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그래서 저는 픽했습니다'를 보고 당당히 아라시 오타쿠 선언!
나도 내가 이 나이에 아이돌 그룹을, 그것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일본의 남자 아이돌을, 심지어 2021년부터 활동을 접는 휴지기를 발표한 그룹을 좋아하게 될 줄 몰랐다.
사건의 발단은 일본어 공부를 하며 찾아보게 된 드라마. 일본에서 무지 인기 있었다는 '도망치는 것은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남자 주인공으로 나온 '호시노 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호시노 겐을 유튜브에 검색하다 보니 '아야노 고'라는 배우가 관련 영상으로 자주 보였고 그 배우의 외모와 스펙트럼 넓은 연기에 흥미가 생겼다. 아야노가 출연한 드라마뿐 아니라 쇼 버라이어티 영상도 찾아보다 보니 그가 '아라시'라는 일본 아이돌 그룹의 광팬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어떤 그룹이길래 아야노가 그렇게 좋아하지?'하고 호기심에 찾아보다 보니 어느새 아라시에 빠진 것. 정리하자면 유튜브 알고리즘 덕에 호시노 겐-> 아야노 고->아라시로 넘어온 셈이다. 이렇게 스멀스멀 고구마 줄기 엮듯이 취향을 엮어내는 유튜브 알고리즘, 대단하다.
아라시에 대한 첫인상은 글쎄. 키 작고, 특출 나게 잘생긴 것도 아닌 것 같고('마츠모토 준' 제외), 가창력이 뛰어난 것도 아닌 것 같고, 음악방송 무대나 콘서트에서의 모습도 한국 아이돌에 비해 뭔가 촌스럽게 느껴졌었다. 근데 이 그룹이 일본에서 20년 이상 멤버가 바뀌지 않고 활동한 장수 아이돌이자, 어린이에서부터 할머니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그룹이라니. 무슨 매력이 있을까 싶어 계속 영상을 보다 보니 이렇게까지 오게 됐다.
'귀엽다'라는 감정은 위험하다. '잘생겼다'거나 '예쁘다' 같은 건, 어느 순간 환상이 깨지는 모습을 보게 되면 그 감정이 수그러들게 되는데, '귀엽다'는 뭘 해도 '귀엽다'는 거다. 한 번 귀엽다고 느껴버리는 순간, 그 사람이 몸개그를 하든 이상한 표정을 짓든 바보 같은 행동을 하든 그 귀여움의 매력이 깊어지는 것일 뿐. 이미 반해버린 나는 남들이 보기에 '저 아저씨 뭐야' 하고 느낄 지점에서 '세상에, 너무 귀엽다..'하고 생각해버리게 되니까.
아라시 멤버 다섯 명의 관계성이 좋다. 10대에 쟈니스에 입소해 트레이닝을 한 기간까지 합치면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다섯 명이서 활동하며 옥신각신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겠지. 누구 하나 특별히 좋다기 보다는 다섯 명의 조화로움이 좋았다. 그리고 드라마에서부터 뉴스 캐스터에 이르기까지 놀랍도록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다는 점도 신선했다. 멤버들이 영화, 드라마, 아라시 정규 예능, 멤버별 정규 예능, 음반 작업, 콘서트 등 전 방위로 다양한 활동을 하며 쏟아낸 영상 덕에 뒤늦게 입덕한 나는 넘쳐나는 자료에 너무도 행복하다.
늦덕으로서 내 머릿속 멤버들의 이미지가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니, 멤버들끼리 알콩달콩 옥신각신 하는 모습에서 오래된 그룹으로서의 애정과 신뢰가 느껴지고 그걸 보며 왠지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달까. 가까운 관계로 일도 같이하면서 2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건 흔하지 않은 거니까, 그 모습을 보여주는 아라시에게서 일종의 판타지를 느끼고 애정을 가지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잠깐 덕심을 담은 멤버 소개!
1) 오노 사토시: 아라시의 리더(가위바위보로 리더가 됐다!)이자 안무를 잘 짜고 노래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는 재능 많은 멤버. 늘 졸려하고 의욕 없어보이는(?) 모습과 다르게 게임이든 연기든 무대든 시작하면 제대로 한다. 운동신경도 좋아서 깜놀! (어릴 때는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고 싶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취업만 되면 쟈니스 사무소를 퇴소하려고 했다고).
2) 사쿠라이 쇼: 아라시 랩 담당으로서 초중고대학까지 게이오 라인을 탄 게이오 보이, 그런 똑똑한 이미지를 살려 뉴스 제로에서 캐스터로 활동하며 아라시 예능에서도 사회 역할을 자주 맡는 멤버(사쿠라이를 기점으로 쟈니스 연습생들도 대학 진학을 하는 케이스가 늘었다고 한다).
3) 아이바 마사키: 팀에서 가장 수다스럽고 리액션이 크고 '천연'(우리 표현으로 하자면 백치미? 멍충미?) 캐릭터이자, 내 눈에 너무너무 착하고 성격 좋은 멤버. 멤버들 중 키가 큰 편이라 마츠준과 함께 모델라인을 맡고 있다. 마사키의 개인 레귤러 ‘아이바 마나부’는 내 힐링 방송.
4) 니노미야 카즈나리: 연기를 잘하고 멤버들에게 츳코미(우리 표현으로 하자면 시비 걸기? 태글 걸기?)를 날리면서 분위기를 살리는 멤버(그리고 무서울 만큼 얼굴이 나이 들지 않은 동안). 집돌이 겜돌이자 현실주의 아이돌로 유명하다. 멤버 중 유일하게 결혼했고, 얼마 전 득녀 했다고 한다.
5) 마츠모토 준: 일단 잘생겼고, 멤버 중 막내지만 프로페셔널한 면을 중시하는(일본 표현으로 '스토이쿠'- stoic) 야망남 스타일 멤버(꽃보다 남자 주인공으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멤버일 듯?)
내가 이 나이에 이렇게 아이돌 영상을 찾아보며 좋아해도 되는 것일까 일말의 양심의 가책이 일 때쯤, 왓챠에서 '그래서 나는 픽했습니다'라는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일본 드라마를 본 이력이 많아 추천 콘텐츠로 올라온 드라마였는데, 썸네일을 본 순간 '아 이건 봐야겠다' 싶었다.
일본의 아이돌 그룹을 보면서 의구심이 든 적이 많았다. 외모가 뛰어나지도, 춤을 잘 추지도, 노래를 잘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가끔은 오히려 너무 촌스럽다는 느낌이 든 적도 있는데) 아이돌로서 활동을 한다. 우리나라 아이돌들의 실력과 외모가 상향평준화되어있다는 것을 감안하고 봐도, 일본 아이돌은 어딘가 모르게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들이 일본에서는 활동을 하고, 많은 응원을 받는다. 일본의 락밴드들이 높은 실력을 갖춘 것과 상반되게 아이돌은 실력이 좀 모자라도 되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는데, 일본에서는 아이돌을 말 그대로 '함께 성장하는 존재'로 본다는 문화가 있다고 한다. 아이돌 중에서도 마이너 아이돌인 '지하 아이돌'(주로 지하의 소극장에서 공연하며 소규모의 팬들과 가깝게 소통하고 성장해 나가는 아이돌)과 그 팬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를 보면서 일본의 아이돌 문화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주인공인 '아이'는 주위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며 지내는 20대 후반 직장인. 친구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은 모습 위주로 본인을 포장해 드러내고, SNS에는 잘 나가는 남자 친구와의 애정이 넘쳐나는 사진들만 올린다. 그러다 남자 친구에게 차이는 바람에 울적하게 지내다가 휴대폰을 잃어버리는데, 마침 그 휴대폰을 주운 사람을 만나러 간 장소가 '서니 사이드업'이라는 지하 아이돌이 공연하는 곳이었던 것.
‘아이'는 멍하니 서니 사이드업 다섯 소녀들의 공연을 보다가, 유난히 춤도 노래도 끼도 별로인 '하나'라는 멤버에게 괜히 화풀이를 해버린다. 이후 다시 찾은 공연장에서 여전히 소심하지만 나아지고자 노력하는 '하나'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아이'는 '하나'를 전력적으로 응원하며 그녀의 오타쿠를 자처한다. 항상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노심초사 신경 쓰던 '아이'가 '하나'이름이 써진 티셔츠를 입고 쇼핑몰 공연을 응원하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이 고민했을까. 그것도 지하 아이돌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친구들을 뿌리치고 말이다.
지하 아이돌이라는 소재도 독특했지만, 무엇보다 결핍을 느낀 사람이 자신보다 여리고 약한 존재를 지켜주리라 마음먹는 과정이 인상 깊었다. 누군가는 '그거 그냥 오타쿠잖아'라고 생각할 수 있는 전개지만, 현실감을 제쳐두고서 누군가와의 관계에 한 번이라도 과몰입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눈시울이 붉어질 드라마다. 나의 '원픽'이 지금은 보잘것없어도 주눅 들지 않았으면 좋겠고, 실력이 더욱 늘었으면 좋겠고, 조금 더 단단해졌으면 좋겠고,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으면 좋겠다는 감정. 이 사람을 위해 내가 부단히 노력해서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감정.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지면 멘탈이 나가서 배신감에 치를 떨다가도 마음 한구석에선 그럼에도 믿어주고 싶고 아니라고 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
이 드라마는 단순히 아이돌-팬의 관계를 넘어서,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마음을 열고 의지하고 성장해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인기 없었던 '하나'가 덜덜 떨리는 손을 '아이'에게 손 내밀며 악수를 청할 때, 그 손을 소중하게 마주 잡은 '아이'가 느꼈을 감정. 그건 내 옆에 둘 수 없을 누군가를 열심히 좋아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 수 있는 감정이니까.
그래서 나는 오타쿠라고 당당히 이야기하고 다니기로 했다. 거칠거칠 메마른 생활 속에서, 단비를 뿌려주는 덕질을 은근히 이어나가면서. 지금 지칠 때 나를 웃게 하는 것은 아라시니까!
*사진 출처 : 도라마 코리아 블로그, 왓챠, 아라시 인스타그램, 더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