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에서 지근거리 그리스 아테네 2박 3일 중 첫날
원래 그리스에 갈 계획은 없었다.
그동안 나름 많은 나라를 돌아다녀봐서
이제 난
사람들이 많이 찾는 여행지에 대한 환상이 없다.
여러 군데를 가서 다양한 걸 넓게 접하는 것보다
이제는 한 군데에서 그 곳을 깊이 아는 게 좋다.
그리고
최근 몇년간 계속 외국어 현지 연수를 하면서
중간중간 짬을 내서 여행을 하다보니,
그 나라 언어로 여행을 가게 되었고,
비록 그 차이가 많이 크지는 않아도,
영어로만 여행하면 알 수 없는 것까지 알게 되는
지적, 감정적 호사를 누려서 그런지,
이제는 언어를 모르는 곳으로
선뜻 떠나게 되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하던 불가리아어 연수가
3주하고 1주 쉬는 시스템이라
7주 중간에 1주간 휴가가 생겼고,
마침 지인 ㅎ가 그리스 테살로니키 근처에 있어서
그리로 놀러오라길래,
거길 가기로 했다.
그것도 원래는 그냥 테살로니키만 갈 생각이었는데,
ㅎ가 그리스에 오는데 그래도
아테네는 한번 가보는 게 좋지 않겠냐 하길래
그럼 거기도 가보기로 했다.
그래서 2박 3일 아테네 구경하고,
밤에 테살로니키로 넘어가서,
거기서 3박 4일 있다가 소피아로 돌아오는
총 5박 6일의 일정을 짰다.
소피아에서 아테네 갈 때는 비행기를,
테살로니키에서 소피아 올 때는 버스를 탔다.
아테네행 비행기는 인터넷으로
그리스 저가항공의 편도 티켓을 예매하고,
신용카드로 결제했다.
인터넷 창에서 결제 잘 되었다는 메세지를 보고
잠이 들었는데,
그 다음날 아침 일찍, 거의 8-9시쯤
휴대전화로 전화가 와서
그 전화벨에 잠이 깼다.
전화 저쪽에서
누군가가 불가리아어로 뭐라고 하는데,
비행기 티켓과 결제에 대한 이야기 같긴 한데,
뭐라고 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어서,
죄송하지만, 영어로 해달라고 했더니,
내가 결제한 신용카드가 결제가 안되는 거라서
은행에 가서 입금을 해야한다는 걸
알리는 전화였다.
그리고 그 은행명과 계좌번호를 천천히 불러줬다.
갑자기 잠에서 깬 데다가,
미처 생각 못한 새로운 변수고,
원래 그런건지 물어볼 사람도 없어서,
그대로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사기를 치기엔 그 액수가 너무 적고,
그에 비해 아침 일찍 전화해서
자세하게 설명한 그 사람의 노력은 너무 크니,
사기는 아니라고 판단하고,
혹시 사기라도
그 정도 액수는 손해봐도 괜찮다 생각하고,
그 사람이 말해준
그 은행에 가서 그 계좌로 돈을 넣었다.
은행은 처음이라 좀 긴장하고 갔는데,
생각보다 은행업무는 쉽게 끝났고,
나중에 입금 잘 됐다는 확인 이메일도 받았다.
그리고 불가리아 체류 3주차 토요일
무사히 아테네행 비행기를 탔다.
저가항공이라 선택지가 그것뿐이었는지,
아님
내가 일부러 일찍 출발하는 표를 끊었는지는
지금은 기억이 잘 안나는데,
아침 6시 20분 기상을 해서,
전날 대충 챙겨 놓은 짐을 다시 점검하고,
7시 30분쯤
공항 가는 일반버스를 타러갔다.
소피아는 공항이 시내랑 가까운데다가
난 공항이랑 가까운 소피아 북동부에 살고 있었다.
(소피아 교통시스템은 이전 포스트에)
그리고 공항까지 가는 두 대의 시내버스 중
하나인 84번이 내 숙소와 가까운 곳에 다닌다.
그런데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워낙 일기예보 상으로는
주말부터 추워져서 눈이 온다고 했는데,
아직 그만큼 추워지지는 않았나 보다.
불가리아어 선생님이
불가리아는 2월이 가장 춥다고 했는데
정말 그럴려는지,
일기예보에선 1월 마지막 주말 이후로
기온이 계속 뚝뚝 떨어진다고 했었다.
그래서 아직 소피아는 춥지 않고,
위도가 낮은 그리스는
더더욱 춥지않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소피아로 돌아오는 날을 대비해서,
두꺼운 옷이랑 목도리, 장갑 등을 챙겨 넣었다.
사실 필요한 짐만 싸면 작은 배낭 하나로 충분한데,
화장품과 삼푸, 샤워젤, 치약 등등은
핸드캐리 할 수 없어서,
그것 부칠 가방을 따로 만들어야 할 것 같고,
(어차피 그것들 합쳐도 100ml 안 되겠으나
괜히 문제 생기게 하고 싶진 않았다)
날 그리스로 초대한 ㅎ에게 줄려고
한국에서 사온 것들도 싸갈려고
등에 맨 배낭말고 가방을 하나 더 만들었더니,
괜히 옷도 몇 개 더 챙기게 되고,
그 밖에 다른 잉여적인 것들도 넣게 되서
짐이 생각보다 무거워졌다.
그래서 비도 왔고 짐도 무거웠지만,
버스도 일찍 왔고,
사람도 많지 않았고,
일찍 도착해서
일찍 체크인하고
일찍 보딩하고
매우 순조롭게 잘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는 Olympic air라는
그리스 저가항공사였는데,
비록 좀 많이 저렴해보이긴해도
케잌이랑 크로아상도 주고
자리도 편안했다.
그리고 나는 창가 자리라
소피아에서 아테네 가는 길의
멋진 바다와 섬들이 이루는
황홀한 풍경을 보며 갈 수 있었다.
아테네는 그리스 남동부 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아래 지도를 보면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그리스 아테네 가는 비행기에서
왜 바다와 섬이 보였는지 알 수 있다.
비행시간은 1시간 20분 정도 걸렸고,
거의 정오가 다 되서 도착했다.
입국심사는 아주 순조로웠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도장만 꽉 찍어주었다.
짐도 아무 문제 없이 잘 찾았다.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그리스통화로
환전하거나 출금하려 했는데,
그리스는 알고보니 이제 유로화를 쓴다.
내가 체코랑 폴란드랑 불가리아랑
유로 안 쓰는 유럽연합국가들에만 있어봐서
그리스도 자기통화가 있겠거니 했던 거다.
그러고보면,
그리스 경제위기의 원인 중 하나도
유로화 도입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었는데,
그거랑 그거랑 따로 생각하고 있던 거다.
마침 내게 300-400유로 정도가 있었는데,
5박 6일 동안 그거면 충분할 것 같아서
따로 유로화를 인출하지 않고 공항을 빠져나갔다.
공항에서 이국적이고 낯선 글자를 보니,
뭔가 진짜 여행자가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안내센터에서 받은 지도를 보며
숙소 위치를 파악한 후,
1시 좀 안되서 지하철을 탔다.
아테네는 지하철이 3개 노선.
그 중 공항이 있는 노선은 3호선이고,
내 숙소는 2호선 라인에 있어 갈아타야 하는데,
그 갈아타는 역 이름이
"신타그마(Syntagma)"다.
이거 "결합"이라는 의미로
언어학 용어로도 쓰는 건데,
역시 그리스어는 일상용어도
본의아니게 학술적이다.
공항에서 지하철표를 샀는데,
요금이 자그마치 8유로나 한다.
'와, 지하철 요금이 8유로면 어떻게 타고 다니냐?
물가가 무지 비싸구나'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공항까지만 그요금이다.
하긴 우리도 공항가는 노선은 좀 더 비싸구나.
보통 지하철 이용요금은 1회에 1.4유로다.
한국보단 비싸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감당할 만하다.
2014년 1월에 난 종이티켓을 사서 탔었는데,
2017년부터
아테네 대중교통티켓이 카드로 바뀌었단다.
그 밖의 다른 정보는 아래 사이트에 참고할 수 있다.
Metaxougeiou(메타호우르기오)역에서
내리면 가깝다고 호텔 소개글에 써 있어서
거기서 내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호텔은
Metaxougeiou역과 Omonia(오모니아) 역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고,
Metaxougeiou역에서 오는 길이
좀 더 복잡했다.
그래서 지나가는 젊은 여자분에게 물었더니
자기도 여기 출신이 아니라 모르겠지만,
아마 저기인 것 같다며,
자기도 저쪽으로 가는데 같이 가자며,
같이 가며 알려줘서 쉽게 숙소를 찾았다.
그렇게 공항에서 내가 예약한 호텔까지 가는데
거의 1시간 정도 걸렸다.
거의 2시 다 되어서 도착했다.
호텔 프런트에서 체크인을 하고
거기서 알려준대로 7층으로 올라왔는데,
우와!
전망이 정말 좋다.
남북으로 길이 나 있는데,
그 확 뚫린 기다란 길이 시원시원하고,
그 양끝엔 산이 있는데,
그 풍경이 건물들로 끝나지 않고
산이 마무리해줘서 좋다.
방에 써 있는 요금보니
원래 하루에 100유로 정도하는 것 같은데,
아마 비수기라서
혹은 손님이 없어서 가격을 많이 내렸나보다.
저렴한 방값에 비해 매우 만족스럽다.
역시 여행객들 사이 경쟁이 덜 치열한
비수기 여행은 이런 게 좋다.
2박 3일이 아니라 일주일 정도 있으면 좋겠다 싶다.
그래서 주변 풍경 사진 찍고
들고 다닐 배낭을 작게 다시 싸다가
'거기는 다 너무 일찍 닫는다'는
ㅎ의 경고가 생각났다.
그래서 서둘러 아크로폴리스로 향했다.
비행기에서 어플리케이션으로 읽으면서,
여기서 봐야할 가장 중요한 두 개는
아크로폴리스와 고고학박물관라고 결정했고,
ㅎ가 아침에 카톡으로 알려준 정보에 따르면,
주말에 아테네에 비가 올 거랬는데,
아직 비가 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우선 아크로폴리스부터 갔다.
고고학박물관은 비가 와도 볼 수 있지만,
아크로폴리스는
날씨 좋을때 봐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둘러 나가서
Omonia역에서 지하철 타고
Syntagma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탄 후
한 정거장 더 가 Acropolis 역에서 내렸다.
그게 거의 2시 40분 쯤.
즉 3시 다 되었을 때였다.
Acropolis 지하철을 내려 언덕을 올라가면,
책에서만 봤던 그 아크로폴리스가 보인다.
그렇게 멀리 아크로폴리스의 신전을 바라보며
걸어가다보면,
거기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디오니소스 극장이라는 야외원형극장이었는데,
당시엔 그게 아크로폴리스인지
디오니소스 극장인지 알수 없었던 내가
매표소에서
'이게 아크로폴리스냐?'고 물었더니,
매표원이 그건 디오니소스 극장인데
일반 12유로, 할인 6유로짜리 혼합티켓을 사면
이것도 보고 아크로폴리스도 보고
그 밖의 여러 유적지도
5일 동안 4번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럼 그걸 사기로 했다.
그 때 사진을 따로 안 찍었는데,
이렇게 생겼었다.
그런데 얼마전에 이게 바뀌어서,
2018년 현재는
아크로폴리스 입장만 일반 20유로, 할인 10유로,
(11월부터 3월까지 겨울시즌엔 여기서 50%할인)
아크로폴리스 포함 이것저것 다 볼수 있는
패키지 티켓은 일반 30유로, 할인 15유로다.
(이건 겨울 시즌에도 할인 없다.)
이제는 아크로폴리스 패키지에
더 많은 장소가 포함되기도 했고,
그 패키지에 포함된 유적들이
사실 그 가격 이상의 가치가 있는 곳들이긴 하지만,
인상된 입장료를 보니,
그래도 마음이 좀 씁쓸하다.
그리스정부 재정상태가 안 좋긴 안 좋나보다.
이건 아크로폴리스 인터넷 사이트다.
가끔 아크로폴리스 패키지가
12유로라고 나오는 글이 있던데,
또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공식홈페이지 자료가 가장 정확할 것 같다.
아래 지도에서 붉은 글씨로 표시된 부분이
아크로폴리스,
하늘색 밑줄이 내가 둘러봤던 곳이고,
초록색 밑줄이 지하철역이다.
아테네 첫날은
아크로폴리스 지하철역에서 내려,
디오니소스 극장,
헤로데스 아티구스 극장,
아크로폴리스,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 신타그마 광장에 들렀다.
디오니소스 극장(Θέατρο του Διονύσου, Theatre of Dionysus)은
위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아크로폴리스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기원전 6세기에 세워진 최초의 극장으로,
이곳에서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같은
유명한 그리스 작가들의 작품이 공연되었고,
그리스 비극이 탄생했다고 한다.
디오니소스는 와인/술의 신일뿐 아니라
극장의 신이기도 해서,
이 극장에 디오니소스의 이름이 붙은거다.
그 역사적 가치뿐 아니라,
건물 자체의 규모와 아름다움,
그리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너무 아름다워
저절로 감탄이 터져나온다.
디오니소스 극장 옆으로 길이 나 있길래 가보니,
유메네스 스토아(Stoa of Eumenes)다.
안내문의 그림과 비교하면,
아주 작은 일부만 남아 있는 것 같아서
그것 자체는 볼 게 별로 없지만,
거기도 높은 곳이라 전망이 좋다.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길에 또 다른 극장, 즉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Ωδείο Ηρώδου Αττικού,Odeon of Herodes Atticus)이 있다.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은
디오니소스 극장보다 좀 더 작고
좀 더 경사가 급하다.
이 곳은 콘서트를 했던 곳으로,
AD 2세기 중반에 건설되었고,
3C에 파괴되었던 걸
1950년에 복원했다고 한다.
그 이후 그리스 출신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
대중음악가수 나나 무스쿠리,
외국 가수 스팅, 엘튼 존, 안드레아 보첼리 등이
이곳에서 공연을 했다고 한다.
어플리케이션에서 그걸 읽기 전에는,
그냥 풍경에만 감탄했는데,
아직도 사용 가능하다는 걸 읽고 보니,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건축기술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크로폴리스(Ακρόπολη Αθηνών, Acropolis of Athens)에 오르면,
왜 아테네 유적지 혼합 입장권이
"아크로폴리스 패키지 티켓"인지,
왜 아테네하면, 혹은 그리스하면
여기 그림이 나오는지 알 수 있다.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예전에 중고등학교 때 배운 바와 같이
아크로폴리스는
"높은 곳"이라는 뜻의 ἄκρον [akron]과
"도시"란 의미의 πόλις [polis]가 합쳐진 표현으로,
아테네 가장 중앙에 자리잡고 있고,
실제로 그런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아테네에서 가장 높은 곳이 아닌가 싶다.
주변에 아크로폴리스보다 높은 건물이 없다.
아크로폴리스를 언덕 밑 도시가 둘러싸고,
또 그 도시를 멀리 높은 산이 둘러싸고 있는 형상이다.
그런데 아크로폴리스 위 건축물은
다들 큼직해서 올려다봐야하니,
건축물이 다 하늘에 그냥 떠 있는 것 같다.
물리적 높이가 심리적, 영적인 높이로 연결되니,
왜 여기에
신전이 만들어졌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높이뿐 아니라 건축물 자체도 정말 근사하다.
2014년 1월에는 보수공사 중이어서
말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건물이 다들 너무 아름답다.
입구부터 심상치 않다.
아크로폴리스의 입구의 문은 특별히
프로필라이아(propylea, Προπύλαια)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많은 서양건축에 영향을 준 건축이라고 한다.
아크로폴리스는 이렇게 생겼는데,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뭐니뭐니해도 중앙의
파르테논(Παρθενώνας, Parthenon) 신전이다.
파르테논은 아테네의 수호신인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
(로마신화의 미네르바)를 모시던 신전이다.
BC 5C에 건설되었는데,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이후
AD 6C부터는 성모마리아에 봉헌된 교회가 되어,
기둥에 그리스도교적 문구가 새겨지기도 하고,
몇몇 그리스 신들의 조각들은 파괴되기도 했다.
아마 지금처럼 고전적 예술품으로 생각하지 않고,
이교적 잡신을 숭배하는 동상이라고 여겼나보다.
15C 그리스가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을 때는
이슬람사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 이후 1970년대에 복원되었는데,
사진에서만 보던 파르테논 신전은
실물이 그 명성 그대로다.
아니 원본이라 좀 더 감동적이었다.
파르테논 북쪽엔
에레테이온(Erechtheion, Ἐρέχθειον)이 있다.
아테나와 포세이돈(로마신화의 넵투누스)을
기리는 신전으로 BC 5C에 만들어졌다.
비잔틴 시대에는 역시 교회로,
오스만지배 시기엔 하렘으로 사용되었단다.
아마도 한쪽 기둥에 있는
여자들의 조각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아크로폴리스는 그냥 이런 돌바닥인데,
이날은 비가 많이는 오지 않았지만
조금씩 흩뿌리는 날씨라
바닥에 물이 고였다.
아크로폴리스 동쪽엔 그리스 깃발이 꽂혀있었다.
아크로폴리스는 건축도 건축이려니와
높은 곳에 있으니
전망이 아주 좋다.
아테네 시내가 한 눈에 다 들여다보이는데,
비가 조금씩 오고 흐린 날이었지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치가 장관이다.
그래서 한번 올라가니 내려오고 싶지가 않았다.
여기서 찍고 저기서 찍고
계속 사진을 찍어댔다.
거기서 내사진도 기념으로 남기고 싶었는데,
다른 사람한테 찍어달라고 부탁하기
쑥스럽기도 하고 해서
(한국에서 잘 못하는 건 역시나 여기서도 못한다.)
셀카로만 찍었다.
그랬더니
계속 얼굴 크기가 똑같고,
구도도 비슷하고,
표정도 거의 비슷하다.
그 때는 그런 기념사진 못 찍은 게 좀 아쉬웠는데,
지금보니,
뭐 셀카도 괜찮다.
아무튼 뭔가 좀 더 오래 있고 싶은 곳이었는데,
비가 조금씩 내려 바닥이 젖어서,
마땅히 앉아 있을 곳도 없고 해서,
그냥 아쉬운 마음을 안고 내려왔다.
찬찬히 둘러보며, 천천히 조심조심 내려오다
돌계단 사이에 풀이 난 걸 발견했다.
도대체 얜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걸까?
나오는 길이 영어와 그리스어로 적혀 있는데,
그리스 문자를 떠듬떠듬 읽어보니
"엑소도스"다.
(그리스어는 배운 적 없는데,
키릴문자랑 비슷해서 대충 읽을 줄은 안다)
역시나 그리스어는
일상용어도 뭔가 거창한 느낌이다.
아무튼 그렇게
입장권 내고 들어가야하는 곳 두 곳,
즉, 디오니소스 극장과 아크로폴리스를 둘러보니
5시가 거즘 다 되었다.
그리고 이제 해는 조금씩 져가고
워낙 여기는 5시 이후에 입장할 수 있는
관광지가 거의 없고,
내 손엔
아직 5군데를 더 입장할 수 있는 티켓이 있지만,
그냥 집에 가야 됐다.
하지만 관광지는 입장을 못해도,
관광지 밖을,
그냥 거리를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아크로폴리스 아래쪽 길에는,
무언가 작은 것들을 길에 놓고 판다.
내가 사진을 찍은 걸 보니,
여긴 아마 이렇게 해놓고 주인이 어디 갔나보다.
여긴 뭔가 다른 걸 판다.
정교회성당도 있고,
그냥 주택가도 있고,
상가도 있는데,
뭔가 익숙하면서도 또 이국적이다.
거리를 구경하며 걷다보니,
친근한 이름의
신타그마 지하철역까지왔다.
마침 거기 그리스 의회 앞
"무명용사의 무덤" 앞에서
근위병들이 교대식을 해서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나도 옆에 서서 구경했다.
다음날은 날씨가 좀 더 맑았는데,
낮에 지나가다보니,
또 교대식을 하고 있었다.
한쪽에선 시위도 하고 있다.
지도를 보니
신타그마역에서 오모니아 역까지 오는 길에
무슨 학술아카데미며,
아테네대학이며 하는 건물들이
관광명소로 표시되어 있길래,
바쁜 일도 없으니
그냥 걸어서 천천히 가기로했다.
아, 근데
거기까지 겨우 20분 정도 밖에 안 걸린다.
무지 가까운 거리였구나.
그럼 내 숙소에서 아크로폴리스까지도
40분이면 걸어가는 거리라는 뜻 아닌가?
그 다음 날부터는 그냥
슬슬 걸어서 돌아다녀야겠다 생각했다.
내가 머물던 숙소가
특별히 시내에 있었던 건 아니고,
아테네는 관광지가 몰려 있어,
대체로 걸어다닐만하다.
단,
여기는 관광명소들이 일찍 문닫으니까
일찍부터 움직이기 시작해야한다.
오모니아 역 근처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음식도 맛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흔히 아메리카노라고 하는
좀 연하고 양 많은 커피가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filter coffee라고 했다)
다른 유럽에선 대체로 에스프레소를 많이 마시고,
"아메리카노"가 있는 카페에서도
한국 아메리카노보다 좀 진하고 양이 적은 편인데,
양 많고 연한 커피에 대한 갈증을
그리스에 가서 해소했다.
보통 그리스사람들은 진한 커피에
물을 조금씩 곁들여서,
우리가 흔히 터키식 커피라고 하는 걸 마신다.
(물론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식 커피라고 부른다.)
그래서 그리스에선 카페에 가거나 식당에 가면,
우리처럼 물은 그냥 공짜로 주는데,
그 물도 맑고 맛있다.
밤에 비가 내리길래 좀 걱정했는데,
그 다음날은 맑았다.
뭔가 내가 그리스 가기 전에 상상했던 것과 같은
그런 "그리스적인" 따뜻하고 맑은 겨울 날씨였다.
이래서 그리스에서 일찍이 문명이 태동했나보다..
산도 있고 바다도 있고,
날씨도 좋고, 기온도 적절하고,
물 좋고,
맛난 음식 할 수 있는 신선한 재료도 많이 나고,
기본적으로 먹고 살기가 좋다.
기본적인 게 충족되니,
철학도 하고, 토론도 하고
허구의 이야기도 지어내고 그럴 여유가 생겼을거다.
그리고 그런 환경이라 그런지
사람들도 대체로 친절하다.
그리스 오기 잘 한 것 같다.
그리스 놀러오라고 한 지인 ㅎ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