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roga Jan 20. 2021

호수, 섬, 성 그리고 마을, 블레드(Bled)

눈부신 율리안 알프스에 둘러싸인 슬로베니아 관광명소


1. 모르스키에 오코 vs. 블레드

율리안 알프스에 안겨 섬을 품은 호수, 블레드

슬로베니아의 블레드 호수를 가기 전까지

내가 가본 호수 중에

가장 아름다운 호수는

폴란드 자코파네(Zakopane)

모르스키에 오코(Morskie oko)였다.



(1)

경사진 산길을 2-3시간 걸어 올라가서,

오래 기다렸다 힘들게 만난 호수이기도 했고,


(2)

한 여름에 만난,

더위를 쫓아내는 차가운 얼음물이기도 했고,


(3)

주변에 인공물이라곤,

이제 흡사 자연같이 느껴지기까지 하는,

최소 수십 년 혹은 수백 년까지 되어 보이는,

오래된 목조건물 카페 하나 달랑 있는,

인간의 흔적이 최소화된

"진짜 자연"이기도 했고,


(4)

그리고 물이 너무 맑아서 

여행에 지친 두발을 담그기에도 송구스러운

그런 깨끗한 호수였다.


모르스키에 오코보다 훨씬 유명한,

슬로베니아의 블레드 호수를 가면서,

나는 블레드가 모르스키에 오코보다

훨씬 훨씬 더 아름다울 거라 잔뜩 기대했었다.


그런데 막상 직접 가보니,

유명세가 실력과 꼭 비례하는 건 아니라서,


자코파네가 있는 카르파티아 산맥보다

블레드가 있는 율리안 알프스 산맥이

산맥과 그 풍경만 보면 훨씬 아름답긴 하지만,


호수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내 눈엔 블레드 호수보다

모르스키에 오코 호수가 훨씬 훨씬 아름다웠다.




블레드 호수


(1)

버스에서 내려 5분 정도 걸으면 만날 수 있는,

"쉬운 호수"라,

기다림, 반가움, 성취감이 별로 없었고,


(2)

좀 서늘한 초봄에 가서

발은커녕 손도 안 담가봤으니,

물이 차가운지 아닌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추운 날씨에 차가워도 별로 안 좋았을 거고,


(3)

산 위에는 성,

호수 가운데 섬에는 성당도 있고,

주변에는 숙박시설과 카페가 즐비한,

뭔가 인공적인 것들로 가득한 관광지이고,


(4)

비가 와서 그런지,

호수의 물은 멀리서 보면

그 흐린 하늘을 닮은 회색이고,

가까이서 봐도 탁했다.


하지만 또 다녀온 지 한참 후에 생각해보니,

그리고 사진을 다시 꺼내보니,

뭐 좋았던 기억도 슬슬 올라온다.


아무튼 이렇게 인트로에서 기대치를 쭈욱 낮추고,

마음을 비운 후,

오랜만에 블레드 호수 근처를

가볍게 다시 산책해볼까 한다.




2. 블레드 가는 길


블레드(Bled)는 호수 이름이기도 하면서,

또 마을 이름이기도 하다.


아래 슬로베니아 지도에서 왼쪽 상단,

즉 북서쪽에 파란색 밑줄로 표시한

소도시/마을이 블레드(Bled)다.


지도에서 보이듯이

Triglav, Vogel, Krvavec라는

세 개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율리안 알프스에 자리 잡고 있다.


https://www.lonelyplanet.com/maps/europe/slovenia/


수도 류블랴나에서 블레드까지


버스로는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되고,

(보통은 한 시간에 한 대꼴,

여름엔 한 시간에 두 대꼴로 있단다)

비용은 왕복 13유로 정도,


기차로는 1시간 40분 정도 걸리고,

14-17유로 정도다.


기차는 더 오래 걸리고 더 비싼 데다가,

중간에 한번 갈아타야 한단다.


나는 류블랴나 버스터미널에 가서 표를 샀는데,

인터넷으로도 예매가 가능하다.


그런데 2018년엔 없다가 2019년부터 생긴 건지,

아님 원래 있던 건데 내가 몰랐던 건지,


버스터미널에서 티켓 직접 살 때,

블레드 "성"이랑 "섬" 입장권 포함하는 통합표

할인된 가격에 함께 살 수 있다고 하니,


극성수기가 아니면,

인터넷 예매를 하기보다

류블랴나 버스터미널에서 표를 사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관광 비수기인 2018년 3월 말에 갔을 때,

나는

류블랴나에서 아침 8시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가서,

저녁 5시 30분 블레드 출발 막차를 타고 돌아왔다.


성수기엔

좀 더 늦은 시간에도 버스가 다닐 것 같다.




아무튼 왕복 티켓을 사면,

가는 버스 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돌아오는 버스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아서,

오는 시간은 자기가 알아서 결정하면 되는데,


(그 옆동네인 크로아티아, 세르비아도

버스터미널에선 항상 그랬다)


오후 5시 30분 출발하는

마지막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결국 줄 선 사람 모두가 버스를 타지는 못했다.


차장이 마지막 자리가 하나 남았다고 했을 때,

마침 버스에 탈 순서였던 내 바로 앞사람들이 

일행이 2명이라,

내가 운 좋게 마지막으로 버스에 올랐는데,


그때 못 탄 두 사람을 비롯한,

남은 사람 수십 명은 다른 버스를 탔는지,

기차를 탔는지,

아님 거기서 하룻밤 머물렀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마지막 버스를 놓치지 않고 타려면,

좀 일찍 버스터미널에 가서 줄을 서야 할 것 같다.




3. “마을” 블레드


"마을" 블레드는 아래 지도처럼 생겼다.


시외버스에서 내려서,

아래 지도에서 호수 위쪽 8번 근처에 있는

버스터미널에서 5분 정도 걸으면,

바로 "호수" 블레드가 보인다.


호수 바로 위 7번이 "성" 블레드이고,

호수 안의 2번이 "섬" 블레이드다.


http://www.orangesmile.com/travelguide/bled/high-resolution-maps.htm


"마을" 블레드

독일식 명칭 Veldes로

1004년에 처음 문서에 언급되었을 정도로

오래된 마을이다.


Bled라는 이름이 어디에서 나온 건지

어원이 검색이 안되는데,


만약 슬라브어에서 온 것이라면,


'늪지'를 의미하는 러시아어 болото[볼로토],

불가리아어 блато [블라토],

폴란드어  błoto [브워토],

'진흙'을 의미하는 체코어 bláto[블라토],

세르비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어 blato 등과

어원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b,l,d/t가 들어 있어 형태적으로도 유사하고

'축축한 땅', '물기' 같은 의미적 공통성이 느껴진다.


다른 -bl-이 들어간 슬라브어 중에

bled와 의미적으로 연관된 단어는 생각이 안 난다.


블레드는 오랫동안 귀족과 주교들의 사유지였는데,

19세기 말 

일반인에게 그 아름다움이 알려지게 되고,

근처에 온천도 있어

관광지로서의 가치가 높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철도도 놓고,

찻길도 놓고,

전기도 들여오고,

호텔도 지었다고 한다.


덕분에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버스에서 조금만 걷기 노동을 하면,

쉽게 블레드 호수와 만나게 되는 건 좋지만,


다른 한편으로,

카페, 상점, 호텔 같은 현대문명의 흔적이

두텁게 겹겹이 있어서,

호수 주변, 특히 남동쪽이

너무 "관광지 풍경"인 건 좀 아쉽다.


19세기식 건축들이기만 했어도

좀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을 텐데,

너무 20세기적이라 더 상업적인 인상이다.


뭐 이런 느낌이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마을” 블레드 버스터미널에 있는

여행안내센터에서

지도도 얻고,

여행정보도 상담받을 수 있는데,


그 주변 산을 트래킹 할 게 아니라,

그냥 호수 주변만 걸을 거라면,

당일치기 관광객에게는

지도며 여행정보가 별로 필요 없다.


"호수" 블레드의 관문인

"마을" 블레드뿐 아니라,

"성" 블레드며,

“섬” 블레드"며,


당일치기 관광객에게 필요한 모든 것

“호수” 블레드 근처에 옹기종기 자리 잡고 있다.




4. “호수” 블레드


호수 “블레드”(Blejsko jezero)

빙하가 녹으면서 생성된

빙하호(glacial lake)다.


관광객으로 방문한 유럽 호수는

대부분 빙하호였다.


면적이 1.45 평방킬로미터라서,

크기는

폴란드 모르스키에 오코,

잠실 석촌호수,

일산 호수공원의 호수보다 5배 정도는 더 큰데,  


둘레는 그 정도로 길지 않은지,


호수 둘레를 걷는데 걸리는 시간

비교적 짧아서,

1-2시간 걸렸던 걸로 기억한다.


호숫가 산책의 시작은 마을 입구인

호수 동쪽에서부터 시작했고,

왼쪽, 즉 시계 방향으로 걸었다.


호수 동쪽에서 호수를 바라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호수 가운데에 있는 블레드 섬이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관광지답게"

기념사진 찍는 포토스팟도 있고,


(2018년 3월, Bled, Slovenia)


호수 주변 모형도 있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역시나 관광업과 관련된 듯한 목조 수상 가옥과


(2018년 3월, Bled, Slovenia)


호숫가에서 금지되는 활동을 알리는

안내 표지판도 서 있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동영상1: 블레드 호수 동쪽에서 본 풍경)

(2018년 3월, Bled, Slovenia)


호수 북쪽으로는

언덕 위 블레드 성이 보이고,

그 아래 성 마르티노 성당 (St. Martin's Church, Cerkev svetega Martina)이 눈에 들어온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세기 초 높은 첨탑의 신고딕양식으로 재건축된

성 마르티노 성당

블레드 주민을 위한 교구 성당으로,

이 자리에는 1000여년 전부터

가톨릭 성당이 있었다고 한다.


보수적인 종교 건축이지만,

그래도 현대 건축답게

내부에는 대리석과 플라스틱으로 만든 장식이 있고,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

블라디미르 레닌으로 묘사한

최후의 만찬 프레스코도 있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찾은

아래 그림 가장 왼쪽에 등을 돌린 사람이

그 “레닌” 모습을 한 유다다.


(출처: interior fresco. - Picture of St. Martin's Parish Church, Bled - Tripadvisor)


이 프레스코는 1930년대 작품이라는데,

어떻게 공산 유고슬라비아 시절을 무사히 넘기고

아직까지 남아 있는지 신기하다.


이 성당은 관광객을 위한 공간이 아니어서 그런지,

아님 개방 시간이 따로 있는지,

내가 갔을 때는 성당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냥 호수 북쪽 풍경을 멀리 보면서

호수 남쪽으로 걸어갔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동영상 2: 블레드 호수 남쪽에서 본 풍경)

(2018년 3월, Bled, Slovenia)


남쪽 산책로 옆엔 2차선 도로가 있는데,

그 길을 따라 걷다가

어떤 터널을 지나면,

이제 호수 서쪽에 도착한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이제 블레드 섬이 가까이 보인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서쪽 호수변 중간쯤에 목조건물 카페가 있는데,

빗속을 걸었더니 좀 춥기도 하고,

좀 쉬고도 싶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블레드 한 호텔에서 발명하여,

"블레드(Bled)가 원조라는"

크렘슈니타(kremšnita)라는 케이크도

이 카페에서도 맛볼 수 있다.


크렘슈니타는

이렇게 두터운 바닐라 크림이 들어있는 케이크이고,

커피는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그리스, 오스트리아 등등의 인근 지역과 마찬가지로

물 한 컵과 함께 나온다.


이 인근 지역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따로 또는 섞어서 마시며

커피잔을 앞에 두고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다.


그래서 그런지 서빙도 천천히,

치우는 것도 천천히 하는 이 동네 카페에선

혼자 가도 커피 마시는 게 좀 더 여유가 있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그런데 난 좀 의아했던 게,

내가 슬로베니아 가기 전,

크로아티아에서도 크렘슈니타를 먹어봤는데,


크로아티아에서는 크렘슈니타의 원조가

크로아티아 근교 사모보르(Samobor)라고 했었다.


슬로베니아 블레드에 가기 전

2018년 3월에 사모보르에 갔을 때 먹었던

크로아티아 "원조" 크렘슈니타는 이렇게 생겼다.


크림은 바닐라 크림이 아니라

커스터드 크림이고,

크림 밑에는 빵이 아예 거의 없다.


(2018년 3월, Samobor, Croatia)


도대체 어디가 진짜 원조인가 싶어 검색해보니,

크렘슈니타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단다.


하나 분명한 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1867-1918)의 영토였던

여러 국가들에서 널리 사랑받아 온,

각자 조금씩 다른 버전과 다양한 이름을 가진,

크림이 듬뿍 들어간 케이크라는 거다.


아무튼 블레드사모보르를 가면,

진한 커피와 함께

"나름 원조" 크렘슈니타를 맛볼 것을 추천한다.


달고 좀 느끼해서 많이는 먹기 힘들지만,

한번 정도는 경험해볼 만한 맛이다.


특히나 블레드 호수를 반쯤 걸어서 돌았을 때나,

사모보르 산에 올라갔다 내려온 다음에는

더 맛있을 거다.


(크로아티아식 크렘슈니타는

근교 사모보르까지 가지 않더라도

수도 자그레브에서도 쉽게 맛볼 수 있다.)


아무튼 그렇게 호수 서쪽 카페에서

현지인들처럼 시간을 두고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

몸도 데우고,

당분도 보충하고 나서,

다시 호수 북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카페에 들어가기 전에 걸은

블레드 호수 남쪽 산책로는

2차선 도로가 주연이고,

산책로가 조연 같았는데,


블레드 호수 북쪽 산책로는 산책로가 주연이다.


그래서 좀 더 걷기 좋고, 

볼거리도 좀 더 있다.


중간에 이런 길거리 예배당도 있고,


(2018년 3월, Bled, Slovenia)


백조도 보이고,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다양한 조각상과 설치물도 보인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블레드 "섬(island)"은 이제 점점 멀어진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대신 블레드 "성(castle)"에 점점 가까워지면,

미지의 목조 건물이 하나 나타난다.


"황금 뿔"이라는 의미의

 Zlatorog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고,

(난 슬로베니아어는 배운 적이 없지만,

다른 슬라브어를 알면 이해할 수 있는 단어였다).

황금 뿔 달린 유니콘 조각이 있는데,

뭐 하는 덴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전통 가옥을 테마로 한 호텔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구글 지도에는 그냥 “사무실”이라고 나온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그렇게 걷다가 호수 건너편이

호수의 남쪽에서 서쪽이 되면,

다시 산책 출발점에 도달한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그렇게 호수를 한 번 돌고 나서,

블레드 성에 올라갔다 온 후,

 

시간이 좀 남았길래,


그리고 딱히 뭐 달리 할 일도 없길래,


한번 더,

이번에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았다.


중간에 블레드 성에 올라갔을 때부터

날이 좀 개는 것 같더니,


호수 두 번째 산책하기를 끝냈을 즈음에

비가 완전히 그치고,

햇볕이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하며,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아 정말

이제 집에 갈 때가 다 되니까,

왜 이러냐구요?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5. “섬” 블레드


블레드 섬(Blejski otok)은


블레드 성과 더불어

블레드에서 가장 중요한 관광명소이고,


호수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이 섬은

호숫가 어디를 가든지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이리 오라고 손짓한다.


심지어 첫 번째 산책 중에

갑자기 빗속에서 해가 뜨더니,

무지개가 생겼는데,

그것도 이 섬 바로 옆에 생겼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동영상 3: 블레드 섬 무지개)

(2018년 3월, Bled, Slovenia)


프란체 프레셰렌(France Prešeren)이라는

슬로베니아 국민 시인이


슬로베니아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즈음의

블레드 섬을 배경으로

"사비차의 세례(Krst pri Savici)"라는

서사시를 썼다.


그 작품 속 블레드 섬에는

지바(Živa)라는

생명과 비옥함의 여신의 사원이 있었고,

그 사원을 지키는 보고밀라(Bogomila)라는 여인은

결국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만,

점점 세가 커지는 그리스도교도에 맞서 싸웠던

츠르토미르(Črtomir)란 남자를 사랑했단 얘기다.


(Živ-는 슬라브어에서 "생명"이라는 의미고,

bog는 신, mil-은 사랑이라,

"보고밀라"는 "신을 사랑하는 사람",

črt는 미움, 증오, mir는 평화, 세계라,

"츠르토미르"는 "평화에 대한 증오"라는 의미다.)


수도 류블랴나의 프레셰렌 광장에 서 있는

프레셰렌 동상 왼쪽에 새겨진 그림,

즉 아래 사진에서 보이는 동상 아래 부조가

이 이야기라고 한다.


(2018년 3-4월, Ljubljana, Slovenia)
(2018년 3-4월, Ljubljana, Slovenia)


슬로베니아의 그리스도교 역사를 찾아봤는데,


슬로베니아는 7세기 

슬라브국가 중에서는 가장 먼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지만,

(다른 슬라브국가들은 

9세기 이후에 국교로 받아들였다.)

그것이 타민족의 주도로 이뤄져서 그랬는지

8세기 후반 내부적으로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큰 저항이 있었단다.


그런 역사적 사실에 기반해서

19C 민족주의 시대 

슬로베니아 민족 시인 프레셰렌이

낭만주의 서사시를 창작했나 보다.


그래서

보고밀라와 츠르토미르는 가상의 인물이고,

그들의 종교적 대립 상황도 허구지만,


나중에 고고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정말로 블레드 섬에는

그리스도교 유입 이전에

아마도 슬라브 토속 신앙과 관련된 곳이었을

사원이 존재했다고 한다.


프레셰렌이 그 서사시를 쓸 당시,

그리고 현재는 가톨릭 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성모승천성당(The Church of the Assumption of Mary, Cerkev Marijinega vnebovzetja)은

17세기에 세워진 바로크 건축이지만,

아마 그 자리엔 그 이전부터 오랫동안

가톨릭 성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의 오래된 성당들은 보통 그렇다.)


성당 입구에는 99개의 계단이 있는데,

여기에서 결혼한 신랑이 신부를 안고

이 계단을 올라가

성당 종을 울리고

성당 안에서 소원을 비는 오래된 풍습이 있다.


꼭 신랑 신부가 아니더라도,

이 성당의 종은

"소원을 이뤄준다는" 속설이 있어,

관광객들의 인기 방문지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동영상 4: 블레드 호수 남쪽에서 본 풍경)

(2018년 3월, Bled, Slovenia)


블레드 섬과 성모승천 성당은 악천후 때를 제외하고

매일 일반에게 개방된다.


검색해보니,

블레드 섬과 성모승천성당의 개방 시간은

2019년 현재

11월-3월(비수기): 오전 9시-오후 4시,

4월, 10월: 오전 9시-오후 6시

5월-9월(성수기): 오전 9시-오후 7시.


입장권은 성당 기념품 샵에서 판매하는데,

성인 6 €,

학생 4 €,

어린이 children 1 €

가족 12 €란다.


나는 이 성당의 공식 사이트를 발견하지 못했는데,

블레드 버스터미널의 관광안내소에 문의하면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블레드 섬에 가는 방법은

배를 이용하는 것밖에 없다.


내가 블레드에 간 날은

비가 세차게 내리고 바람도 불어서

그 속을 걷는 것만으로도 벅찬 날씨였고,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호수가 얼마나 깊은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배가 안전해 보이지 않아,

비 오는 날에 배 타는 게 내키지도 않고,


(이게 두 번째 중요한 이유.

2018년 여러 번 큰 배를 타면서 괜찮아졌지만,

이때는 아직 세월호가 가라앉는 걸

생방송 시청한 트라우마를 극복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어디서 표를 사는지도 잘 모르겠고,


아무튼 그런 것들을 하기 위해,

폭우 속에서 우비를 벗고

배낭을 벗어 무언가를 꺼내고,

또 집어넣고 하는 게 모두 귀찮게 느껴져서,


나는

블레드 섬에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계속 마음에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래도 선뜻 발이 안 떨어졌다.


근데 그 비가 세차게 오는 와중에도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비가 많이 와서 선명하게 찍히지도 않은

아래 사진 아래 파란색 물체가 바로 그 배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동영상 5: 블레드 섬과 배)

(2018년 3월, Bled, Slovenia)


블레드 섬까지 운행하는 배에는 3가지가 있단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나도 그때 그렇게 3 종류의 배를 본 것 같다.


첫째는 위 사진에 천 지붕이 달린

곤돌라 같이 생긴 플레트나(pletna)라는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블레드의 수상운송수단이고,


20명 정원에

20분에 한 대씩 운행하고,

2020년 현재 왕복 €14이고,

다시 돌아오는 배를 타기 전까지

30분 동안 성당을 둘러볼 여유 시간을 준단다.


또 다른 하나는 배를 빌려서 노를 저어 가는 거다.

이건 좀 저렴해서 1시간 동안 빌리는 비용이

2019년 현재 3인용 약 €15,

5인용 약 €20란다.


마지막 하나는 서사시의 주인공의 이름을 딴

츠르토미르(Črtomir)라는 모터보트를 타는 거다.

2020년 현재 왕복 €12.


배에 대한 정보도 역시

정확한 내용은 현지에서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다.




6. “성” 블레드


블레드 성(Blejski grad)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성으로,

마을 블레드와 마찬가지로

11세기 초에 처음 역사에서 언급되었다고 한다.


현재 성의 대부분은 르네상스 시대(14-16C)에

지어진 것인데,


성 들어가는 입구의 벽은 그보다 좀 더 오래된

중세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10-12C)이라고 한다.


시기를 언뜻 계산해 보면,

역사에 첫 언급되었던 그 성의 일부가

1000년이 지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웅장한 고딕식 성벽처럼

감탄이 나오게 멋진 외관이나

도전을 자극하는 엄청난 규모는 아니고,


내부 박물관도 재미있긴 했지만,

다른 유럽의 성들과 다른

특별한 차이는 없었던 것 같다.


단, 높은 곳에 있어서,

블레드 호수가 한눈에 다 보이니,

그건 정말 좋았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성이 높은 언덕 위에 있다 보니,

블레드 호수 동북쪽에 난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걷기 어려운 길은 아니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계단이 끝나고,

이제 아래같이 생긴 오래된 성벽 입구를 통과하면,

매표소가 보인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블레드 성의 입장 시간은

10:00 - 18:00 (목요일은 20:00).


2021년 현재 입장료는

일반 €13, 학생 €8.5, 14세 이하 €5.


그래도 정확한 정보는 블레드 성 홈페이지에서

미리 확인하는 게 낫겠다.


건축 문외한인 내 눈에 유럽 성은 다 비슷비슷해서

겉만 쓰윽 보고

입장은 안 하는 경우도 많은데,


블레드 "섬(island)"을 건너뛰고 나니,

블레드 "성(castle)"까지 안 들어가면,

블레드 가서 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성 안에는 들어가기로 했다.


성에 안 들어가고

그냥 성 입구까지 난 계단만 다 올라가도

멋진 전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하지만 성 안으로 들어가면,

시야가 더 넓어져,

더 멀리, 더 많이 보인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한 화면에 호수가 다 안 잡혀서 끊어서 찍었다.

물론 이것도 호수 전체는 아니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그래서 동영상도 찍었다.


하지만 역시나 이 또한

실물의 규모나 아름다움,

그리고 바람의 촉감과 풋풋한 냄새,

그리고 자유의 느낌 같은 걸 담을 순 없다.


그래서 우리가 굳이 먼 길로 여행을 나서나 보다.


(동영상 5: 블레드 성에서 내려다본 블레드 호수)

(2018년 3월, Bled, Slovenia)


성 안에서 생활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식수가 필요하니까,

유럽의 성 안에는 어김없이 우물이 있다.


블레드 성 우물 옆에

그 밖의 다른 물건들은 뭔지 모르겠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이건 성 안에 있는 메인 건물로

입장권으로 이 건물 안 박물관에 입장할 수 있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박물관에서도 창밖으로 멋진 풍경이 보인다.


여기는 블레드 성의 서북쪽 풍경.


(2018년 3월, Bled, Slovenia)

이건 동북쪽 성안.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성의 내부장식도 아름답다.

하지만 작아서 둘러보는 데 오래 걸리진 않는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그 박물관을 다 둘러보면

이제 별채의 성벽 통로로 간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별채의 좁고 긴 성벽 통로에서는

블레드의 북쪽 풍경을 볼 수 있는데,


바람도 시원하고,

멀리 구름에 많이 가려있긴 해도,

그림 같은 율리안 알프스 산에

눈은 즐겁고 마음은 행복하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그 성벽 끝에 있는 원통형 탑에 가면

파노라마 영상이 펼쳐진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동영상 6: 블레드 성 박물관의 탑)

(2018년 3월, Bled, Slovenia)


블레드 성이 나쁘진 않았는데,

그래도 뭔가 너무 금방 끝나는 것 같아서,

앉아서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싶어서

성 안에 있는 레스토랑에 갔다.


(성 안의 커피숍은 성수기에만 문을 연다)


빈자리가 많아 보이는데도

예약을 안 했으면 입장할 수 없다고 해서 

아쉬운 마음으로 그냥 성을 나섰다.


비가 조금씩 내리긴 했지만,

그래도 날씨가 많이 좋아져서,

이제 멀리 율리안 알프스 산이 선명해졌다.


(2018년 3월, Bled, Slovenia)
(2018년 3월, Bled, Slovenia)




7. "추억" 블레드


항상 느끼는 바이지만,

단기 여행에서는

날씨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높다.


2018년 상반기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있는 동안

두 번째 떠난 여행

3월 말-4월 초 부활절 연휴 3박 4일로 간

슬로베니아였는데,


2018년 크로아티아 겨울은

이상하게도 늦게 추위가 시작해서,

4월쯤까지도 눈이 내리면서,

겨울이 진짜 늦게 끝났고,


3월 말-4월 초 이웃 슬로베니아 있는 동안에도

전반적으로 날씨가 서늘했고,

초봄이라 아직 해는 짧고 허약했고,

화창한 날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계속 흐리고 비도 내렸다.


그중에서 가장 날씨가 "안 좋았던" 날

블레드(Bled) 갔던 슬로베니아 두 번째 날이었다.


블레드 도착한 아침부터,

렌즈에 물이 들어와 사진도 못 찍을 정도로

한국 장맛비처럼 비가 주룩주룩 내리다가,

좀 그치다가,

조금씩 내리다가 또 그치다가 하다가,

 

돌아가는 버스를 타러 갈려고 할 때쯤에야

겨우 맑은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류블랴나로 돌아오는 버스에서야

실물이라기 하기에 너무 비현실적인, 

활짝 웃는 하늘 밑 "그림 같은" 풍경을 영접했다.


(가장 마지막에 겨우겨우 버스에 오른 나는

복도에 서서 가느라

사진이나 동영상은 못 찍었다.)


인터넷에서 본 블레드 사진들처럼

날씨 좋을 때 갔으면,


적어도 떠나기 1시간 전쯤에만

날씨가 화창해졌어도,


아름다운 풍경을 실물로 영접하고,

인생샷을 남기고,

좋은 기억만 안은 채

꽤 만족스럽게 블레드를 떠났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니, 오히려 나중에 날이 맑아지고,

멀리 보이는 산과 하늘이 만들어내는

근사한 풍경을 보지 못하고,

차라리 계속 흐린 날씨였다면,


나는 빗속을 걷는 것도 좋아하니까,

그걸 "안 좋은 날씨"라고 여기지 않고,


모든 관광객이 경험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특별한",

"비 오는 블레드"의 운치

좋은 추억으로 안고 올 수 있었을 텐데,


젤 끝에 짧게 좋은 버전을 경험하다 보니,

어딘가 있긴 했던 좋은 것을

나 혼자 못 발견하고,

나 혼자 못 누리고 온 것 같은,


운명이 대충 만든 불공정한 하루의 피해자 같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꽁한 마음으로 블레드를 떠났다.


그렇게 괜히 혼자

나 자신의 박복한 하루에 삐친 나에게

블레드는

생각보다 별로인 관광지였다.


그런데 진짜 오랜만에

슬로베니아 여행 이야기를 쓸려고 다시 보니,

사진과 동영상 속 블레드는,

기억 속의 블레드보다

훨씬 많이 괜찮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지금 팬데믹으로

1년 가까이 이동의 자유를

타의로 그리고 자의로 박탈당한 상태로,


언제 다시 국내건 해외건

예전처럼 여행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상황에서

여행사진을 봐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팬데믹을 떠나서 생각하더라도,


내가 지금까지 가 본 호수 중에서

슬로베니아 블레드는 오히려 좋았던 축에 속한다.


그러고 보면,

내가 '블레드는 별로더라'고 생각한 건,

아이러니컬하게도

내가 다른 좋은 것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좀 더 마음에 들었던 다른 호수를 가보지 않았으면,


“호수”만을 목적 삼아 길을 나선 그 특별한 여행이

좋기만 했을 거고,

 

기대하지 않은 "섬"이랑 "성"이라는 보너스가

반갑기만 했을 거다.


그리고 그날 돌아오는 길에

푸른 하늘과 흰머리산이 만들어 내는

근사한 풍경을 보지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비가 왔으면,

내가 아는 유일한 모습인

그 "비 오는 블레드"에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무언가를 조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없음을 감지하고,

아쉬움을 느끼고,


비 오는 블레드 자체에 대해 절대평가를 하기보다,

다른 좀 더 좋은 것과 비교하여

상대평가를 하며 박한 점수를 주게 된 것 같다.




이제 다시 가면

신이 오묘하게 빚어낸

율리안 알프스의 먼 산만 넋 놓고 보지 않고,


가까운 블레드 호수 안에서도,


비가 내려 시야가 맑지 않은 상황에서도,

바람이 많이 불어 걷기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 뭔가 아쉬운 인공적인 풍경 속에서도,

특별한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언제 

그런 기회를 또다시 누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꼭 팬데믹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가 아니라,

유럽의 작은 나라 슬로베니아가

지리적으로 그리고 여정상으로 너무 멀다.


있을 때 제대로 즐길 걸 그랬다.


그런데 혹시 지금 이 순간도

나는

소중한 지금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채,

먼 곳만 바라보며,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만 꿈꾸며,

미래의 후회를 자동예약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해안이 짧다 하여, 바다가 좁을쏘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