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내 친구 국민은행과 농협
동네가 같았던 남편과 나는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났다.
얼굴만 알던 사람은
대학교 때 조금 더 친해졌고
친구 사이일 때도 우리는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저축을 했다.
연인일 때도 그 상황은 변하지 않았고
부지런히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데이트를 했다.
콘서트장 같은 것은 너무 비싸고
커피숍도 1주일에 한번 가는 가난한 임용고시 준비생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별로 불행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행복했다.
남편은 축구만 하면 되고,
나는 미드에 빠져 살았다.
둘이서 공부하고 돌아오는 길에 보던 별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본의 아니게 아껴사는 것이 습관이 된 우리는
엄청난 근검 절약을 할 수 있었다.
시작할 때 지원이 큰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초임교사 월급에 짧은 직장 생활을 감안하면
꽤 많은 돈을 둘이 모을 수 있었다. (6000만원)
거기에 시부모님이 주신 돈(비밀)약간의 대출(2000만원)을 보태
조치원에 아주 작은 집을 샀다.
집을 산것도 간단한 이유였다.
전세가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작은 집이라도 내 집이 좋아서 그렇게 살기로 했다.
그래도 그 집은 우리의 집이어서,
스위치도 전등도 손수 바꾸고, 커텐봉 하나 인터폰 걸이도 우리 손이 다 거쳤다.
창문 밖에는 넓은 밭이 있어서
사계절이 살아있었다.
내 친구들은 집들이 와서 경악을 했다.
(너무 집이 작다. 외지다. 등등등..)
별로... 나는 그래도 그 집이 좋았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여보, 이제 우리도 이사 가야돼. 여기는 너무 좁아서 아이 둘을 키울 수가 없어."
그 당시 사랑하는 우리집은
큰 걸음 두세발이면 모든 방을 갈 수 있었다.
"난 대출받아 집사는 거 싫어. 이제야 대출 다 갚아서 내집 되었는데."
우리는 다시 엄청난 근검절약으로
애 낳은 결혼 2년 차에 대출을 다 갚았다.
"대출이 싫다고????"
할 말을 잃었다. 그럼 몇억을 언제 모아서 들어가.
나는 화가 났다
내 집도 좋지만 이 집에서 애 둘은 무리다.
이미 사랑스럽지만 작은 우리 집은
애 하나 태어났다고 아무리 정리를 해도 수납불가 상황이 되고 있었다.
딱 하나 좋은 점은 애가 기어서 어디를 가도
내가 5초 안에 들어 올릴 수 있다는 것 뿐이었다.
"여보 모델하우스 좀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