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예보(Sarajevo) 구시가에서 사라예보가 되다.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 구시가에 가면,
바닥에 Sarajeveo, Meeting of Cultures라는
글자가 적힌 띠가
나침반과 함께 그려져 있는 게 보인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글자 띠 위에 서서
열심히 셀카를 찍는다.
‘왜들 저러나’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한쪽 벽에 관광객 행동지침(?)이 쓰여있다.
그 선 위에 서서 동쪽을 보면,
오스만제국 시절 형성된 터키식 구시가가,
서쪽을 보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만들어진
유럽식 구시가가 보여서,
이곳은
동양적 사라예보와 서양적 사라예보
모두를 사진에 담을 수 있는,
관광명소였던 거다.
이건 그 “문화경계선” 바로 동쪽.
이건 그 “문화경계선” 바로 서쪽이다.
그런 흥미로운 지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다른 관광객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 신기한 선 위에 서서
동쪽과 서쪽으로 셀카 두 컷을 찍었다.
그 구시가의 경계선뿐 아니라
사라예보 어떤 골목에서도 이렇게
Sarajevo, Meeting of Cultures라는 문구와 함께,
서구식 의상과 터키식 의상,
터키식 전통 가옥과 19-20C초 최신식 자동차,
그리스도교 교회와 이슬람 사원의 실루엣이
공존하는 어떤 호스텔 광고를 봤고,
터키 친구 멜렉, 이탈리아 친구 키아라와 갔던
사라예보 구시가, 터키식 디저트 카페의 창문에서도
가톨릭 성당과 이슬람 사원이 함께 그려진
아래 같은 로고를 봤는데,
나는 이게 바로 사라예보인 것 같다.
그것이 동양이든, 서양이든,
터키든, 오스트리아든,
그리스도교든, 이슬람교든, 유대교든,
과거든, 현재든,
서로 다른 것들이 어색하지 않게 섞여서,
독특한 문화적 하이브리드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그런 여러 문화가 순차적으로 덧붙여진
사라예보에선
구시가에 그어진 선만큼 선명하게
그 경계가 시각적으로 드러난다.
보스니아의 사라예보(Sarajevo)는
사실
그 이름부터 문화적 하이브리드다.
"사라이(Saray)"는 터키어로 “궁전”, "저택",
"에보(-evo)"는 보스니아어 장소 명사 접미사다.
15세기 오스만제국이 보스니아 지역을 점령한 후,
이곳의 마을을 도시화하고,
터키 총독의 저택을 지으면서,
“도시” 사라예보의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된 거라,
이름에도 터키어가 들어가는 거다.
그러고 보면 사라예보는
유럽의 대도시치곤 역사가 매우 짧은 편이다.
지지지난 포스트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오스만제국 시절 많은 보스니아인들이
그리스도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하면서
현재 보스니아 인구의 약 50%가 이슬람교도고,
수도 사라예보 구시가에도 이슬람 사원이 많다.
약 4세기 후인 1878년 오스만제국을 대신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를 관할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근대화가 진행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식민 보스니아의 사라예보를
근대화 시범도시 같은 걸로 삼아서,
오스트리아 황제의 도시 비엔나보다 앞서
사라예보에 유럽 최초로 트램 레일을 깔고,
베를린에 이어 유럽 두 번째로 트램을 운행했으며,
전기도 개통하고,
짧은 기간 동안 급속한 근대화를 시행했다.
그래서 15-19세기 조성된 터키식 구시가 바깥으로,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서쪽으로,
19세기 서구식 건물들이
특히 강변을 따라 쭉 늘어서 있다.
사라예보 역사 투어의 현지인 가이드가
사라예보의 근사한 건물은 다 그때 건설된 거라고
사라예보 주민들이 농담한다고 했는데,
정말 좀 그런 경향이 있는 거 같다.
그리고 이 때
20세기 세계사의 매우 중요한 사건도 벌어진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실제적 지배 하
보스니아에 살던
세르비아계 동방정교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가
보스니아를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시켜
"남쪽(Jug) 슬라브인(Slaven/Sloven)의 나라",
즉 유고슬라비아(Jugoslavia)를 만들기 위해,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드(Franz Ferdinand)를 암살하여,
바로 이 사라예보에서
제1차세계대전이 시작됐다.
단지 그렇게만 알고 있던 이야기를
사라예보 역사투어 하면서
좀 더 자세하게 들었는데,
이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포스트
라틴 다리(Latin Bridge, Latinska ćuprija) 근처로 옮긴다.
아무튼 1차세계대전이 발발한 그 역사적 장소를
사라예보에서 직접 확인 가능하다.
오스트리아가 제1차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되면서,
보스니아를 비롯한,
그 지배하에 있는 나라들은 독립국이 되었고,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꿈꾸던
“남쪽의 슬라브인의 나라”,
유고슬라비아도 만들어졌다.
공산 유고슬라비아 시절에도
사라예보는 가장 발전한 도시 중 하나였고,
특히 1984년 동계올림픽을 개최하며,
유고슬라비아에서 최초로,
그리고 현재까지도 구 유고연방에서 유일하게
올림픽을 개최한 도시가 되어,
그 올림픽을 전후해서
사라예보는 외적으로 그게 성장한다.
그 올림픽 경기장 또한 현재 방문 가능하다.
사라예보에서 촉발된 제1차세계대전의 끝에서
세계사에 등장한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는
1992-1995년 보스니아 전쟁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보스니아 전쟁은
1992년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와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
즉 동방정교도와,
크로아티아와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인,
즉 가톨릭교도가
이슬람교도 보스니아인들과 벌인 전쟁이다.
특히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는
1992년 독립선언 후 세르비아 군에 의해 봉쇄되어,
1996년 2월까지 외부세계로부터 단절된 채,
많은 보스니아계와 세르비아계가 목숨을 잃은,
치열한 내전을 벌이기도 했다.
가슴 아픈 역사적 사건인
보스니아 전쟁의 격전지인 사라예보엔
아직도 도시 곳곳에
20여 년 전 전쟁의 흔적이
매우 선명하게 남아 있다.
1995년 종전된 그 전쟁 이후,
동방정교 세르비아계는 세르비아로,
가톨릭 크로아티아계는 크로아티아로
많이 이주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시절 다양하게 섞여서 공존하던
종교와 민족이,
새로 생긴 독립 국가들의 국경에 따라
구분되게 되었다.
이슬람교도, 동방정교도, 가톨릭교도가
각각 30% 정도씩 있고,
유대인들도 꽤 많이 거주해서,
“유럽의 예루살렘”,
“발칸의 예루살렘”이라 불렸다는
사라예보는
그 1990년대 보스니아 전쟁 이후 현재,
85% 이슬람, 3% 정교, 2% 가톨릭으로 재편됐다.
특별한 종교 활동을 안 하던 이슬람교도들도
전쟁 이후 독실한 신자가 되면서,
최근 몇 년 이슬람 모스크도 많이 건설돼서,
현재 사라예보에 모스크가 200개가 넘는단다.
그런데 보스니아인 현지 가이드 말이
보스니아가 다른 건 몰라도
똘레랑스(Tolerance)는
그 어떤 나라보다 강하단다.
사실 전쟁 전 수백 년간
여러 종교의 사람들이 그렇게 함께 거주했던
역사가 있으니,
이성적으로 생각해봐도 그럴 것 같고,
전전전 포스트에서도 언급했듯이,
사라예보 가기 전에 모스타르에서
난 이미 외국인에게 베푸는
보스니아인들의 친절을 경험하기도 해서,
그 얘기는 사실 크게 놀랍지 않았다.
그런데,
이슬람교도가 압도적 대다수가 된 지금까지도,
이슬람교, 정교, 가톨릭의 종교적 축일을
모두 공휴일로 지정하고,
자신의 종교와 관계없이
그 모든 종교 행사에 참여한다는,
그래서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에는
이슬람교 신자들도 가톨릭 성당이나 정교 성당에 간다는 등 구체적인 사례들은 좀 놀라웠다.
그리고 정부의 반이민정책과 달리,
보스니아 국민들은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체로 우호적인데,
실업률이 45%에 달할 정도로
경제가 안 좋아서,
난민이 들어와도 보스니아에서 살지 못하고,
서유럽으로 가는 통로로만 삼는다는 얘기,
어딘가에 노숙자가 있다는 기사가 나면,
“내가 지금 외국에 나와 있어
우리 집 비어 있으니 거기서 지내라”며
자기 집을 내주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는 얘기도 재미있었다.
여행하면서 만난 보스니아인들을 보면,
그런 믿기 어려운 호의가
허풍이나 과장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사라예보에서 재회한
자그레브 룸메이트 터키인 멜렉이
사라예보에선
이슬람 모스크에서 나오는 기도 소리가
유난히 작다고 그랬는데,
그러고 보니 모스타르, 프리슈티나에서와 달리,
사라예보에서 난 모스크에서 나오는
기도소리를 들은 기억이 특별히 없고,
성당에서 들리는 종소리도 크지 않았다.
누군가를 그걸 “독실하지 않음”이라고
손가락질할 지도 모르지만,
그 문화적 다양성 때문에 일찍이
“발칸의 예루살렘”으로 불린 사라예보 사람들은
어떻게 다름을 존중하며 공존하는지 아는 것 같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는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옆 나라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에서
사라예보까지는 버스가 하루 4대 정도 다니는데,
소요시간은 약 8시간,
편도 비용은 약 190쿠나(약 35,000원)다.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사라예보까지는
하루 4대 정도의 버스가 다니고,
소요시간은 약 7시간,
편도 약 2500 디나르(약 27,000원)다.
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에서 사라예보로까지는
버스로 약 2시간 30분이 걸리고,
편도 약 15마르카(약 1만원)다.
난 모스타르-사라예보 간 버스를
자그레브에서 미리 인터넷으로
80쿠나(약 15,000원) 주고 예매했는데,
모스타르 숙소 주인아주머니 말이,
개인영업하는 버스를 타고
6유로 정도로 갈 수 있다고 한다.
실업률이 높아 사람들이 직장이 없으니,
그렇게 시외버스보다 더 싼 가격으로
사람들을 실어다 주는 일로 돈을 버는 거다.
모스타르에서 사라예보 가는 가장 이른 버스는
아침 9시 출발 예정이었는데,
8시 58분에 출발했다.
난 크로아티아에서 여행하면서
이렇게 1-5분 일찍 출발하는 버스를 여러 번 만나서,
이 얘기를 크로아티아 선생 밀비야에게 했더니,
밀비야는 버스가 늦게 출발하면 늦게 출발했지,
일찍 출발하는 경험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단다.
내가 좀 이상하게 그런 일을 많이 당했거나,
시간 강박이 있는 내가 몇 분 가지고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지도 모르겠다.
버스가 한참 구불구불 산길을 달리다가,
9시 45분쯤 Jablanica라는 곳에 도착했는데,
버스터미널 바로 옆에 강도 있고, 시장도 있고,
좀 복잡복잡한 시골 읍내 같은 소도시다.
그리고는 또다시 왕복 2차선 산길을 달리는데,
이 동네는 산 좋고 물 좋은 곳인 것 같다.
길이 막히진 않는데,
도로가 구불구불해서 천천히 간다.
어딘지 모르게 강원도를 연상시킨다.
그렇게 가다가 드디어
11시 15분쯤 사라예보에 입성했는데,
차가 많고 길이 막혀서,
11시 40분에야 버스가 터미널에 도착했다.
며칠간 계속 작은 소도시에만 있다
모처럼만에 대도시에 와서 그런지,
사라예보가 무지 커 보인다.
대도시답게 조금만 발품을 팔면 몇 시간 만에
중심가를 다 둘러볼 수 있는 크기가 아니고,
버스터미널, 그리고 그 옆 기차역에서도
30-40분 정도 동쪽으로 걸어가야
뭔가 볼거리가 있는
관광지 사라예보가 비로소 눈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도착할 때는 상관없는데,
사라예보 버스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탈 때는
city tax라는 명목으로
터미널 사용료 1마르카(약 650원)을 내야 한다.
난 짐이 작아서 사용하지 않았는데,
트렁크에 싣는 짐 값을 따로 받는다는
얘기도 있으니,
사라예보에선 시외버스 타기 전에
보스니아 마르카를 잔돈으로 좀 남겨두는 게 좋다.
사라예보 중간중간에 아래 사진 같은
부분적 관광안내 지도가 세워져 있고,
보스니아어, 영어, 독일어, 터키어가
병기되어 있다.
그보다 확장된
사라예보 구시가와 중심가는 이렇게 생겼다.
물론 사라예보 시 전체는 훨씬 커서,
1984년 동계 올림픽 장소나,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은
이 지도 훨씬 바깥에 있다.
위 지도 가운데 붉은색으로 표시된 곳쯤이
[지도 19번]
터키식 구시가와 서구식 구시가의 경계다.
우선 19세기 이전 형성된 터키식 구시가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움직여가며 살펴보면,
우선 터키식 구시가 서북쪽엔
보스니아 연구소(Bošnjački institut, Bosniak Institute)[지도 22 근처]가 있다.
둥근 지붕의 터키식 건물은
가지 후스레브-베이 목욕탕(Gazi Husrev-bey's hamam)으로
16세기 건설되어 20세기 초반까지
터키식 목욕탕으로 사용되었지만,
현재는 보스니아 연구소의 일부다.
연구소엔 갤러리도 있어 일반인도 입장이 가능한데,
일찍 문을 닫아서 들어가보진 못했다.
가지 후스레브-베이는 16세기초
오스만제국 시절 보스니아를 관할한 통치자로,
사라예보 발전에 크게 공헌한 보스니아인이라
도시 곳곳에서 그의 이름을 만날 수 있다.
Gazi는 오스만제국의 특별 존칭,
터키어 bey (혹은 보스니아어 beg)는
오스만제국의 "주지사" 같은 직함인데,
아마 그것이 다 들어가야
"위인"에 대한 존경심이 드러나는지,
이것저것 다 붙어 이름이 너무 길다.
아무튼 16세기 오스만제국 시절 처음 창설된
가지 후스레브-베이 도서관(Gazi Husrev-bey's Library, Gazi Husrev-begova biblioteka)도 있고,
16세기 세워져,
보스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중등교육기관인
가지 후스레브-베이 기술학교(Gazi Husrev-begova medresa)도 있고,
아래 사진에서 뾰족한 탑이 보이는 가지 후스레브-베이 모스크(Gazi Husrev-bey Mosque, Gazi Husrev-begova džamija) [지도 10번]와
둥글둥글한 지붕의 낮은 건물 가지 후스레브-베이 시장(Gazi husrev beg bezistan)[지도 17번]도 있다.
16세기에 세워진 가지 후스레브-베이 시장은
오스만제국 시절 사라예보 상업의 중심이었고,
지금도 사라예보 기념품을 파는 중요 관광명소다.
그 서쪽의 폐허는
타슐리한(Tašlihan)[지도 21번]으로
16세기 오스만제국 시절 건설된 숙박시설인데,
19세기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은 벽만 남았다.
타슐리한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다른 터키식 숙박시설은 남아 있다.
이건 그 중 하나인데,
현재 2층은 숙박시설이 아닌 사무실로 쓰이고,
1층엔 카페와 레스토랑이 있다.
이건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페르하디야 모스크(Ferhadija džamija)다.
북적북적한 관광지 중간에 있는 이 모스크 앞엔
작은 이슬람 묘지가 있다.
이건 터키식 구시가 동쪽의
바슈차르시야 모스크(Baščaršijska Džamija) [지도 8번 근처]다.
사실 비이슬람교도에게
모스크는 다 거기서 거기 같은데,
이 바슈차르시야(Baščaršija) 지역엔
15세기에 형성된 터키식 광장이 있어,
풍경이 특별하다.
광장 중앙엔 세빌(Sebilj)이라고 불리는
매우 동양적 디자인의 커다란 급수대가 서 있다.
세빌은 종교의식 전 정화하기 위한 곳으로,
사라예보의 세빌은 18세기 세워졌다.
광장 자체가 매우 크고,
이 근처는 상점, 카페, 레스토랑도 많고,
세빌이 약속 장소로 매우 좋은 이정표라
물 마시는 사람들 말고도 사람들이 항상 많다.
나도 여기서 친구들을 만났다.
물론 이밖에 터키식 구시가 곳곳에
이국적인 구경거리가 가득하다.
터키식 구시가 근처엔
물론 터키적이지 않은 것들도 있다.
그 중 하나인 성 미카엘, 가브리엘 대천사 성당(Church of the Holy Archangels Michael and Gabriel, crkva sv. Arhanđela Mihaila i Gavrila)[지도 13번]은 16세기 이전에 건설된 세르비아 정교회 성당이다.
19세기에 건설된
세르비아 정교 성당[지도23번]과 구별하기 위해
"구 세르비아 성당(Stara srpska crka)"
이라 불리는 이 오래된 정교 성당은
세르비아-비잔틴 양식으로
건축적 가치가 크다고 하는데,
관광지 뒤쪽에 자리 잡고 있는 데다가
매우 소박해서 잘 눈에 띄진 않는다.
그 근처 유대인 박물관(The Jewish Museum, Muzej Jevreja) [지도 14번]은 16세기 말에 건설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가장 오래된 유대교 회당이다.
15세기 스페인, 포르투갈을 떠난 유대인들 상당수가
사라예보에 정착해서,
한때 사라예보 전체 인구의 20%에 육박했지만,
2차세계대전 중 사망하고,
생존자들은 이후 거의 다 이스라엘로 이주해서,
지금은 유대인들이 많지 않다.
월-금 10:00-16:00, 일 10:00-13:00
입장료: 성인 3 마르카(약 2천원), 할인 1마르카.
터키식 구시가 서쪽에선
19세기 이후 형성된
오스트리아-헝가리식 구시가가 펼쳐진다.
그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축은 아마
예수성심 대성당(Sacred Heart Cathedral, Katedrala Srca Isusova) [지도 22번]일 것이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가장 큰 가톨릭 대성당으로,
19세기 말에 건설되었지만,
프랑스 성당을 모델로 삼아 신 고딕양식으로 지어,
언뜻 보면 오래된 유럽의 고딕성당 같아 보인다.
성당 앞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동상이 서 있다.
이 대성당은 사라예보의 상징과 같은 건물로,
사라예보의 문장에도 등장한다.
가톨릭 대성당에서 서쪽으로
페르하디야(Ferhadija) 길을 따라가면,
좁은 골목 양쪽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건축된
19세기 서구식 건축들이 나타난다.
그 길에는 19세기 말에 세워진
"시장보다는 극장에 가까운" 외관을 가진
신 르네상스 양식의
마켓홀(Gradska tržnica, City Market)도 보이고,
어디서 본 것 같긴 한데,
뭔지 알 수 없는 문양과
유고슬라비아 유명 락밴드 Indexi가
발족한 장소라는 명패도 보인다.
그 길 남쪽에 있는 작은 공원엔
1997년 이탈리아 조각가가 만들었다는
Multikulturalni čovjek izgradit će svijet.
(다인종적 인간이 세계를 건설할 것이다)
라는 글 위에 벌거벗은
다인종적 인간 동상(Spomenik multietničkom čovjeku)이 서 있고,
196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이보 안드리치(Ivo Andrić) 동상도 있고,
성모탄생 대성당(Cathedral Church of the Nativity of the Theotokos, Saborna crkva Rođenja Presvete Bogorodice)[지도 23번]도 있다.
성모 탄생 대성당은 바로크 양식이라
언뜻 보면 가톨릭 성당 같은데,
19세기 건설된 세르비아 정교회 성당이다.
이미 존재하던 터키 구시가의 정교성당[지도 13]과
구분하기 위해 흔히
"새 세르비아 성당(Nova srpska crkva)"
이라 불리는 이 성당은
가장 높은 사라예보 이슬람 모스크보다
일부러 몇 센티미터 더 높게 지어,
당시 가장 높은 사라예보 건축이었고,
현재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가장 큰 정교회 성당이라고 한다.
너무 노출이 심한 여름 옷 같은
특별히 "불경한" 복장이 아니면,
입장해서 성당 내부를 구경하거나,
정교회 의식을 구경할 수도 있다.
페르하디야 길 서쪽 끝에 가면,
이제 보행자 도로는 끝이 나고,
19세기 오스트리아-헝가리식
고풍스러운 건축들의 향연도 끝이 난다.
그리고 그곳에
2차세계대전 중 사망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꺼지지 않는 불꽃(Vječna vatra)이 있다.
그리고 이제 그 서쪽으로는
20세기 건축들이 늘어서 있다.
길도 20세기 유고슬라비아 지도자 이름을 딴
티토 길(ulica Maršala Tita)이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유럽에선 20세기 건축들이 제일 남루하다.
이 거리 북쪽엔 거대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중앙은행(Centralna banka Bosne i Hercegovine, Central Bank of Bosnia and Herzegovina)이 보인다.
이 은행이 이 곳에 자리를 잡은 건
보스니아 전쟁 후 1997년부터인데,
건물 자체는 20세기 초에 건설되었단다.
그래서 그런지 전체적 골격은 현대적인데,
자세히 보면 디테일이 좀 고전적이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재미있는 건
그 길 건너편에 있다.
물론 이것도 건물 자체는
그냥 생기없는 20세기 건물인데,
잘 보면 20세기 초반 스타일인 듯한
보스니아 옷을 입은 남녀의 부조 디테일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매우 독창적인 것이다.
이런 건물 외벽 부조 자체는 매우 유럽적인데,
그 안의 사람들은 터키식 의상을 입었다.
11박 12일 구 유고슬라비아 여행 중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선
유난히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모스타르 가는 길엔 한 학기 후에
한국으로 교환학생 온다는 대학생과 친구들,
모스타르에선 가족같이 대해 준
따뜻한 숙소 주인아주머니와
외국인인 내가 길을 못 찾을까 봐
먼저 다가와 길을 안내한 친절한 행인을 만났고,
메주고리예에선 크로아티아어 같이 배우던
헝가리 친구 라우라를
우연히 성모발현언덕에서 만나더니,
사라예보에선 이상한 사람, 재밌는 사람
그리고 반가운 사람들을 만났다.
사라예보에서 만난 이상한 사람은
자신을 세르비아인으로 소개한
보스니아 토박이 알렉산다르였는데,
“아시아 여자 만나는 게 꿈이었다”는
헛소리를 하면서,
되도 않는 수작을 했다.
거절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와
한 시간가량 길에서 실랑이를 하면서,
무섭기도 하고, 짜증 나기도 하고,
그런 시간이 너무 아깝기도 했는데,
다행히도 결국 그가 작별인사를 하고 사라졌고,
사라예보에 아시아인 방문객이 얼마나 적은 지,
높은 실업률이 청년들을 얼마나 이상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그 동안 여행하면서
내가 얼마나 운이 좋았던 건지도 깨달았다.
사라예보가 생각보다 안전하지 않은 곳인 것 같아,
그다음부터는 계속 긴장하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셀카봉을 한 손에 꼭 쥐고 다녔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사라예보는
내 첫인상 그대로 범죄율이 매우 낮다고 한다.
그 다음날엔 반가운 친구 키아라와 멜렉을 만났다.
이탈리아인 키아라와 터키인 멜렉은
자그레브에서 같은 집에 살던,
자그레브 대학 교환학생과 NGO 인턴이었다.
크로아티아 자다르 갈 때도 그렇고,
스플리트 갈 때도 그렇고,
함께 가자는 말이 나오긴 했는데 같이 못 갔고,
이탈리아 토스카나 자기 집에 놀러 오라는
이탈리아인스러운 키아라의 매력적인 제안에도,
결국 멜렉만 가고,
나는 구 유고슬라비아 여행 오느라 가지 못했었다.
그러다 멜렉이 이탈리아에서 터키로 돌아갈 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들렀다 가기로 했고,
키아라도 함께 하기로 했는데,
그 중 우리의 사라예보 체류 일자가 겹치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친구들이 오전에 무료 역사투어 한다고 해서
거기서 만나기로 하고,
10시 30분에 맞춰 국립극장 앞으로 갔다.
그날따라 사람이 많아서 30명 정도 모였는데,
(보통은 10명 정도란다)
그 많은 사람들 중 키아라와 멜렉은 없다.
시작할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
늦게 일어나서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받고,
살짝 삐쳤는데,
그냥 나 혼자라도 투어에 참여하기로 했다.
사실 사라예보 자체가
매력적인 이야기를 많이 가진
재미있는 도시기도 하지만,
그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따로 인사를 한
보스니아인 가이드가
(그녀의 이름을 들었는데,
흔한 이름이 아니라 까먹었다)
유머 감각 있고,
카리스마도 있고,
영어도 매우 유창하고,
모든 작은 질문에
현지인의 에피소드가 담긴 답변을 해주니,
투어가 너무 재미있다.
10시 30분에 시작해서
중간에 11시 40분에 20분 쉬었다가
12시 30분 정도까지 했는데,
루트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너무 알차다.
그리고 또 내가 혼자라서 잡담 안 하고,
오히려 더 투어에 집중했던 것 같기도 하다.
투어 마지막에 식당가에서 끝내면서
그 근처 식당 약도 주는 거 보니,
거기서 후원받고 무료로 해주는 것 같은데,
무료 치고 너무 좋아,
강력 추천하고 싶은 투어다.
결국 키아라와 멜렉은 점심 먹고 3시쯤 만났다.
구시가의 터키식 디저트 카페에서,
그 분야에선 현지인이나 마찬가지인 터키인 멜렉이
맛있는 터키식 디저트 Künefe를 주문해서,
보스니아식 커피에 곁들여 먹었다.
사라예보에서 그렇게 만난 것을 신기해하며,
서로의 여행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렇게 2시간 정도 수다를 떠는데,
비록 한국어로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 아는 사람과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아,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떠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그 별거 아닌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키아라는 다시 자그레브에서 며칠 더 볼 수 있지만,
멜렉은 이제 그렇게 터키로 가는 거라,
그렇게 헤어지기 너무 아쉬워서,
7시 반에 다시 만나 저녁을 함께 먹고,
나는 자그레브행 밤버스를 타러 터미널로 떠났는데,
반가움 때문인지,
아쉬움 때문인지,
저녁도 너무 맛있고,
그 친구들과 함께 하는 저녁 공기도 달콤하다.
낮에 디저트 카페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보니,
사라예보를 형상화한 카페 유리창의
이슬람 모스크와 가톨릭 성당의 그림이
멜렉과 키아라를,
그리고 그들과 나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자그레브에 온 목적도 달랐던,
상이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우리가
같은 집에서 그렇게 몇 개월을 함께 살고,
사라예보라는 낯선 도시에서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반갑게 다시 또 만나서
그렇게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게,
사이 좋게 나란히 붙어있는
사라예보의 대성당과 모스크를 닮았다.
그러고 보니,
2018년 7월 초 구 유고슬라비아 여행 끝,
여러 문화들이 오랫동안 공생했던 사라예보에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의 룸메이트들과 재회한
나와 그 친구들이 바로 사라예보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