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거 없는" 소피아에 숨겨진 소소한 볼거리 찾기
소피아 시내를 돌아다니던
2014년 어느 날,
사진의 날짜를 보니
2014년 1월 12일,
소피아 도착한 지 한 1주일 정도 된 어느 날,
"국회 광장"에 연결된 어느 좁은 길에서
희한한 걸 발견했다.
유심히 잘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는
허리보다 더 낮은 높이에
커다란 철제 상자에
수수께끼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 그린지 좀 되었는지
좀 낡긴 했지만,
그리고 뭔가 그
승리의 여신 뒤에서 엄숙하게 서 있는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 동상 뒤로 난
개성없는 보통의 좁은 회색 거리와,
그 박스 바로 위 환전소의 창문과
그리고
그 철제박스라는 캠버스와
딱히 어울리는 것 같지도 않고,
좀 쌩뚱맞긴 했지만,
그래도 특이하고
또 예쁘기도 하고,
그런데 뭔가 암호 같기도 해서,
그게 무슨 뜻인지 해독해보려고
한참을 쳐다보고,
살짝 만져보기도 하다가,
그 박스가 뭔지
그 암호가 뭔지 해독에 실패하고
그냥 신기해하며 카메라에 담았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그걸 한번 발견하고나니,
비슷한데 다른 그림들이 눈에 자꾸 띤다.
첫번째 박스에선
경고문이 떨어져 버린 것 같은데,
알고보니,
그건 전기 박스였고,
보통은
Не пипай! Опасно за живота (만지지 마시오! 생명에 위험!)
이라는 무시무시한 경고문과 함께
빨강색 번개가 그려진
으시시한 모습으로,
하지만
쉬이 눈에 띄이진 않게
소피아 여기저기에 서 있었다.
그 속이 어떤지 도저히 상상이 안되는
그런 전기박스 자체가
한국이나 그 밖에 다른 외국 도시에서
본 기억이 없는 그런
특이한 것인데다가,
거기에 그려진 그림이
밝고 선명하고
예쁘고
개성 있고
그리고
모두다 카피본이 없는 원본으로
모두다 달라
매우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러고나서
이제
나는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사람처럼
전기박스에 그려진 그림을 찾기 시작했고,
소피아 시내에서 그걸 발견할 때마다
그 위험하면서(?) 예쁜 걸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별로 볼 거 없는" 소피아에서
뭔가 특이하고 예쁜
"찍을 거리"를 발견하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숨어 있는
그 "보물"을 찾는 재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 때는 그렇게 사진만 찍고 다니면서,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건지
나중에 함 찾아보거나,
불가리아어 선생님들께 물어봐야겠다 했는데,
까먹고 있다가,
이번에 폴더에 있는
전기박스 사진을 보고
찾아봤더니,
이 깜찍한 전기박스는
소피아에서 매년 여름에 하는
Sofia Breathes(София диша),
즉 "소피아는 숨쉰다"라는
아트 프로젝트의
2011년 버전이었다.
(Sofia Breathes 홈페이지)
처음엔 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소피아의 젊은 예술가들이
차르 쉬슈만(Цар Шишман, Tsar Shishman)거리의 전기박스 10여개만 아름답게 꾸몄다.
눈에 띄지 않는 전기 박스에
색과 생명을 부여하자는 취지였다고 한다.
"차르 쉬슈만 거리"는
내가 처음 "수수께끼 박스"를 발견한
바로 그 거리인데,
그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여서가 아니라,
매년 여름 Sofia breathes 아트 페스티벌이
열리는 곳이어서
그 곳 전기박스가 작업 대상이 된거다.
물론 그 거리가 그 행사의 장소로 선택된 것 자체에
나름 특별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검색해봐도 찾을 수 없다.
사실 나는 이 "전기박스 꾸미기" 프로젝트도
무릎을 딱 칠만한
뭔가 의미심장한 취지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기대를 잔뜩하고
열심히 영어랑 불가리아어로 검색했는데,
그냥
단순히
일차원적으로
"전기박스에 생명를 부여하자"는 거여서
좀 김빠졌다.
이들뿐 아니라
연출가며, 영화감독이며, 화가며
예술가들은 "그냥"
자유롭게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건데,
평론가를 위시한
나같이 인문학 하는 사람들은
애초 거기에서 숨겨두지도 않은 "숨은 뜻"을 찾으며
그럴싸한 언어로
헛되이
그걸 포장하며
특정한 자기 생각속에 가두는 걸
즐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차르 쉬슈만" 거리뿐 아니라
다른 소피아 거리들로 쉽게 퍼져나갔다는 걸
알면서도,
그리고 공식적으로 특별한 이유가 있진 않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그래도 뭔가 있을거'라는 기대를
놓치는 않고 있다.
이것도 참 병이다.
아래 지도에서
갈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바로 그 "차르 쉬슈만 거리"다.
난 겨울에 가서
여름에 한다는 Sofia Breathes 행사를
관람하거나 체험하지 못했지만,
거긴
그런 행사 없어도
작고 아기자기한 카페나 레스토랑, 빵집 같은 게
많은 거리였던 걸로 기억한다.
소피아에 들른다면
그냥 한번 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이건
2011년 Sofia Breathes 프로젝트 관련 동영상이다.
내가 2014년 1-2월에
차르 쉬슈만 거리를
한번 쭉 돌았을 때는,
이 동영상에 나온
전기박스 그림들을 거의 발견하지 못했다.
그 때 프로젝트 하고 지웠거나
나중에 다른 그림으로 대체되었나보다.
(동영상 : https://vimeo.com/25595031)
이 프로젝트는 2011년에 큰 호응을 얻어,
그 이후에
소피아의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2014년에
소피아 여기저기에서
알록달록 예쁜 전기박스를 발견할 수 있었던 거다.
나처럼 이 소피아 전기박스를 좋아하는,
어떤 영어 화자의 블로그 글이
2016년에 쓰여진 걸 보면,
아마 "소피아의 숨통을 터주는"
소피아 전기박스 프로젝트는
아직도 계속 진행중인 것 같다.
찾아보니
이러한 "거리 예술"을 utility box art라고
부른단다.
소피아뿐 아니라
세계 여러 곳에서 진행중이라고 하는데,
누가 어디서 가장 처음 시작했는지는
찾을 수 없다.
어쩌면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생명을 부여하고자 하는
예술가들의 열망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비슷한 시기에
세계 여러 지역에서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전기박스 프로젝트 말고도
소피아에서는
거리의 예쁜 그림들,
소소한 "찍을 거리"를 만날 수 있다.
대체로
전기박스만큼 일관성이 있지는 않고,
또 자주 발견되지 않는 걸 보면
이건 특별한 프로젝트가 아닌
예술가 개개인의
개별 작업의 결과인 것 같다.
소피아 이반 바조프(Иван Вазов, Ivan Vazov)거리에 가면
슬런초글레드(Слънчоглед)라는 화방이 나오는데,
그 건물도
눈에 띄는 예쁜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슬런초글레드(слънчоглед)는
"태양 + 보다"의 내적 구조를 가진,
"해바라기"라는 뜻의 단어로,
불가리아 여러 도시에 지점을 둔 화방 체인이다.
이 건물엔 슬런초글레드(слънчоглед)말고
정확하게 뭐하는데인지는 잘 모르겠는
"나 텀노(На тъмно)"라는 가게도
1층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건 불가리아어로 "어둠에서"라는 의미고,
정말로 그늘이 져 있던 데다가,
이 전체 건물의 화사함과
대조되는
칙칙한 분위기여서
좀 웃겼다.
일본인 친구 리사와 함께 갔던
나 포파(Na Popa)라는 식당 벽에도 예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여긴 벽그림 뿐 아니라
음식도 저렴하고 맛있어서
그런 의미로도 한번 가볼만하다.
리사가 자기 동네에 있는식당이라며
내 마지막 수업날 초대한 건데,
보니까 언젠가 한국인 유학생 블로그에서 본
바로 그 "맛집"이어서,
난 그 때 봤던 메뉴를 시키고,
리사는 다른 걸 시켰다.
여러 메뉴 중에서
우리 둘다
내가 한국 유학생 블로그에서 봐서 알게 된
사츠를 가장 맛있게 먹었다.
단, 양이 많으니
너무 많이 시키면 후회할 수 있다.
물론 부탁하면 남는 음식을 싸주기도 한다.
아마도 뭔가 예전에 예쁜 그림을
그렸던 것 같은 흔적이 남아있는 계단도 있었다.
무지개인 것 같은데,
난 사실 이렇게 색이 바랜 게 좀 더 좋았다.
이건
였는데,
이 길이랑
그 옆에
말코 터르노보 거리(Улица малко търново)랑,
그 사이에 이름 없는 길도
좁고 경사진 길이 꽤 정감 있고 아가자기하다.
이 동네는 건물도 좀 유럽식이고
중요한 관공서도 많아서
동네 자체가 전반적으로 깔끔하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또 소피아 성당 바로 앞에 있는
한 귀퉁이에는
심상치 않은 조형물에
포르투갈 시인 Fernando Pessoa
(또는 Álvaro de Campos)
의 "Tabacaria"라는 시도 붙어 있다.
불가리아어로 번역된 거 보면
내용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절대 아무것도 안 될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되고 싶어할 리 없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꿈은 내안에 있다.
라는 의미다.
뭔가 정확하겐 잘 모르겠지만,
멋있는 시 같았는데,
지금 찾아보니,
포르투갈에서 매우 중요한 시인의
매우 유명한 시라고 한다.
그리고
얼마후
또 다른 유럽 국가의 또 다른 시도 발견했다.
이건 "노천공공온천급수대"에서
멀지 않은
건축도시개발과(Направление Архитектура и Градоустройство)
라는 건물에 써 있던 걸로 기억한다.
이건 포르투갈 시보다는 좀 덜 멋진
조형물 위에 쓰여진,
좀 덜 보편적 내용의,
Marcelijus Martinatis의 리투아니아 시였다.
병기된 불가리아어 번역을 보면,
내용은
이 리투아니아와 리투아니아의 유사성은
어디에서 왔는가?
당신이 생각하고 기억하는 모든 것이
다 리투아니아를 닮았다.
뭐 그런 매우 애국적인 시다.
이 두 개의 시를 발견하고,
뭔가 특별한 프로젝트인 것 같아,
혹시 다른 시가 없나 유심히 봤는데,
2014년 2월 나는
이거 말고 다른 시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고보면 포르투갈어 시랑 리투아니아어 시랑
외국어시라는 거 빼곤,
그리고 불가리아어 번역이 병기되었다는 거 빼곤
형식적인 공통점이 없긴하다.
어쩜 2014년 "유럽시 프로젝트"가
막 시작되었을수도 있고,
포르투갈어 시랑 리투아니아어 시가
서로다른 이유로
개별적으로 내걸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리투아니아 시가 번역되어 있는 곳에서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에너지부(Министерство на енергетика)
외벽에 커다란 원들이
겹겹이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사실 이건 딱히 멋진 건 아닌데,
이것 말고
소피아 시내의 건물벽에서는
이렇게 최소한의 입체감이 드러나는
평면적인 그림과 문양을
좀더 괜찮은
좀더 예술적인 버전으로 만날 수 있고,
이 건물의 이 단순하지만
올록볼록한 문양도
아마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다.
"크리스탈" 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199극장(Театр 199) 옆의 벽엔
그것이 불가리아적인 것인지,
아님 그냥 누군가의 화풍인지 모르지만,
같은 톤의 5개 이하의 색채를 사용하고,
벽면에 아주 살짝 입체감을 준,
아름다운 그림이 새겨져 있다.
"벨리코 터르노보"에 갔을 때도
이런 비슷한 그림을 본 것 보면,
뭔가 "불가리아식" 벽면 장식 같기도 하고,
누군가 혹은 어떤 그룹의
스타일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림도 예쁘고,
색감도 세련되지만,
벽을 좀 더 두껍게 만들어 살짝 깎아낸건지,
아님 얇게 덧붙인 건지,
도대체 어떻게 입체감을 만든건지 궁금하다.
그 약간의 입체감 때문인지
참 특이하다 싶으면서도,
그림 자체는 매우 단순해서
계속 보고 있어도 편안했다.
물론 불가리아 사람들은
별 느낌 없이 지나치는 것 같았다.
소피아 대학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불가리아 건축가 협회(Съюз на архитектите в България)
건물 옆
다른 건물벽에도 비슷한 질감과 색감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사실 "건축가 협회"라고 바깥에
그리스식 기둥을 세워둔 건
너무 뻔한 것 같은데,
그래도
20세기초에 건설되었다는
그 협회의 건물 자체는
"건축가 협회"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름다운
아담한 유럽풍 건물이다.
여기는 "불가리아 건축가 협회"이면서
카페와 레스토랑도 함께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건축가 협회" 옆엣 건물의
벽이 나는 더 맘에 들었다.
담이 쳐진 걸보면
그건 "건축가 협회" 건물이 아닌 것도 같고
또 그런 특별한 벽장식을 보면
"건축가 협회" 건물이
맞는 것도 같은
알쏭달쏭한 곳이다.
그리고 소피아의 또 다른 골목에서
그런 살짝 올록볼록하게
원시적인 그림이 그려진
그런 벽을 발견했다.
근처라고 생각했는데,
확실치 않다.
구글지도를 찾아봤는데,
내가 생각했던 그 위치에 특별한 게 없어서
주변 사진이 나오질 않는다.
정확하게 마케도니아 광장 근처가 아니라 하더라도
소피아 시내의 서쪽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건 좀 그린지 오래 되었는지
부분부분 벗겨지고 좀 낡긴 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붉은 빛이 돌고,
어여쁜 여자들이 그려져 있고,
약간 올롤볼록해보이는 질감이,
소피아 여기저기서 본
"불가리아풍"의
그 개성있는 벽화다.
이게 불가리아풍인지 발칸반도풍인지
혹은 누군가의 개인적 화풍인진 모르겠지만,
난 어딘가에서 이 비슷한 걸 보면
무엇보다 불가리아를 떠올릴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는 "불가리아풍"이다.
아무튼 그렇게 또다른 숨은그림을 찾고,
위아래로 유심히 벽을 쳐다보다,
그림이 무슨 뜻일지 생각하다,
사진을 찍고서 모퉁이를 도는데,
갑자기 벌거벗은 마네킹들이 눈 앞에 등장했다.
순간 깜짝 놀랐는데,
그 옆에 어떤 심상치 않은 차림의 할아버지가
마네킹을 등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있다.
그리고 꽤 따뜻한 늦겨울 날씨에
앞섶을 풀어헤친 두꺼운 코트와 털모자를 걸친
그 무심한 할아버지와
이 무표정한 얼굴을 한 벌거벗은 마네킹이
어딘지 모르게 비슷해보이면서
또 어딘지 모르게 서로 안 어울리고,
또 그 와중에
이 마네킹 옷을 모두 벗겨놓은
희안한 옷가게의 간판이랑 상점벽은
너무 컬러풀하며
또 너무 아무 영어나 써 있는 게 또 키치스럽다.
아무것도 아닌 그 순간이
괜히 혼자 신기해서 사진을 찍었는데,
또 지금보니,
아무 것도 아니었던 그 부조화의 순간이
특별히 생각이 난다.
어떤 건 아름다워서
어떤 건 이상해서
개성이 되고
또 기억이 남는다.
누군가에겐 별로 매력적이지 않을지도 모르는
"소피아가 품어내는"
그런 가벼운 예술적 날숨도
나에겐
나만의 "숨은그림찾기"놀이의 중요한 단서가 되고,
또 소피아라는 낯선 공간에 있음을,
그 특별함을
새삼스레 자각하게 되는
기분좋은 자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