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Копривщица, Koprivshtitsa)
불가리아어를 배우는
두번째 3주짜리 학기에는
뭔가 발음하기도,
그리고 기억하기도 쉽지 않은
코프립슈티차(Копривщица, Koprivshtitsa)
라는 마을로 소풍을 갔다.
소풍 날짜는 나의 소피아 체류
마지막에서 두번째 주말로 정해졌다.
전달의 소풍은 수요일이었는데,
이번달은 토요일에 가게 되었고,
나는 그 주말에 워낙
불가리아 제2도시
플로브디프(Пловдив, Plovdiv)에
가보려고 하던 참이었어서,
좀 고민했다.
그냥 소풍 안가고 주말에 혼자
플로브디프를 2박 3일 다녀올 것인가,
아니면 플로브디프를 포기하고
소풍을 갈 것인가?
생각해보니 플로브디프는
나중에 내가 혹시라도
불가리아에 다시 오게 되면
혼자라도 갈 수 있지만,
코프립슈티차라는 데는
나혼자는 못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진에서 본
플로브디프엔
그리스나 로마유적이 많은 것 같던데,
이미 그리스에 5박 6일간 다녀온 뒤라,
그런 고대유적에 대한 허기가 별로 없었다.
이에 비해
코프립슈티차는 어떻게 생겼는지
감도 잡을 수 없었지만,
학교에서 소풍 장소로 정한 거면
중요한 의미가 있을 거고,
그래서 그 생김새랑 관계 없이 좀 궁금했다.
그래서 플로브디프는 포기하기로 했다.
몇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플로브디프가 아쉽지만,
그래도 그 때 코프립슈티차를 택하길 잘 한 것 같다.
지난달 소풍에는
아랍어 화자 3명과
슬로바키아인 1명, 그리고 나 이렇게 5명의 학생과
연세 많으신 선생님들 3분,
이렇게 조촐하게 8명이었는데,
이번엔 기본 신청자도 저번보다 많은 데다가
남자친구, 여자친구, 남편, 아내를
데려온 사람들도 있고,
선생님도 5명에,
그 중 한 분은 딸도 데리고 왔다.
그러니까
선생님 5명과 딸 1명,
학생은
캐나다인 션과 그의 불가리아인 부인 마리아나,
영국인 스티븐과 그의 불가리아인 여친 엘렌,
러시아인 나타샤와 그녀의 불가리아인 남편,
이름 잘 모르는 영국 여자분(50-60대 정도 되어 보이신다)
폴란드인 마리아,
시리아인 레만,
그리고 나 이렇게 모두 16명이었다.
그 중 지난번 소풍을 같이 갔던 사람은
나랑 레만이랑 블라디미르 선생님
이렇게 셋이었다.
블라디미르 샘은 지난 소풍에선 모르는 분이었는데
나의 두번째 불가리아어 코스에서
우리반 수업을 맡아
이번 소풍에선 가장 친근한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레만은
지난 소풍 때 인사하고 이름 까먹었는데,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안해하며
나도 이름 다시 물어보고,
다행히 이전 소풍에서
내 카메라에 그의 사진이 찍혔던 걸 기억하고,
이메일 물어, 사진도 보내줬는데,
몇년이 지나니 이름은 또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매우 친절한 사람이었던 건 기억하고 있다.
두번째 소풍에서 레만은
같은 반인듯 보이는
폴란드인 마리아와 짝이 되어 돌아다녔다.
아무튼 이번에 사람이 많아서,
작은 미니 버스가 꽉꽉 찼다.
버스 안은
되든 안되든 불가리아어로 말해보려는 파와
좀 더 편한 영어로 말해보려는 파로 나뉘어서
각각의 언어로 각자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냥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내 옆쪽에 부인과 함께 앉아있던 우리반 션은
Small talk에 길들여진 영어 화자답게
혼자 앉아가는 나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처음에는 불가리아어로
나중에는 영어로 계속 무언가를 물어봤다.
그래서 나는 션과 마리아나와
열심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갔다.
코프립슈티차(Копривщица, Koprivshtitsa)는
불가리아 중부,
'가운데 산'이라는 의미의
스레드나 고라(Средна Гора)에 자리잡고 있다.
수도 소피아로부터 동쪽으로 108Km
떨어져 있으며,
산속을 꼬불꼬불 돌아서 가는 길이라,
차로 약 2시간 정도 걸린다.
그렇게 코프립슈티차에 도착해서는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우리 그룹은
불가리아어 안내를 원하냐,
영어 안내를 원하냐는 가이드의 질문에
불가리아어 안내를 원한다고 하더니,
결국
현지가이드의 불가리아어 안내를
못 알아듣겠다며,
중간에 가이드더러 영어로 설명해달라고 했다.
그나마 그렇게 요구를 하고서도
그 가이드를 열심히 따라다니지 않고,
각자 나름대로 사진 찍고 구경하고 그러느라
가이드랑 떨어져 있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처음엔 뒤쪽에 서 있던 내가
어느 순간 가장 앞에 서 있게 되더니,
심지어
가이드 앞에 나 혼자 서 있는
뻘쭘한 경우까지도 있었다.
우리 가이드는
좀 마르고,
긴 코트에 선글래스 낀
멋있게 생긴,
지적인 느낌의 중년 여성이었는데,
사람들이 빨리빨리 잘 안 따라오니까,
"학생들이 관심 없으면, 난 안하고 싶다"는
식으로 말하며,
좀 자존심이 상한 듯 했다.
사실 우리는 관심 많았는데,
가이드의 진행 속도가 너무 빨랐고,
그녀의 설명하는 목소리는 너무 작았다.
또
우리는 불가리아 역사나 문화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어서,
질문할 게 없기도 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이 "코프립슈티차"라는 마을은
터키의 500년 지배에 저항하여
1876년 처음으로 봉기를 일으킨 곳인데,
거기엔 부유한 사람들이 많아서
터키인들이 뭔가 해를 끼칠려고 하면,
부자들이 물질적인 것으로 터키인들을 매수해서
당시 건물이나 그 밖의 것들이
안전하게 살아남았고,
그래서 건축학적으로도
19세기 불가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양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라고 했다.
그 설명을 하면서
가이드가 질문을 던졌다.
"왜 다른 곳이 아니고
"코프립슈티차"에서 먼저 봉기가 일어났는가?"
그리고는
마땅한 답이 없이
궁금한 눈으로 바라보는 우리를 보며 곧 대답했다.
"코프립슈티차엔 다른 곳보다 부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부자들이고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이어서
터키인들에게 굽실거리기 싫었고
그래서 봉기를 일으킨거다."
뭔가 이해가 되면서도
또
뭔가 낯선 논리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역사가 있지만,
당시 우리의 "가진 자"들 상당수는
가진 것이 많아서
그걸 잃을까 두려워하며
침묵하고
혹은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외세에 굽실거리지 않았던가?
물론 불가리아와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이 다르고,
터키와 일본의 식민정책이 다르긴 하다.
불가리아는 터키의 지배를 500년간이나 받았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터키가
불가리아 및 그 밖에 많은 발칸국가들을
지배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의 문화와 종교에 크게 간섭하지 않고,
주로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편을 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터키에 문화적, 종교적으로
크게 동화되지 않은 채로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다가
발칸국가들에 민족주의가 싹트기 시작한 건
19세기가 되어서였다.
그러니 당시 가진 것이 많은 불가리아 부자들이
터키인들의 점점 더 많은 요구에
자존심 상해하며
새삼스럽게 봉기를 일으킨게
이해 안가는 건 아니다.
그러구보면 이제 비슷한 상황이었던
식민지 조선의 부자들과 지식인들의
친일행보가 낯설게 느껴진다.
식민지배초기부터 우린 민족의식도 강했고,
지배층의 자존심도 약하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그렇게 우리가 현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둘러본 곳이
아래 지도에서 시냇물 왼쪽에 있는 부분이다.
코프리슈티차는 아래 지도에서 보이듯,
마을 가운데 시냇물이 흐르고,
시냇물 옆으로 마을이 있고,
그 주변으로 산이 둘러싸고 있는 형상이다.
코프립슈티차(Копривщица)라는 마을 이름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쐐기풀'이라는 의미의 коприва[코프리바]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고,
시내가 많아서 '시냇물 더미'라는 의미의
Куп речици[쿠프 레치치]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고,
예전에 이곳은 철광석 산지였는데,
'철광석'은 불가리아어로
рупи[루피], рупище[루피슈티체]이고,
이곳이 교통의 요지로 거래가 많이 이루어져,
거기에
'상인들'이라는 의미 купци[쿱치]가
합쳐져 "코프리슈티차'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코프립슈티차(Копривщица)라는 마을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우선, 주변에
즐라티차(Златица), 피르도프(Пирдоп),
클리수라(Клисура), 스트렐차(Стрелча),
파나규리슈체(Панагюрище) 등
여러 마을이 있는 교통의 요지인데다가
산과 시냇물이 있어
예전부터 여행자들이 머무는 곳이었는데,
주파(Жупа)라는 가족이 이곳에 머물며
마을을 세웠다는 것이 그 하나이고,
어떤 젊은 여인이 이곳에서 소를 치기 시작하며
여기에 마을이 생겼다는 것이 두번째 버전인데,
터키인들이 이곳을 "여인의 풀밭"이라는 의미의
“Avratalan” 으로 부르는 것과 연관된다.
그리고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피해
도망쳐 온 사람들이 마을을 만든 게
이 마을의 시작이었다는 설도 있다.
그 때 현지가이드에게서
이 모든 이야기를 불가리아로 다 듣긴 했는데,
그 때는
이 모든 걸 다 이해하진 못했었다.
지금 다시 찾아 읽어보니,
기억이 조금씩 복원되고,
당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도 이제 채워졌다.
이런 복잡한 이야기를 불가리아어로 듣는 건
아무래도 당시 우리에겐 무리였던 것 같다.
아무튼 "코프립슈티차"는
불가리아 전체의 역사에 비해
역사가 오래된 마을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이 곳의 건물들은
19C 불가리아 르네상스 양식을 그대로 보전하고,
또한 당시 양식으로 일부러 새로 복원하기도 해서,
시각적으로 매우 불가리아적인,
불가리아의 전통을 보여주는 곳이다.
"코프립슈티차"
마을의 모든 공공건물을 입장할 수 있는 표는
일반 6레바(약 4,000원),
학생 3레바(약 2,000원)인데,
마을 입구에서 구매할 수 있다.
우리도 단체로 이 표를 구매했던 것 같다.
이건 "코프립슈티차" 영문홈페이지다.
여기가 마을입구다.
아래 보이는 진홍색 1층짜리 건물이
여행안내센터다.
여기서부터 현지가이드를 따라 움직였다.
우리가 가장 처음에 간 곳은
시인 "딤초 데벨랴노프
(Димчо Дебелянов, Dimcho Debelianov)"
의 집으로,
위 지도의 4번에 위치하고 있다.
시인의 집 답게 시가 적혀 있었는데,
아래 사진의 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불안한 꿈 속으로 옮겨져,
고통스러운 비장을 통해 나는 본다.
어떤 밝은 나라에서 내가
신의 가장 밝은 아들이 되는 걸.
여긴 데벨랴노프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시인의 집을 나와서 좀 더 걸었다.
그리고 들어간 곳은
작가 류벤 카라벨로프(Любен Каравелов,
Ljuben Karavelov)의 집으로,
위 지도에서 7번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집에 살았던
류벤 카라벨로프는 작가였고,
동생 페트로 카라벨로프는
수상까지 역임했던 정치인이었다.
이들의 집에서
이곳 출신뿐 아니라
다른 지역 출신도 포함하는
불가리아 독립운동가들이
혁명 신문을 인쇄했고,
불가리아 독립 이후엔
이곳에서 헌법을 출력했다고 한다.
이 집엔 3채의 건물이 있는데,
우리가 들어간 데는 그 중 한 건물이었다.
이건 독립운동가 토도르 카블레슈코프
(Тодор Каблешков,Todor Kableshkov)의 집으로,
위 지도에서 5번이다.
그 밖에 다른 중요한 건물들과
다리에 대한 설명도 들으면서
그렇게 1-2시간 정도가 지나갔다.
가이드가 끝나고 다 인사를 하면서,
가장 열심히 따라 다니면서
반응을 보인 나더러
"당신 나라말로 작별인사가 뭐냐?"고 물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해서
"안녕히. 가세요."
라고 한 어절씩 끊어 말했고,
옆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뭐가 그렇게 어렵냐는 뜻이었다.
사실 불가리아어로 작별인사는
'도 비쥬다네 (До виждане)'니
난이도는 막상막하인 듯 싶은데,
너무 낯설어서 어렵게 느껴졌나보다.
물론 나혼자 알아 들었지만,
다행히
가이드는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안녕히 가세요"를 말하고,
성급히 사라져갔다.
뭔가 여러모로 많이 자존심이 상해서
가능한한 빨리 그 상황에서 빠져나가고
싶어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
옆에서들 짧은 인사는 없냐고 물었고,
내가
"안녕"이라고 대답해더니,
'뭐 그건 할 수 있겠네'하는 편한 표정으로
여기 저기서 돌림노래처럼
"안녕"을 따라했다.
가이드한테도 그냥 "안녕"이라고 알려줄 걸.
갑작스런 질문에 그걸 생각 못했다.
그렇게 가이드의 투어를 마치고
자그마치 1837년에 세워진
가장 오래된 초등학교 건물에 들어가서
구경을 했다.
지금은 학교로 안 쓰이는지,
아님 주말이라 그런지,
학생들의 흔적은 없었고,
문 열린 어떤 교실은 옛날식으로 꾸며 있었다.
그 교실에 들어간 불가리아어 선생님들은
역사와 추억을 되새기며,
상황극을 하면서
신이 나서 사진을 찍었는데,
신기한 건 앞자리에 있던
모래를 담아둔 작은 칠판이었다.
아마도 옛날 불가리아 학교에서는
모래 위에 글자를 쓰고 지웠나보다.
그 뒤엔 작은 흑판이,
그 뒤엔 종이가 놓여 있었다.
공책의 진화를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말이다.
어떤 큰 방에는 옛날에 쓰던 물건들이 놓여 있었고,
한 구석에 놓인 TV를 켜니,
아무래도 BBC 다큐멘터리인 듯 보이는,
영국 억양의 호스트가
코프리슈티차를 소개하는 티비 영상이
불가리아어 자막과 함께 나왔다.
길지 않은 영상이라
다들 재밌게 그걸 감상했다.
그렇게 이것저것 구경하고
초등학교에서 나와
다같이 점심을 먹으러 갔다.
사실 나는 그 날
특별한 두각을 나타낸 건 없었던 것 같은데,
내가 유일한 동양인이라서 그런지,
혼자 다니는 게 안쓰러워서 그랬는지,
가이드 설명을 열심히 들은 게
인상적이어서 그랬는지,
선생님들이 자기 탁자로 오라고 나를 불렀다.
그래서 선생님 5명과 딸 그리고 내가
한 테이블에서,
그리고 나머지 학생들이
두 테이블에 나뉘어 앉아
점심을 먹었다.
우리 테이블에 있는 선생님들은
다들 우호적이었는데,
특히 나더러 자기 옆으로 오라고 한
밀레나 선생님이 나한테 잘해줬다.
젊고 예쁘고 친절한 선생님이었다.
주문할 때도
거기서 유명한 토속음식이 뭔지 가르쳐주고
그거 주문해주고,
그 집에서 요거트 직접 만드니
디저트로 그거 먹어보라고 추천해주기도 했다.
그 디저트는 정말 맛있었고,
요리는
달걀 삶은 거 3개를 요거트 위에 얹어 먹는 거랑
살짝 두툼한 란 위에다
버터랑 마늘을 바른 걸 시켰는데,
메인인 달걀요리는
딱히 입맛에 맞진 않았지만 먹을만했고,
버터랑 마늘 바른 두툼하고 따뜻한 란은
정말 맛있었다.
밀레나 선생님은
초등학교 갔을 때
자기가 카메라를 안 가져와서 그러니까
사진 좀 찍어달라고 부탁해서
내가 사진을 하나 특별히 찍어준 게 있었는데,
그거 보내달라고 이메일도 하나 적어줬다.
그 때 코프리슈티차에서 내가 찍은 사진을
모두 올려 놓은 폴더 주소를 알려줬는데,
그 사진들이 맘에 들었는지,
그 담주 일부러 우리 수업에 들어와서는
민망할 정도로 칭찬을 했다.
밀레나 샘뿐 아니라
불가리아 사람들은 항상 이런다.
별거 아닌 거에 칭찬하고
별거 아닌 거에 크게 좋아하고.
그렇다고 불가리아인들이
무조건 칭찬만 하는 건 아니다.
나중에 내 사진을 본
블라디미르 샘은
"다른 문화의 사람들이 보는 시각이 흥미로왔다"고 평하고,
그런데
기술적으로 문제가 있어,
예를 들어 사진이 좀 기울어 있다며
몇 가지 사진찍기 팁을 일러주셨다.
알고보니 블라디미르 샘은
아마츄어 수준을 넘어선 솜씨를 가지신
세미프로(?) 포토그래퍼였다.
블라디미르 샘의 팁덕분에
그 다음부터
난 사진의 구도에
좀 더 신경을 쓰게 되었다.
점심을 마치고 우리는 다같이
독립운동가
게오르기 벤콥스키(Георги Бенковски)
의 동상을 보러갔다.
지도의 13번에 위치하고 있는데,
시내를 건너고 마을을 지나 계단을 올라
언덕으로 올라가면 나온다.
게오르기 벤콥스키는 코프립슈티차의
1876년 4월 봉기를 주도한 인물로,
그 역사적 중요성 때문에
이렇게 언덕 위에
말을 타고 있는 거대한 동상으로
특별히 더 기념된다.
벤콥스키가 탄 말 밑에 쓰여진 말은
현대 불가리아어랑 좀 다른 것 같은데,
아마도 이런 뜻인 것 같다.
Ставайте робове! Аз не ща ярем! (노예들이여 일어나라! 나는 멍에를 원치 않는다)
그 밑에도 커다란 바위위에 뭐라고 쓰여 있는데
이것도 현대 불가리아어가 아니라
정확하진 않지만,
대강 이해하기로,
"전 민중을 용감하게 이끈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인물이자
위대한 업적을 이룬 영웅"
이라는 의미인 것 같다.
여긴 이 거대하고 고풍스러운 동상도 볼거리지만,
사실 난 여기 올라서 보는
코프립슈티차 마을 전경이 더 좋았다.
날씨도 좋고,
풍경도 마음에 들어서 셀카도 찍었는데,
그 때 봤을 때는 그냥 그렇더니,
몇년만에 다시 보니,
그 때의 행복한 마음이 담긴
그 셀카도 마음에 든다.
멀지 않은 곳에 반콥스키의 집도 있었다.
지도의 8번이다.
이제
혁명가 동상 있는 곳에서
각자 자연스럽게 흩어져서
각자 사진을 찍었다.
겨울이라 나뭇잎이 없는 게 좀 아쉽긴 했지만
시냇물도 유난히 반짝이고
마을도 소박하고 예쁘다.
이건 위 지도 15번에 위치한
4월 봉기묘(Мавзолей на Априлци, Mausoleum of the April Uprising)인데,
1876년 4월 봉기에서 사망한 불가리아인을
기리는 기념탑으로,
1928년에 세워졌고,
아랫부분은 납골당,
윗부분은 예배당이란다.
나는 가이드가
"여기서 처음 총을 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쏜 게 아니라
하늘에 대고 쏜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다치지는 않았다"
고 설명한
그 4월 봉기가 시작된 다리를 찍고 싶어서,
다시 그 칼루체프 다리(Калъчевия мост,
Kaluchev bridge)에도 갔다.
위 지도 14번이다.
하지만 찾아보니,
여기에서 터키 경찰이 불가리아 반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한다.
내가 그 때 가이드의 말을 잘못 이해했거나,
아님 그 첫발과 터키 경찰을 죽게한 총성이
다른 두 발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던 결국 누군가는 죽은거다.
4시 반까지 마을 입구에서 만나기로 해서,
사진을 찍고 시간에 맞춰 서둘러 갔다.
좀 더 구경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일찍 가야하는 게 아쉬웠다.
집을 가는 버스 안에서는
이제 불가리아어를 해보려는 사람 없이
다들 영어로 말하고 있었고,
나는
가끔씩 대화에 끼어들고,
보통은 그냥 창밖을 보면서 집에 왔다.
거기서부터 소피아까지 돌아오는 길은
한시간 반에서 두 시간 정도 걸렸는데,
4시 반에 버스가 출발했기 때문에
버스 안에서 해지는 걸 봤다.
그런데 그 해지는 풍경이 어찌나 멋지던지...
정말 넋을 잃고 쳐다봤다.
여태까지 본 석양 중에
가장 아름다운 석양이었는데,
사진으로는 그 아름다움을 못 담을 것 같아
그냥 눈으로만 봤다.
이전 소풍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소풍을 가서
그전엔 몰랐던
불가리아의 다른 얼굴,
특히
불가리아인들이 자신의 얼굴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걸 봐서 좋았다.
난 아센 요새로 간 소풍보다
코프립슈티차로 간 소풍이 더 좋았는데,
우선, 이번엔 사람들도 많고
그들과 좀 덜 서먹서먹하고 자연스러워서 좋았고,
또 이번엔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그곳에 대해 배우면서 가게 되서 좋았고,
또 한국의 역사와 비슷한
불가리아 역사 안에서 어떤 동질감을 느껴서,
그들이 얻으려던 자유와 독립이 뭔지 알 것 같아서
그게 또 마음에 와닿아 좋았다.
그 다음주에 불가리아 수업에서
소풍으로 갔던 코프립슈티차 얘기를 했는데,
예전에 가본 데라며 이번엔 같이 안 갔던
우리반의 일본인 리사는
코프립슈티차가 테마파크처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아 별루라고 했다.
마을의 집들이 다 선명한 색으로
알록달록한 걸 떠올려보면,
그 말이 뭔지
이해를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독립을 원하는 불가리아인들의
그 마음을 어쩌면 우리보다 덜 이해할,
어쩜 다리에서 죽은 그 터키 경찰에
더 감정이입을 할 지도 모르는,
일본인 리사에게
코프립슈티차는
그냥 눈에 보이는 알록알록한 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수 있었을 것 같다.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다더니,
그러고보면,
우리의 아픈 과거사는
다른 나라의 아픈 과거사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그걸 "못 겪은" 민족 출신들은 느끼지 못한
중요한 어떤 걸 느끼게 만드는,
우리의 매우 소중한 경험이자 기억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