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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Feb 28. 2021

당신은 석양에 녹고, 나는 새벽녘에 사라져서

 요즘 들어 부쩍 일본 노래들을 많이 듣는다. 일본어 공부를 열심히 해보겠다는 생각 때문이지만, 이상하게도 일본 노래를 들을 때 마음에 사무치게 와 닿는 경우가 많다.


 나는 정치나 외교적인 측면에서 보면 확실히 일본을 싫어한다.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일어났을 때 적극적으로 동조했고, 우리나라를 식민 지배했던 제국주의 시대의 일본은 극도로 혐오한다. 하지만 일본 음악을 듣고 드라마를 보며 추억을 그리는 내 모습을 깨달을 때면 이 지독하게 모순되는 양가감정은 뭘까 하는 고민에 빠져든다. 싫은데 좋다. 스스로도 정리되지 않는 마음에게 물어물어 도달한 곳은 첫사랑의 기억이다. 일본 노래와 도쿄는 내게 첫사랑의 기억과 겹쳐있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을 잊을 수 없다.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그때, 나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그 애에게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 연결은 당연히 되지 않았다. 후쿠시마는 물론 도쿄 일대의 통신시설까지 지진으로 파괴되었을 테니. 워킹 홀리데이로 도쿄 인근의 료칸에서 일하고 있던 그 애가 처참하게 무너진 목조 건물 아래 깔린 모습이 상상되기 시작했다. 집요하게 기억을 더듬어 그 애가 일하는 료칸의 이름을 생각해 냈고 구글링을 시작했다.


 이름과 주소가 일치하는 료칸이 한 군데 나왔다.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며 회사 화장실로 숨어 들어갔다. 눈물이 나오려고 해서 가장 안쪽 칸에 숨어 조마조마하게 누군가 전화를 받아주길 간절히 바랐다. 이마까지 뜨겁게 열이 올랐다. 몇 번의 신호가 간 끝에 더없이 친절한 목소리의 여자분이 전화를 받았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다짜고짜 그 여자분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일본 내에서도 지진의 상황이 다 퍼져 있었기에 직원분은 앞뒤 잘라먹은 내 질문의 의미를 알아차렸고, 아주 정중한 말투로 료칸도 료칸의 사람들도 모두 무사하다고 했다.


 무사하다. 그 한 마디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료칸의 이름을 한번 더 확인하고 그 애의 이름을 대며 이런 사람이 료칸에서 일하고 있는지 물었다. '아, L상 말이군요. 네 지금 일하고 있습니다. 연락처를 남겨드릴까요?' '아, 아닙니다. 세레나라고 하면 알 거예요. 세레나가 걱정하고 있다고 전해주세요.' 30초도 되지 않은 그 통화로 나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넘어온 기분이 들었다. 아직까지도 허둥거리며 료칸으로 전화를 걸면서 화장실로 숨어 들어간 순간은 트라우마처럼 기억에 남아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안도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리는 아주 친한 친구였다.


 대학교 때 만난 우리는 항상 티격태격하는 절친으로 유명했다. 톰과 제리 같았다. 나는 기가 세지만 허당인 애였고, 그 애는 우리 과에서 제일 웃기고 성실한 애였다. 서로를 공격하며 놀았지만, 동시에 서로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 애가 아웃백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놀라게 해 주려고 몰래 찾아가기도 했다. 우리 집에서 꽤나 거리가 있는 지점이었지만, 가게에 깜짝 방문해서 일 좀 잘하라며 놀려주고 싶었다. 당시 아웃백에서는 주문을 받을 때 서버가 무릎을 꿇어 자리에 앉아있는 고객과 눈높이를 맞췄었다. 내가 테이블에 앉아있는 모습을 본 그 애가 당황하는 걸 보고 깔깔대며 웃었다.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지겹다는 그 애의 말에 나는 고객 주문 안 받을 거냐 눈을 흘겼다. 그 애가 주춤거리며 나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꿇을 때, 나는 '나도 같이 무릎 꿇을까?‘ 하고 놀렸다.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한 꼬마처럼 시비를 걸었다. 같이 간 동기들은 왜 아웃백에서 서로 석고대죄를 하고 있냐며 배를 잡고 웃었다. 다른 사람들도 웃으며 쳐다봤지만 무릎을 꿇은 나는 진지하게 먹고 싶은 음식들을 빠르게 읊었고, 그 애는 프로 서버로서 정확하게 주문을 기록했다. 나는 그 애를 놀라게 하는 게 좋았다.




 2011년 설날, 나는 도쿄에 있었다. 그 애는 학교를 휴학하고 일본으로 워홀을 갔는데, 페이스북으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 그 애가 설날에 맞춰 휴가를 낼 거란 걸 알게 됐다. '설 연휴를 타국에서 혼자 보내면 슬프겠지' 하는 생각으로 나는 충동적으로 도쿄행 비행기를 표를 예약했다. 그 애가 누구와 어떤 약속을 했고 일정이 있는지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비행기 타기 전날에서야 나는 그 애에게 내일 나리타 공항으로 간다고 했고, 그 애는 반색하며 자기도 휴가니까 도쿄 오는 김에 식사나 한 끼 하자고 했다. 사실 나는 설 연휴 동안 너랑 놀려고 혼자 도쿄에 가는 거라고 했더니, 그 애는 경악하며 또 내가 제멋대로 군다고 나를 타박했다.


 "신경 쓰지 마, 너 일정 있으면 나는 혼자 놀다가 나중에 만나도 되지. 나도 할 일 많은 사람이야. 그렇지만 네가 다른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하면 내가 그 자리에 몰래 가 있을지도 모르지?"


 넌지시 속을 드러내며 협박을 하는 내게 그 애는 항상 두 손을 들어주었다. 나리타 공항에는 그 애가 마중을 나왔다.

 

 그 애는 한국에서 놀러 오는 나를 위해 열심히 여행 준비를 했다고 했다. 료칸에서 야근하는 것보다 나한테 혼나기 싫어서 여행 계획 짜는 게 더 힘들었다고 엄살을 부렸다. 그 애가 삼겹살이 너무 먹고 싶다고 해서 신오쿠보에 가서 삼겹살을 먹었다. 도쿄의 한국이라고 불리는 신오쿠보에는 한식집이 많았고, 당연히 한국보다 삼겹살 가격이 비쌌다. '아, 나는 낼모레면 한국에서 이것보다 더 맛있는 삼겹살을 실컷 먹을 수 있는데 도쿄까지 와서 삼겹살을 먹고 있다니' 하고 볼멘소리를 하는 나에게 그만 말하고 먹기나 하라며 그 애는 상추쌈을 내 입으로 밀어 넣었다.


 도쿄도청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야경은 예뻤다. 그 애는 도쿄의 멋진 야경을 보여주겠다며 나에게 호언장담을 했고 나는 '전망대 다 비슷할 텐데 가까운 데나 가지' 하고 툴툴거렸다. 하지만 그 애는 단호하게 꼭 여기를 가야 한다며 지하철을 갈아타가며 나를 도쿄도청으로 데리고 갔다. 그때 내려다본 야경은 사실 서울의 야경과 비슷했다. 서울이나 도쿄나 밤이되면 반짝이는 건물 불빛과 교통정체로 막힌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 유흥가의 화려한 네온사인이 섞인 예쁜 야경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 애와 둘이서 도쿄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은 그 순간을 아주 특별하게 만들어줬다. 내가 얘를 친구 이상으로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은 짓궂게 건드리면 툭툭 내뱉는 반응이 재밌어서 더 말을 걸어보고 같이 있고 싶었던 건데, 내가 이렇게나 얘에게 집착하게 된 건 좋아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들었다. 둘이 엮이면 서로 질색하며 싫다고 손사래를 치던 건 진심이었을까. 내 마음이 뭔지도 모른 채, 깊어가는 밤의 달을 마음에 새겨 넣었다.



 도쿄 여행을 마치고 떠나는 날, 그 애가 나리타 공항까지 배웅을 해줬다. 촌스럽게 굴지 말고 쿨하게 헤어지자는 내 말에 그 애도 '바라던 바다' 하고 멋지게 악수를 나눴다. 그리고 쪽지 하나를 건넸다. '뭔가 내 욕을 잔뜩 써놨을 것 같아서 받기 싫은데' 하는 내 말에도 그 애는 꼭 비행기에서 읽어보라며 쪽지를 내 주머니에 넣었다. 여행하면서 그 애는 도쿄에서 워홀을 하는 게 생각보다 괜찮아서 일본에 몇 년 더 체류해볼까 한다고 말했었다. 몇 년이라고 하면, 그 애가 한국으로 돌아올 때 나는 대학교를 졸업했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갑자기 그 애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포옹이 하고 싶어졌다. '작별의 포옹 어때' 하는 나에게 그 애는 정말 싫다며 질색했지만 내 쪽이 더 빨랐다. 잠깐 다가선 순간이었지만 차가운 바람 냄새와 함께 그 애의 시원한 향수 냄새가 나를 감싸는 듯 느껴졌다.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 휙 돌아서 입국장으로 향했다. 한참을 걷다가 돌아봤을 때 그 애는 유리창 너머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항상 보던 그 애 같아서 나도 같이 손을 흔들었다. 비행기에 타서 기내식이 나올 때쯤 카디건을 벗다가 주머니 속 쪽지 생각이 났다. 연습장 같은걸 찢어다 쓴 듯한 형편없는 메모였다. 쪽지에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걸 계속 미루고 싶었는데, 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올해는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짤막한 메시지가 써져있었다. 덕분에 내 마음은 비행기보다 둥실 거리며 한국에 도착했다.



 도쿄 여행에서 내 숙소와 그 애 숙소는 도보로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신주쿠 역에서 만나 함께 여행했다. 신주쿠 역으로 향하는 말간 아침 겨울 공기 속에서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는 중학생들, 까만 정장 차림으로 서류 가방을 들고 넓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직장인들, 사람들이 드나드는 편의점 따위의 풍경이 눈에 가득 담겼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일본 밴드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낯선 곳에 있다는 긴장감, 익숙한 그 애를 만나러 간다는 반가움, 여행이 주는 특유의 안도감이 결합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벅찬 마음이 들었다. 음악은 놀라우리만치 생생하게 기억을 소환한다. 그때 들었던 일본 노래에는 그 애를 향해 느꼈던 나의 마음이 소복하게 담겨있다. 그리고 그 노래와 비슷한 노래를 들을 때면 마음이 저릿할 정도로 도쿄에서의 추억이 선명하게 다시 떠오른다.


 그 애는 지금 누군가와 결혼해 좋은 가정을 꾸리고 있을지 모른다. 친구들 몇 명을 통하면 그 애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럴 기회가 있어도 피하고 싶다. 터지지 않았던 감정이, 도쿄에 머물렀었던 공기가 지금도 가끔 나를 툭 건드리고 가지만. 그 애가 웃을 때, 놀랄 때, 졸려할 때, 눈물 흘릴 때,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 미성숙했던 그때의 내 마음은 접혔다 펴졌다 했었다. 그 애는 몰랐겠지만, 나는 줄곧 감정적이고 쉽게 감동받는 존재였다. 내 새끼손가락의 붉은 끈이 네 새끼손가락에 이어져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나는 일본을 싫어하지만 그때를 닮은 일본 노래를 들으면 벅차게 감동받고 마는 것이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그 애와 있었던 시간으로 나를 떠밀어주기 때문에.



https://youtu.be/goU1Ei8I8uk


あなたは夕日に溶けて

당신은 석양에 녹고
わたしは夜明に消えて

나는 새벽녘에 사라져서
もう二度と 交わらないのなら

이제 두 번 다시 함께하지 못한다면
それが運命だね

그게 운명이겠지

あなたは灯ともして

당신은 등불을 밝히고
わたしは光もとめて

나는 빛을 원하고
怖くはない 失うものなどない

두렵지는 않아 잃을 것 따위 없어
最初から何も持ってない

처음부터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それじゃ それじゃ またね

그러면 그러면 다음에 만나
少年の瞳は汚れ

소년의 눈동자는 더럽혀 져서
5時の鐘は鳴り響けど もう聞こえない

5시의 종은 울리지만 이제 들리지 않아
それじゃ それじゃ まるで

그러면 그러면 마치
全部 終わったみたいだね

전부 끝나버린 것 같으니까
大間違い 先は長い 忘れないから

큰 착각이야 앞 날은 길어 잊지 않을 테니까

ああ 全て忘れて帰ろう

아, 전부 잊고 돌아가자
ああ 全て流して帰ろう

아, 전부 흘려보내고 돌아가자
あの傷は仏けど この渇き癒えねど

저 상처는 쓰리지만 이 갈증은 해소되지 않아도
もうどうでもいいの 吹き飛ばそう

이젠 아무래도 좋아 날려버리자
さわやかな風と帰ろう

상쾌한 바람과 함께 돌아가자
やさしく降る雨と帰ろう

부드럽게 내리는 비와 함께 돌아가자
憎みあいの果てに何が生まれるの

서로 미워한 끝에 뭐가 남겠어
わたし わたしが先に 忘れよう

내가 내가 먼저 잊어버리자


あなたは弱音を吐いて

당신은 약한 소리를 하고
わたしは未練こぼして

나는 미련을 남기고
最後くらい 神様でいさせて

마지막만큼은 신으로 있게 해 줘
だって これじゃ人間だ

그렇지만 이래서야 인간일 뿐이잖아

わたしのいない世界を

내가 없는 세계를
上から眺めていても

위에서 내려다본다 해도
何一つ 変わらず回るから

무엇하나 바뀌지 않고 돌아가니까
少し背中が軽くなった

조금은 등이 가벼워졌어

それじゃ それじゃ またね

그럼 그럼 또 만나
国道沿い前で別れ

국도변 앞에서 이별하자
続く町の喧騒 後目に一人行く

계속되는 거리의 소란을 뒤로한 채 혼자 걸어가
ください ください ばっかで

달라는 말만 했지
何も あげられなかったね

아무것도 줄 수 없었어
生きてきた 意味なんか 分からないまま

살아온 의미가 뭔가 알지도 못한 채

ああ 全て与えて帰ろう

아, 모든 걸 주고 돌아가자
ああ 何も持たずに帰ろう

아, 무엇도 가지지 말고 돌아가자
与えられるものこそ 与えられたもの

주는 것이야 말로 받은 것
ありがとう って胸をはろう

고마워 라고 말하며 가슴을 펴
待ってるからさ もう帰ろう

기다리고 있으니 돌아가자
幸せ絶えぬ場所 帰ろう

행복이 끊이지 않는 장소로 돌아가자
去り際の時に 何が持っていけるの

떠날 때 뭘 가지고 갈 수 있겠어
一つ一つ 荷物 手放そう

하나하나 짐을 내려놓자
憎み合いの果てに何が生まれるの

서로 미워한 끝에 뭐가 남겠어
わたし わたしが先に 忘れよう

내가 내가 먼저 잊어버리자

あぁ今日からどう生きてこう

아, 이제 어떻게 살아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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