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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oga Nov 16. 2016

오시비엥침(Oświęcim)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한국에서는

독일식 이름인 아우슈비츠(Auschwitz)라고 알려진

비극적 도시의

폴란드 이름은 오시비엥침(Oświęcim)이다.


오시비엥침(Oświęcim)

크라쿠프로부터 서쪽으로 80Km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즉, 오시비엥침(Oświęcim)은

크라쿠프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다.


나는 2008년 여름에 방문했을 때

크라쿠프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미니버스를 타고 갔는데

한 45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크라쿠프에서 기차를 타고도 갈 수 있는데,

2016년 현재

기차는 1시간에 한 대 꼴로 있고,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고 하니,

아무래도 버스를 타고가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오시비엥침(Oświęcim)은

'축성하다, 성스럽게 하다'라는 의미의

고대 폴란드어 동사 oświęcić에서 파생된 단어로,

어원을 따져봤을 때

"축성된 곳, 성스러운 곳"이라는 의미다.


독일어 명칭 "아우슈비츠(Auschwitz)"는

폴란드어 Oświęcim과

이런 성스런 어원을 공유하지 않는

별개의 독립적 명칭이다.


Auschwitz라는 단어 자체가

독일어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아니고,


오시비엥침(Oświęcim)이라는 폴란드 지명을

원래 독일 상인들이 아우슈빈첸(Auswintzen), 아우슈빈츠(Auswintz)라 부르다가

[이게 어떤 의미를 가진 단어인지는 알 수 없는데,

아마도 "오시비엥침"을 독일식으로 발음한 것 같다]


나중에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폴란드를 지배하게 될 때는

아우슈비츠(Auschwitz)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이 이름이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한 장소 중 하나로

기록되게 된다.


Auschwitz와

유사한 어근을 가진

독일어 동사 schwitzen, ausschwitzen는  

'땀을 흘리다'라는 의미다.


사실

Auschwitz가

이 독일어 동사에서 파생된 것은 아닌 듯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Auschwitz라는 명칭은

형태적으로 비슷한

동사 schwitzen, ausschwitzen의 의미와

이상하게도 연관된다.


어찌보면, 마치 "피를 흘리는" 곳이라는 의미를

조금 완곡하게 표현하기 위해

마치 일부러

"땀을 흘리다"라는 의미의 단어로부터

지명을 만들기라도 한 것 같고,


실제로 오시비엥침(Oświęcim) 강제 수용소 안에

시체를 소각하던 화장터가 여러 개 있었던 걸 보면,

비록 시체가 땀을 흘리는 건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비유적인 의미로 해석했을 때

Auschwitz가

"땀을 흘리다"라는 의미의 동사와

전혀 무관한 것 같지는 않다.


현재 폴란드어에서

오시비엥침(Oświęcim)

아우슈비츠(Auschwitz)라는 명칭은

둘 다 사용된다.


단,

그 사용 영역이 분리되어,

전자는 "지역명"으로,

후자는

지금은 박물관이 된 "수용소 이름"으로 이해된다.


오시비엥침(Oświęcim) 말고,

브제진카(Brzezinka)모노비체(Monowice)에도

당시

나치의 강제수용소가 있었는데,


그 세 도시가 독일어로

앞에 '강제수용소'라는 의미의

KL(Konzentrationslager)가 붙어

각각

아우슈비츠(Auschwitz), 비르케나우(Birkenau), 모노비츠(Monowitz)로 불렸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박물관은

가이드 없이 들어가면 입장료가 무료이고,


가이드와 함께 들어가면

2016년 현재

어른 40즈워티(약 12,000원 정도),

아이 30즈워티(약 9,000원 정도)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박물관의 정식 명칭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국립 박물관

(Państwowe Muzeum Auschwitz-Birkenau, National Museum of Auschwitz-Birkenau)"이며

공식 홈페이지는 다음과 같다.



다른 곳이 아니라 오시비엥침(Oświęcim)

나치 강제 수용소가 세워진 건,


1939년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하고 나서,

폴란드에서 수용소 자리를 물색했는데,

마침 오시비엥침에

이전에 (폴란드 남부를 지배하던) 오스트리아와

폴란드의 군인이 사용하던 막사가 있었고,

그곳을 개조하여

1940년부터 강제수용소로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처음부터 이곳이 유대인 강제수용소로 기획된 건 아니었고,

폴란드 레지스탕스나 지식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는데,

1942년부터 전유럽의 유대인들을

이곳으로 끌고 와서

감금하고, 처형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1945년 소련군에 의해 해방된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그대로 방치되다가

1947년 박물관으로 전환하기로 결정되었고,


홀로코스트의 공간적 상징인 이 곳은

1979년에

유네스트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유럽이나 한국에서 만나게 되는 독일인들을 보면

매우 이성적이고, 시간이나 규칙을 잘 지키고,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친절하고, 착해서

'저렇게 온순하고 착해서 나치에게 선동됐나보다.'

생각하곤 했는데,


역시나 그런 독일인 개인과

국가로서의 나치 독일은 완전히 다른 존재였던지,

아니면

외국인에게 관용적인 지금의 독일과

당시의 나치 독일이 다른건지,


당시 나치는

아우슈비츠에서 자신들이 벌인 만행을 지우기 위해

1944-1945년 많은 서류를 불태우고,

건물을 무너뜨렸고,

퇴각할 때까지 끔찍한 만행을 멈추지 않고

수감자들을 독일이나 다른 수용소까지 걸어가게 해

길에서 죽게 만들었다는데,

이것은 소위

"죽음의 행진(marsz śmierci, death march)"이라 불렸다고 한다.


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후

이러한 독일인의 만행을

폴란드인은 철저히 응징했는데,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했던 독일군들

거의 대부분을 찾아내

재판에 회부하고 처벌했고,


그 중 가장 중요한 책임자 한 명은

(그의 이름은 루돌프 회스(Rudolf Höss)다)

본보기 삼아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에서

교수형에 처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래 사진이 그의 교수형 장소다.


물론

원칙적으로 보면

악에 대한 정의로운 응징이며

인과응보라는 인간사의 법칙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가 나쁜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건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섬뜩하고 등꼴이 오싹하다.


(2008년 7월, Auschwitz-Birkenau, Poland)


폴란드인들은

나치의 만행에 대한 개인적인 처벌 이외에

아우슈비츠 수용소 자체를

박물관으로 만들어

두고두고 후세 사람들이

당시 나치 독일군의 만행을 기억하게 했다.


내 생각엔 이게

가장 효과적인 응징이며 보복인 것 같다.


기억하기!


그리고 계속해서 기억하게 만들기!




아우슈비츠 수용소 바깥 입구에는

철조망이 이렇게 쳐져 있는데,

아직 아무것도 안 보여도

벌써 여기서부터 마음이 좀 섬뜩하다.

하긴 보기 전에 이름만으로도 공포스럽긴 하다.


자주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니,

그리고 역사적으로 주요한 의미를 가진 곳이니,

한번은 보고 가야할 것 같은데,

자꾸 한숨이 나오고

발걸음이 선뜻 떨어지지 않는다.


(2008년 7월, Auschwitz-Birkenau, Poland)


바깥 입구에서  조금 걸어 들어가면

진짜 수용소가 시작되는

안쪽 입구가 나오는데,

입구 위 아치에는

독일어로

Arbeit Macht Frei (노동이 자유케 하리라.)

라고 쓰여 있다.


예전에 아주 잠깐 독일어를 배운 적이 있어

이게 무슨 뜻인지는 어느 정도 이해해서,

뭔가 이 문구부터 마음이 답답했다.


이 곳에서

노동이라는 것은

아직 가스실에 들어가지 않은 자들이 누리는

유일한

최소한의

자유였는지도 모른다.


이 문구가 적힌 아치는

2009년 도난당한 적이 있는데,

신나치주의자들의 소행이었다고 한다.


다시 찾은 원본은

아우슈비츠 박물관의 다른 곳에 보관되어 있고,

현재 걸려 있는 건 카피본이라고 한다.


그러니

내가 방문한 2008년에 걸려있던 건

원본이다.


물론 예술 작품도 아니고

원본이건 카피본이건 그게 큰 의미는 없다.


(2008년 7월, Auschwitz-Birkenau, Poland)
(2008년 7월, Auschwitz-Birkenau, Poland)


이 문을 통해 들어가면

꽤나 넓은 공간이 나오는데,

이런 매우 독일스러운 네모 반듯한

똑같이 생긴 건물들이 줄지어 있고,

이 건물들 중 몇 개가

일반인의 관람이 가능한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림 출처: http://www.viajesbelicos.com/2012/12/cracovia-ii-visitar-auschwitz-birkenau.html


아우슈비츠에 가기 전에는

홀로코스트나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유대인만 수용한 장소거나

그들만의 비극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수감자 중 대다수가 유대인이긴 하지만,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도

이곳에 수용되고 목숨을 잃었다.


폴란드어 위키피디어에 보니 당시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사람들의 민족 구성

보여주는 도형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440,000명이 헝가리 유대인,
300,000명이 폴란드 유대인,
70,000명이 프랑스 유대인,
60,000명이 네덜란드 유대인,
55,000명이 그리스 유대인,
35,000명이 기타 유대인,
75,000명이 폴란드인,
21,000명이 집시,
15,000명이 소비예트 포로,
15,000명이 기타.

 

By 4C - Based on JPG version created by Janusz 'Ency' Dorożyński on March of 2005 r.,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015832


또한

2005년 폴란드인을 대상으로 한

""오시비엥침"이라는 단어에 연상되는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도 나오는데,

폴란드 민족의 수난 장소: 37퍼센트,
유대인 몰살 장소 : 17퍼센트,
여러 민족의 사람들의 수난 장소:16퍼센트

한국인이 흔히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의 비극을 떠올린다면,

폴란드인은

무엇보다도 폴란인의 비극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By 4C - Based on JPG version created by Janusz 'Ency' Dorożyński on March of 2005 r.,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016271



일반인들에게 공개된 박물관에 들어가면,

가스실에 들어간 사람들의 유품으로 추정되는 것들을

커다란 통유리창 전시실 안에

말 그대로 그냥 쌓아두고 전시한다.


어떤 방은 가방만 모아두고,
어떤 방은 신발만 모아두고,
어떤 방은 머리카락만 모아두고,

어떤 방은 아이들의 물건만 모아두었는데,


그런 전시물 하나하나가 다 섬뜩섬뜩하고

정말 등골이 오싹했다.


너무 공포스러워서

난 차마 사진도 찍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무언가 그 때 그 때마다 다른

기획전 같은 것도 하는 것 같은데,

내가 2008년에 갔을 때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그림전시회 같은 걸 했었다.


(2008년 7월, Auschwitz-Birkenau, Poland)


물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장 섬뜩한 곳은

가장 죽음과 가까운
가스실과 화장터였다.


그밖에도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전체 분위기가

뭔가 정말로 내가 그곳에 갇혀 있는 것 같은,

마치 그 순간

시간의 틈새에 잘못 빠져들어가

1940-1945년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시간 이동을 할 것만 같은,

그런 말도 안되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만드는

그런 묘하게

정신을 압박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건물 바깥으로 나오면,

아마도 도망치려는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뜻으로 써 놓은 것 같은

Halt! Stoj! (멈춰서라!)

라고 적혀 있는 표지판이 붙어 있는 철조망과
그리고

사람들을 공개 처형했다는 장소가 보이는데,

그 또한 무시무시했다.

두려움과 압박감 이외에

그곳에 수감되어

고통받거나 죽어갔을 사람들에 대한

끝없는 연민이 느껴지고,

그들의 슬픔, 아픔, 고통, 절망감도 느껴졌다.


내가 아우슈비츠를 간 날은

날씨도 무척 화창한

전형적인 폴란드의 여름날이었는데,

그래서 더 슬펐다.


이렇게 멋진 하늘을 보며

그 온갖 무거운 감정들을

가슴 속에 품었을 수감자들을 생각하니

더 슬펐다.


이 하늘이 얼마나 더 아름답게 보였을까?

이 햇볕이 얼마나 더 소중하게 느껴졌을까?


(2008년 7월, Auschwitz-Birkenau, Poland)
(2008년 7월, Auschwitz-Birkenau, Poland)
(2008년 7월, Auschwitz-Birkenau, Poland)
(2008년 7월, Auschwitz-Birkenau, Poland)
(2008년 7월, Auschwitz-Birkenau, Poland)
(2008년 7월, Auschwitz-Birkenau, Poland)
(2008년 7월, Auschwitz-Birkenau, Poland)
(2008년 7월, Auschwitz-Birkenau, Poland)


사람이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
그리고

그 이유가

'뭔가 내가 잘못 한 것'

'뭔가 내가 고칠 수 있는 것'

'뭔가 어떻게 노력해서 바꿀 수 있는 것'

이 아니라
'죽어서도 내가 버릴 수 없는 어떤 것',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갖게 된 것',

'내가 감출 수 없는 어떤 것'

때문이라는 게,


'내가 한 것(what I have done)' 또는

'내가 하고 있는 것(what I am doing)'이 아니라

'나인 것(what I am 또는 who I am)'이라는 게

참 무서운 것 같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극한의 증오가 아니더라도
세상의 많은 증오가
그런
'내가(혹은 그/그녀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

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참 무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고

그 아픈 "기억"을 버리거나 숨기지 않음과 동시에

이런 특별한 장소를 관광지로 만들어,

그 기억을 전인류가 "공유"하게 한 게

참 놀라우면서도 부러웠다.


물론 아우슈비츠 박물관은

무료 입장이 가능하기 때문에

입장 수익자체는 크지 않을 수는 있지만,


단지 여기만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 오기 위해

다른 폴란드 도시를 방문할 수 밖에 없으니

나름대로

관광지로 경제적인 역할도 하고 있는 것 같다.


비슷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데

왜 우리는 이런 걸 못할까?


아무리봐도

해방 때

일본인과 친일파를

제대로 응징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당시 "제때" "제대로"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는 바람에,

기억과 역사가 각자 나름대로 재편되어서

일제 강점기에 대한

일치된 관점과 평가가 부재하고,


그에 대한 소수 의견을 견지하는 주체가

당시 정당한 처벌을 받았어야 하는 사람들과

현재에도 여전히 기득권인 그 후손들,

즉 숫자로는 소수지만,

권력으로는 다수인 사람들이어서

그걸 기억하는 일을

진실을 말하는 일을 가로막고 있으며,


따라서

일제 강점기와 친일파에 대한 언급 자체에서부터

불필요하고 무가치한 논쟁으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결국 과거의 진실은

현재의 논리에 계속 발목을 잡히고,

"소수인 다수"에 의해 왜곡된다.


또한

당시 처벌대상이

거의 모두 외부에 존재했던 폴란드와 달리

한국에는

해방 후 처벌 대상이

외부 뿐 아니라 내부에 많이 존재했고,


그 내부의 적이 기득권을 놓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이데올로기적 대결구도 내에서

주도권을 잡으면서

당시 만행을 유야무야 덮어버리고 말아서,


현재까지도 그런 과거를 기억하는 게 달갑지 않은 내부의 강력한 적이 잔존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럼 당시의 우리의 기득권 인사들은

폴란드 귀족들과 지식인들처럼,

다른 유럽의 대부분의 지성들처럼

저항하지 않았을까?


누군가가 주장하는 것처럼

일본 "덕분에" 조선이 낙후함에서 벗어나

산업화를 이루게 될거라 생각한걸까?


아님 일제에게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자포자기한 것일까?


아님 군주에 대한 충성은 중요시하지만

민족주의(nationalism) 혹은 국가주의적 정서는

가지고 있지 않았던 걸까?


아님 그냥 암 생각 없이 대세를 따른걸까?


이유가 어찌 됐던,

제 때 정의가 실현되지 못한 탓에,

우리는 여러 개의 기억을 가지고 되었고,

따라서 제대로 기억할 수 없고,

제대로된 기억을 말하지 않는 일본에게

제대로 과거를 상기시킬 수도 없는 것 같다.


여러모로

우리나라가 참 걱정이다.


(2008년 7월, Auschwitz-Birkenau, Poland)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반드시 그걸 다시 겪게 된다.

-조지 산타야나(스페인 출신 미국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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