우리를 피해 뿔뿔이 흩어졌다. 동학군에 앞장섰던 자들은 자취를 감췄고, 소극적으로 가세했던 사람들은 짐짓 시치미를 떼고 마을로 돌아왔다. 

민보군은 주변 고을을 샅샅이 뒤져 동학군에 가담했던 이들을 잡아들였다. 우리가 잡아들인 동학도들 중에는 수년전에 도망쳤던 노비 병술, 계민도 있었다. 그들은 도시로 나가 장사를 하다 실패하고는 먹고 살길이 없어 동학란에 가담했다고 했다. 양반들은 신분을 숨기고 화전민으로 사는 이들을 악착같이 잡아들여 목을 매달았다. 

동학군의 괴수 전봉준이 붙잡혀 효수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나서야 동네 양반들은 민보군을 해산했다. 나는 민보군에 몸담은 대가로 다섯 냥을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그 와중에 우리집 노비 하나가 다시 도망을 쳐서, 나와 무향까지 합쳐 넷만이 이 집에 남게 되었다.      


갑오년신분제 폐지

  내가 쉰다섯이 되던 해 주인마님이 돌아가셨다. 어머니를 잃은 기종의 슬픔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기종 내외와 고작 일곱 살 먹은 먹은 아들하나가 기종의 가족 전부였다. 양반이라고는 하지만 이제는 종을 넷씩(!)이나 재우고 먹이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눈치빠른 양반들은 일본에서 찾아오는 미곡상인과 거래를 트거나 곤궁한 양반들의 토지매매를 중개하여 오히려 재물을 모으기도 했지만 기종에게 그런 수완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더 이상 스스로 가문을 이끌어가기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기종은 나를 불러 전주에 있는 당숙어른 댁에 편지를 전하고 오도록 했다. 아마도 남은 가산을 정리해 당숙어른 댁에 의탁해볼 요량이었던 것 같다. 길을 떠나는 나를 기종은 대문 앞까지 나와 배웅했다. 어깨가 축 늘어진 그의 모습은 초라했고 그의 아비 최진사와 같은 당당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무향에게 내가 없는 동안 주인댁을 잘 보살피도록 당부하고 길을 떠났다.

나는 전주 당숙 어른댁에 기종의 편지를 전하고 답장을 받아들고 나왔다. 글을 알지는 못했지만 탐탁치 않아하는 당숙어른과 집안의 표정으로 보아 대강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주인은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곤궁을 극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자명했다.

나는 그곳에서 임술년 민란 때 헤어졌던 ‘막선’을 만났다. 막선은 장시를 오가는 보부상단의 우두머리인 ‘본방’이 되어있었다. 이름도 바꾸어 막선이 아니라 ‘오영수’라고 했다. 막선은 내가 민보군이 되어 동학도들을 잡으러 다니던 때에 갑오경장이 일어나 양반과 노비의 차별을 법으로 금했다고 알려주었다. 막선은 더 이상 내가 최씨 가문에 매여 고생할 필요가 없다며 원한다면 자기 상단에 자리를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집을 구해줄 테니 무향을 데려와 함께 살라고도 했다. 임술년에 갈 곳 없는 막선을 버려두고 왔던 나로서는 막선이 내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내가 더 이상 노비가 아니라는 막선의 이야기가 내게는 썩 달가운 얘기만은 아니었다. 나라에서 노비제를 혁파했다고 하지만 육십이 다 되어가는 내가 최씨 집을 나온들 새롭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무하고 농사짓는 일 외에 나는 해본 일이 없고, 땅 한 뙤기 없는 내가 무엇을 해 먹고 살 수 있을까. 이 나이에 새로 무엇을 익힌다는 것도 우스웠다. 

무엇보다 나와 무향마저 떠나고 나면 최씨 집안은 어찌 될 것인가. 우리가 떠나고 나면 약삭빠른 여종 언년과 자명이 집에 남아있을 리 없었다. 유약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기종 내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최씨 가문은 끝을 보고 말 것이 틀림없었다. 당숙의 답장을 받아들고 실망하여 고개를 떨굴 기종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양반이라고, 주인이라고 해봐야 이제는 혼자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들이었다.     

나는 막선에게 작별을 고하고 산청으로 발길을 돌렸다. 돌아가는 것이 늦어지면 기종이 나마저 도망을 쳤다고 오해할지 몰랐다. 낙담하여 또 며칠씩 술에 취해 있을 기종의 기운을 돋울 방법을 고민해야 했다. 최씨 집안을 일으킬 사람은 결국 기종뿐이다.

따지고 보면 나는 노비치고는 무척 좋은 대접을 받으며 살았다. 몇 해 전부터는 적지만 세경도 꼬박꼬박 받았고 주인마님이 돌아가신 후로 기종은 중요한 일들을 나와 의논하기도 했다. 매를 맞거나 욕지거리를 들은 일도 별로 없었다. 이만하면 종살이도 썩 나쁜 일은 아니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산청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들처럼 여기고 키웠던 주인 기종이 집안의 어른으로 자리잡게 된다면 내 남은 여생의 낙으로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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