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안의 또다른 작은 나라
폴란드(Polska)는
"들판(pole)의 나라"라는 어원에 걸맞게
대부분 들판, 평지지만,
그래도
산도 있고, 바다도 있고, 호수도 있고, 숲도 있는데,
이런 지형들이 대체로 한쪽으로 몰려 있다.
예를 들어 산은 남쪽에 있어,
예전 포스트에 올렸던
자코파네(Zakopane), 카스프로비 봉을 품은
타트라 산맥에는
해발고도 2000킬로미터 내외의 높은 봉우리가
우뚝우뚝 솟아 있고,
바다는 북쪽에,
역시나 이전 포스트에서 언급했던
그단스크(Gdańask), 소폿(Sopot), 그디니아(Gdynia), 헬(Hel) 같은 도시를 품은,
짠내 별로 없는 짙은 남색 발트해가
쿨하고 널찍하게 펼쳐져 있고,
호수는, 아직 안 가봤는데,
폴란드 북동쪽 마주리(Mazury)라는 지역에
엄청 많이 분포되어 있다.
숲은 찾아보니까 특정 지역에 몰려 있지 않고
폴란드 전역에 골고루 있는 것 같다.
들판도 그렇다.
그런데 이것과 관련해 예전에 폴란드 친구한테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신이 폴란드를 만들 때,
남쪽은 산, 북쪽은 바다, 서북쪽은 호수,
나머지 부분은 들판,
또 어딘가는 숲
뭐 그런 식으로 다 나누어주고 났는데,
그러구 보니까
카슈비아(Kaszuby, Kasubia)를 깜박했더란다.
이제 특별히 카슈비아에만 줄 건 없고,
자루 속을 탈탈 털어서
다른 지역에 주고 남은 것을 다 주었단다.
그래서 카슈비아에는
작지만 산도 있고, 바다도 있고, 호수도 있단다.
이 이야기를 끝맺으며 친구가 웃어서,
나도 자동적으로 되웃긴 했지만,
아마 그 친구가 안 웃었어도
이야기가 너무 귀여워서
그냥 절로 웃음이 나왔을거 같다.
그 때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언젠가 나중에 한번
카슈비아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다가
카슈비아는 폴란드에서 매우 특별한 지역이다.
다른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폴란드에도 여러 방언이 있는데,
폴란드 방언 중 가장 특별한 방언이
카슈비아 방언이다.
보통 한국의 뭍사람들이 제주방언을 못 알아듣듯,
보통의 폴란드 사람들도
카슈비아 방언을 못 알아듣는다.
언어학적으로 보면,
제주말도 방언이 아니라
독립 언어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듯,
카슈비아 말도 폴란드어 방언이 아니라
별개의 독립적 언어라는 주장이 있다.
카슈비아어가 방언인가
하나의 독립언어인가에 대해서뿐 아니라
그냥 카슈비아어 자체에 대해서도
연구가 꽤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이제 겨우 폴란드어가 익숙해진 마당에
섣불리 카슈비아어를 구사하고자 하는
욕심이나 야망은 없지만,
언어학 전공자로서
카슈비아인들이 어떻게 말하는지
혹은
그냥 외국인 관광객으로서
그 "모든 것을 조금씩 갖추었다는" 곳이
어떻게 생겼나 알고 싶은 단순한 호기심에
카슈비아를 한번 가보고 싶었다.
2008년 폴란드에 갔을 때는
카슈비아까지는 엄두도 못냈고,
2013년 여름에 갔을 때는
카슈비아에 가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거기 말고 다른 폴란드 대도시 중에도
안 가본 데가 너무 많아서,
그리고 평일엔 계속 폴란드어 수업을 들어야 해
여행할 시간이 많지 않아서,
역시나 카슈비아까지 갈 구체적 계획을 세우거나 실천할 수 없었다.
그리고 2016년 여름 특별한 계획, 특별한 목적 없이
좀 여유있게 폴란드에 갔을 때
이번에는
카슈비아를 한번 가야겠다 생각했다.
지도를 찾아보니
2013년에 가본 적 있는 그단스크(Gdańsk)에서
멀지 않아서
뭐 갈려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머물던 바르샤바에서 카슈비아 가는 방법을
인터넷에 검색했는데 딱히 정보가 없다.
카슈비아는 우리의 "도" 같은 지역이어서
거기 갈려면 "시"나 "군", "면", "읍" 단위의
구체적 지명을 선택해야 하는데,
카슈비아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니
도시도 선택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내 친구랑 폴란드어 선생님 두 명,
이렇게
바르샤바 출신 폴란드인 세 명에게 물어봤는데,
신기한 건
폴란드인들도 카슈비아 지역을 잘 모른다는거다.
그냥 거기 갈만한 도시가 어디냐고 물어봤는데,
세 명 다 잘 모르겠단다.
보통 폴란드 사람들은
카슈비아 쪽으로는 잘 안 놀러가서,
카슈비아 방언을 못 알아 듣을 뿐 아니라
어떤 도시가 여행지로 좋은지도 모른다는 거다.
그냥 워낙 관심이 없는 것 같다.
2016년 여름엔 서유럽이랑 터키에 테러가 나서
폴란드인들이 외국에 잘 안 나갔지만,
사실 EU 회원국인 폴란드 사람들은
휴가로 가까운 외국이자,
또 특별한 출입국심사나 비자가 필요 없으니
어떻게 보면 또 외국이 아니기도 한
다른 유럽국가들로 쉽게 휴가를 떠날 수 있고,
산이 좋으면 산으로,
바다가 좋으면 바다로,
호수가 좋으면 호수로,
폴란드 내에 다른 휴양지로도 휴가를 떠날 수 있다.
그러니
아는 친구나 친척이 없다면
굳이 특별한 지형적 특징이 없는,
딱히 크게 볼 게 없는,
머나먼 카슈비아까지 갈 필요가 없는거다.
그래도
한국이라면 안 가봤어도
특정 지역의 도시 이름 몇 개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을텐데,
더더군다나
만약
나한테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나한테 그런 걸 물어봤으면
어떻게 해서든 알아봐 줄텐데,
폴란드 사람 특유의 쿨함, 무심함 때문인지,
아니면
혼자 잘 찾아내리라,
나를 너무 신뢰했던지,
아님
거기 뭐 볼 게 있다고 가나,
저러다 말겠지 싶었는지,
다들 그냥 그렇게 모른다고 하고들 말았다.
그래서 혼자 열심히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여러 지명이 나오고,
그 중에
카슈비아 지역 중심에 위치한
"카슈비아의 수도(Stolica Kaszub)"라는
별칭 붙은 데가 나오길래,
거기에,
즉, 카르투지(Kartuzy)에 숙소를 예약했다.
폴란드 숙박사이트가 아니라
hotels.com을 검색했는데,
그 사이트엔 카슈비아 지역의 호텔이 몇 개 없어서 선택의 여지도 얼마 없었다.
그냥 하나 나오는 데를 예약을 했다.
카슈비아(Kaszuby, Kasubia, Kaszëbë)는
아래 지도에서 오른쪽 상단의 보라색 지도 위
노란색으로 표시된 부분에서도 드러나듯
폴란드 북쪽에 자리 잡고 있고,
그 중 카르투지(Kartuzy)는
큰 지도에 주황색으로 표시한 곳이다.
위 지도에서도 드러나듯
삼원도시(Trójmiasto, Tricity),
즉 그단스크(Gdańsk), 그디니아(Gdynia), 소폿(Sopot)과
헬(Hel)도 행정상으로는 카슈비아에 속한다.
하지만 거기 사람들은 카슈비아 방언보다
일반 폴란드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특별히 카슈비아로 인식되지 않는다.
폴란드인에게 카슈비아는
단순한 행정구역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카슈비아(Kaszuby, Kasubia, Kaszëbë)는
독일과 폴란드 북부에 넓게 펼쳐진
포메라니아(Pomerania, Pomorze) 지역에 속한다.
포메라니아(Pomerania)는
폴란드어 포모제(Pomorze),
즉, po (포: -옆에, -를 따라) + morze(모제: 바다)가 합쳐진
'바다 인근, 해안 지역'이라는 뜻의 단어에서 나왔다.
이름의 내적 형식으로 봤을 때
이 곳은 원래 슬라브인들이 살던 지역이었는데
중세시대 독일 튜턴 기사단이 이곳을 점령한 후
독일의 영향권 하에 놓이거나
독일의 일부가 된 것 같다.
현재 독일 내에서도
폴란드에 가까운 북부 해안지역을
포메라니아(Pomerania)라고 부른다.
카슈비아(Kaszuby, Kasubia, Kaszëbë)가
처음 사료에 언급된 건 13세기라고 하는데
14세기초부터
독일 튜턴 기사단이 폴란드에 세력을 뻗쳤으니,
역사에 기록된 이래로 20세기까지
수세기동안 줄곧 독일의 영향을 받아온 셈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슬라브어의 일종인 카슈비아어를 계속 썼고,
16세기 독일 종교개혁 이후 상층부 지배층은
루터의 신교로 개종하고
예배에 독일어를 사용했지만,
주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가톨릭 신자들은
미사에서 종교 언어로
폴란드어를 계속 사용했다고 한다.
1960년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폴란드에서도 라틴어로 가톨릭미사를 했다 하던데
카슈비아에서는 폴란드어로 미사를 봤나보다.
19세기에 카슈비아의 언어, 전통, 문화를
독립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이제 카슈비아인들은
독일인도 아니고 폴란드인도 아닌
독립 민족으로 자신을 천명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러한 민족의식에 바탕한
독일로부터 독립을 위한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고,
19세기 후반이 되자 카슈비아 내에서
자신을 폴란드의 일부로 보는 시각이 생겼고,
그 이후 줄곧 이 관점이 주류가 된다.
2차 세계대전 후
카슈비아는 폴란드에 편입되었지만,
폴란드 공산정부에서도 역시나
민족적, 문화적, 언어적 독립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전체주의 정권에서
그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공산정권 붕괴 후 현재 폴란드에서
카슈비아어와 카슈비아 문화는
특별한 것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2005년에는 카슈비아어가
대입시험의 공식 과목으로 선정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카슈비아어의 독립성을 인정한 것일뿐 아니라,
카슈비아어를
일종의 외국어 취급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내가 카슈비아에 대해 물어봤을 때
폴란드인의 반응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카슈비아의 특별함 때문에
폴란드인들은
카슈비아를
폴란드 국경 안에 있긴 하지만,
외국보다 접근이 어려운,
가깝지만 먼 곳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2016년 8월에는
꽉찬 5박 6일 예정으로,
그단스크, 소폿, 카르투지에 거의 이틀씩 머물면서
점점 서쪽으로 움직였는데,
소폿(Sopot) 두번째 날 저녁에,
전체 일정 중에는 4번째 날 저녁에,
카르투지(Kartuzy)로 떠났다.
삼원도시에서 카르투지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버스를 타거나 기차를 타면 되는데,
기차를 타면,
아래 지도에도 보이듯,
Gdynia Główna[그디니아 그우브나]나
Gdańsk Wrzeszcz[그단스크 브제시치]에서
도시고속철도 SKM에서
포메라니아 도시철도 PKM(Pomorska Kolej Metropolitalna)로 한번 갈아타면 된다.
난 소폿(Sopot)에서 움직이는 거라
어디에서 갈아타도 별 차이가 없어 보였는데,
버스보다는 왠지 기차가 좀 더 마음에 들고,
왠지 더 큰 도시에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리고 난 그디니아보다 그단스크가 더 좋아서
Gdańsk Wrzeszcz[그단스크 브제시치]에서
기차를 갈아타기로 했다.
그 전날 헬(Hel) 가면서 기차 땜에 좀 삽질을 해서
이번엔 기차 운행 시간도 잘 체크하고
노선도 몇 번씩 체크를 했다.
그렇게 여러 번 확인하고
Gdańsk Wrzeszcz[그단스크 브제시치]역에서
카르투지(Kartuzy)가는 PKM을 타려 기다리는데,
기차 시간이 다 와가도
그 기차를 어디서 타야하는지에 대한
전광판의 안내가 없다.
그래서 우선 그 역의 경비 아저씨한테
카르투지 가는 기차 어디서 타는지 물었는데
아주 귀찮은 표정으로 투덜투덜
버스를 타야 한다고 퉁명스럽게 툭 내뱉는다.
난 기차표를 가지고 있는데
왜 버스를 타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여러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는데,
역내 카페 점원, 승객 등
다른 사람들은 아예 알지 못한다.
그래서 거의 울상이 되어서
마침 눈이 마주친 어떤 폴란드 남자에게 물었더니,
역시나 자기도 모른다면서
표 사려고 줄 서 있는 일행에게 물어봐줬다.
그랬더니
그 중 대학생처럼 보이는 어떤 키 큰 남자가
"버스를 타야한다"며
자기도 그 쪽으로 가니 자기랑 같이 가자고
영어로 말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두 남자는 서로 일행이 아니었고,
나에게 영어로 말한 남자는
나랑 같은 방향으로 가는데,
먼저 다른 역에서 내린단다.
그가 나에게 영어로 설명해준 바에 따르면,
원래는 그 역에서 기차를 갈아타는 게 맞는데,
얼마 전 큰 홍수가 나서 기찻길이 크게 손상되었고
아직 복구되지 않아서
중간 어느 역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거기서 원래 다니던 그 기차로 환승해야 한단다.
문득 10여년 전에 당산철교 보수해서인가,
그 비슷하게 했던 게 생각이 났다.
[그 때 난 그 쪽으로 다닌 적이 없어,
버스를 탔던 직접 경험은 없다.]
아니, 그런데 왜 그런 얘기를 아무도 안해주고,
왜 그런 얘기가 어디에도 안 써 있냐고 물었더니,
대답하지 못한다.
그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도
그의 잘못도 아닌데다가
버스를 타야 하는 사정을 설명해준 게 고마워서
나도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어쨌던 그렇게 다행히 "귀인"을 만나
무사히 카르투지(Kartuzy)행 버스에 올랐다.
자기 티켓과 내가 들고 있는 티켓이 다른 걸 보더니,
그가
차장에게 가서 물어봐야 할 것 같다고 해서
그건 내가 할 수 있겠길래,
"I think I can handle this."
라고 말하고,
차장 아저씨에게 가서 폴란드어로
카르투지까지 가는데 이 티켓이면 되겠냐고 했더니,
예상대로 역시 문제 없다고 한다.
그 때까지 내가 폴란드어 하는지 몰랐던 청년은
폴란드어 할 줄 아냐며 좀 신기해한다.
그러면서
뭐라고 뭐라고 빠른 속도로 폴란드어를 하는데
나는 그걸 다 알아듣지 못해서
그냥 조금 한다고 대꾸했더니,
다시 영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옆에 같이 앉아 가도 되냐고 물었다.
버스에는 승객이 별로 없어 빈자리는 많았지만,
(거의 5명 내외)
낯선 곳을 여행하는 여행자에게
현지인 말동무만큼 귀한 존재가 또 어디 있겠는가?
당연히 좋다고 했다.
그 친구는
자기 이름이 아담(Adam)이라며 악수를 청했는데,
영어를 전공하는 대학생이고
집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나중에 지도를 보니
그가 내린 곳도 카슈비아였다.
그 때 알았으면
카슈비아에 대해 좀 더 많이 물어보는 건데
그 때는 그게 말한 동네가 카슈비아인지 몰랐다.
폴란드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그런 식으로 사근사근 말을 먼저 거는
폴란드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서
(가끔씩 술취한 사람들이 말을 걸긴 한다)
좀 신기했다.
시골 출신인 이 친구가
영어로 말하기 연습할 기회가 많이 없어서
이렇게 간만에 찾아온 기회를 활용하나 보다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마침 그 날이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이었고,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에서는
매우 중요한 공휴일이었는데,
아담의 말에 따르면 그 날은
성모승천대축일임과 동시에
폴란드 군인의 날이라고 했다.
지금 찾아보니 폴란드어로는 Święto Wojska Polskiego(Armed Forces Day)다.
정확한 연도를 이야기하며(지금 보니 1920년이다),
그 때 러시아랑 싸워서 이겼는데
그걸 기념하는 날이라고 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별로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요즘 폴란드 젊은이들은
역사에, 옛날 일에 별로 관심이 없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역사에 관심없는 것 치고는
참 많은 걸 알고, 참 정확하게 말한다는 느낌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적국이었지만,
그래서
나이든 세대들은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있지만,
사실 외국에서 러시아인들을 만나면
자기는 좀 더 가까운 느낌이라고 했다.
아마 언어도, 외모도, 문화적으로도
통하는 점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나도 덧붙였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어서,
독일과 러시아 사이의 폴란드와 비슷한 점이 많다.
하지만 독일 정부는 사과를 했지만
일본 정부는 사과하려 하지 않고
자꾸 잘못을 부인한다.
그래서 정부 차원의 일본은 정말 맘에 안 드는데,
그냥 일본인 개인을 만나면
그 사람들 자체는 나쁘지 않고
사실 또 가까운 느낌이 있다.
뭐 그런 얘기를 하며 가는 동안
버스 밖으로는 해가 졌다.
아마 아담과 그런 얘기를 하며 가지 않고
혼자 갔으면
분명 그 해지는 하늘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찍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간만에 말벗이 있어
바깥 풍경에 집중하지 않게 되니,
그게 또 그렇게 좋다.
중간에 아담이 안내해 주는 곳에서 내려
같이 기차로 갈아탔다.
그는 좀 더 가서
주코보(Żukowo) 정도에서 내린 것 같고,
나는 두세 정거장 더 가서
카르투지(Kartuzy)에서 내렸다.
그렇게 내린 카르투지(Kartuzy)역은 한밤중이다.
저녁 8-9시 전후였을테니,
대도시였으면
아직 카페나 레스토랑이 한참이었을텐데,
클럽 같은 데서는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을 시간인데,
이 동네는 그 시간에 사방이 너무 고요하고 어둡다.
약도에는
호텔이 분명히 기차역에서 가깝다고 나오는데,
어두워서
길과 건물들이 선명하게 잘 안 보인다.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거의 없다.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길을 찾아 갔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동네의 가장 중심이 되는 광장에까지 이르렀다.
거기는 중심이라고
그래도 좀 더 밝았는데,
마침 지나가는 남자가 있길래
그 호텔 이름을 대며,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알고 보니 아주 가까운 데에 있었는데,
그 남자는
자기를 따라오라며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안내하면서
자기이름이 파트릭(Patryk)이라고 통성명까지 한다.
어차피 기억도 못할텐데
내 이름까지 물어보면서.
그리고 이제 이 동네에서는
아담(Adam)이 예외가 아님을,
대도시 사람들과 시골 사람들이
완전히 다름을,
원래부터 시골 사람들은 좀 더 친절한데다가
폴란드어 하는 동양인을 본 일이 거의 없어서
나한테 그렇게 더 친절했음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혹시나 여기 있는 동안
사람들이 계속 그렇게 친절하게 굴려나
궁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약간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그들에겐 지극히 "이국적일" 내 외모를
대도시에서보다 더 신기하게 빤히 쳐다보긴 하지만
내가 말을 먼저 걸지 않는 한
괜히 말을 붙이거나
귀찮게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시골 사람이어도
폴란드 사람은 폴란드 사람인거다.
그렇게 또 한번 운 좋게
친절한 폴란드인을 만나
무사히 예약한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가장 윗층에
그 주변이 다 보이는 방에 묵게 되었는데,
창문에서 밖을 내려다 봐도
역시나 길에는 다니는 사람들이 없고
동네가 쥐죽은 듯 조용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봐도
사람들이 붐비지는 않는다.
뭔가 소도시 같은, 읍내 같은 느낌이다.
그 다음날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는데,
다른 호텔도 거의 안 보인다.
카르투지 중심에 있는 내가 머무는 호텔 말고
좀 외곽쪽 호텔을 알리는 화살표를 본 게 다다.
Hotels.com 뿐 아니라
폴란드 숙박 사이트에서도
다른 숙소를 찾기는 쉽지 않았겠다.
민박 같은 건 좀 있을지 모르겠다.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다른나라에서도 소도시를 가볼 기회는 거의 없어서
좀 신기하고 낯설다.
근데 이 작고 깔끔한 동네가 마음에 든다.
이건 내가 묵은 호텔 창문에서 보이던
길고 좁은 건물이었고,
그 좁은 건물 모양이 신기하고,
거기 그려진 그림은 너무 소녀스러워서
뭔가 궁금해서 가까이 가봤는데,
뭐 하는 데인지는 알 수 없다.
예전에 카슈비아 사진에서 볼 때
표지판에 폴란드어 표준어와 카슈비아어 방언이
병기되어 있길래
그런 약간 "이국적인" 풍경을 기대하고 왔는데,
도로건 간판이건 표기가
거의 다 폴란드어로 되어 있다.
그래서 힘들게 힘들게 겨우겨우
그런 카슈비아어 간판이나 표지가
눈에 띌 때마다
열심히 사진을 찍었는데 몇 개 없다.
그리고 사람들이 말할 때
카슈비아 방언 많이 쓸 줄 알았는데,
여기 사람들 그냥 표준 폴란드어 비슷한 거 쓴다.
억양이랑 발음은 약간 다른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내가 대충 알아듣는 거 보니
"폴란드인도 잘 못 알아듣는다"는,
그 카슈비아어 아니다.
이래봐도 여기가 소위 "카슈비아 수도(Stolica Kaszub)"라 방언을 잘 안 쓰는걸까?
아님 나의 미천한 폴란드어 실력으로는
미묘한 차이를 감지하기 불가능했던 걸까?
아님 카슈비아 바깥 사람들에게 알려진
카슈비아의 언어 상황이 너무 과장됐던걸까?
혹시
카슈비아어로 발행되는 신문이 있으려나 싶어서
신문사라고 쓰여진 곳을 기웃거려보기도 하고,
신문 파는 데도 가 봤는데,
신문, 잡지도 다 폴란드어로 쓰여 있는 것만 보인다.
그러고 다니다보니
기념품 가게가 눈에 뜨이길래 들어갔다.
카슈비아 혹은 카르투지 로고가 박힌
작은 기념품이나 장식품 말고,
카슈비아의 상황이 특별하다보니
카슈비아와 카슈비아어, 카슈비아 문화에 대한 책도
꽤 크게 한 코너를 차지하고 있다.
그 중 한 책 표지에서
지도와 wiedzo 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내 직관이 '저건 언어학책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슬라브어에서 ved- 어간은 '앎'의 의미다.
대부분의 슬라브어엔 ved-가 포함된
'알다'라는 의미의 동사가 있고,
러시아어에선 지금은 안 쓰지만,
'알다'라는 의미의
ведать[vedat']라는 동사가 있긴 하다.
즉, 그 책은 카슈비아를 "알리는" 책일거고,
안에 보니 언어학적 기술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다.
가능성은 매우 낮겠지만,
혹시나 나중에 카슈비아어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면 참고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쓰지 않더라도
나에게 매우 흥미로운 기념품이 될 것 같아
기념품 가게 점원 혹은 주인인 듯 보이는
여자분에게
이거 카슈비아어에 대한 책 맞냐고 물었더니
맞단다.
그것과
폴란드어로 쓰인 카슈비아에 대한 얇은 책자 하나,
그리고 카슈비아 전통음악 CD와
다른 카슈비아 로고가 담긴 기념품을 가지고
계산대로 갔다.
그런데 그 여자분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그건 너무 전문적인 책이라며,
카슈비아어로 된 카슈비아어 책을 들고
재빨리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더니,
대신
"Szwajcaria Kaszubska(카슈비아의 스위스)"라는 제목의
폴란드어로 된
관광안내책자를 가져 와서 계산대에 놓는다.
아, 이건 뭐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여,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용기를 내어
"난 언어학전공자인데,
카슈비아어는 모르지만 그래도 그 책을 사고싶다"
는 내용으로 떠듬떠듬 폴란드어로 말했다.
근데 왜 그런 순간엔 말이 더 이상하게 나올까?
말하면서 내 말이 이상하다는 걸 느끼며,
이 사람이 이런 내 폴란드어를 들으며
나를 한심하게 보겠구나 생각하며,
언어학 얘기 괜히 했나 후회하며
상대의 얼굴을 살폈는데,
그 여자분의 갈색 눈에 살짝 빛이 들어오더니,
그럼 여기 사전도 있다며,
아주 얇은 카슈비아어-폴란드어사전도 소개해줬다.
그래서 그 사전도 샀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면 되는 건데
내가 너무 머뭇거렸나보다.
근데 생각해보면
그렇게 손님이 사겠다고 직접 골라온 책을
점원이 혹은 주인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책이랑 바꿔주는 것도
사실 매우 시골스러운 것 같다.
아마 바르샤바나 그 밖에 다른 폴란드 대도시에서
내가 같은 행동을 했으면
그 여자분처럼 생각했더라도
그냥 생각만 그렇게 하고
그냥 잠자코 계산해줬을텐데,
거기선 그렇게 저돌적으로
책을 바꿔다주기까지 하는 그 상황이
사실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녀의 그런 행동이 사실
나를 위한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왔다.
관광객이 잘 모르고 읽지도 못할 비싼 책을
사가게 내버려두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더 나은 해결책을 제시해 준 것 아닌가?
방법이 좀 투박하긴 했지만,
그래도 생각해보면
시골사람의 잔정이 묻어나오는 행동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힘들게 카슈비아어로 쓰인
카슈비아 관련 서적을 바르샤바로 사들고 와서,
점원 혹은 주인이 추천해준 얇은 사전을 찾아,
제대로 제목을 해석해보자 했는데,
어찌나 전문적인 책인지,
제목의 단어가 그 얇은 사전에는 없다.
그 다음에 그 책을 들여다 본 적 없이
지금 방 한 구석에 그대로 놓여있는데,
결국 난 아직까지 그 책의 정확한 제목도 모른다.
어쩜 그 책의 내용은
나에게 영원한 수수께끼가 되고,
그 책은 그냥 이해할 수 없는
이국적인 글자가 쓰여 있는
소장용 책 혹은
카슈비아 기념품이 되고 말지도 모르겠다.
카슈비아에 다녀와서
한국에 들어오기 전
바르샤바에서 폴란드어 선생님을 만났는데,
워낙 농담하기 좋아하는 이 선생님이
"카슈비아까진 도대체 왜 갔냐?"
"거기 그냥 독일식 건물들만 있지 않냐?"며
빈정거렸다.
사실 그게 독일식 건물인지 폴란드식 건물인지도
잘 모르면서
난 우선 방어적으로
"아니다. 폴란드적이더라"고 대꾸하고,
그리고 거기 사람들
카슈비아어 아니고 폴란드어 하더라 말했다.
그 선생님도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아마 외국인한테는 카슈비아어 안 했겠지." 그런다.
그래서
간판에도 카슈비아어 별로 없고
다 폴란드어더라 했더니,
그도 새로운 얘기를 듣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그게 아마도
폴란드 사람들이 생각하는 카슈비아인가보다.
폴란드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독일 같은
이국적인 지역.
그리고 그 때 그 얘기까지 할 시간은 없었는데,
그래서 그에겐 미처 알려주지 못했는데,
아니, 이미 들어는 봤을지도 모르니
그때 그에게 상기시켜주진 못했는데,
"카슈비아의 스위스(Szwajcaria Kaszubska)"라고 불리는
카르투지(Kartuzy)의 자연도 정말 아름답다.
특히 호숫가 풍경이 예술이다.
그리고
그 멋진 카르투지(Kartuzy)의 풍경을
담은 사진과 동영상은
이제 다음 포스트에서 대방출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