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그래서 저는 픽했습니다'
*방영시기 : 2019년
*등장인물 : 사쿠라이 유키, 시라이시 세이, 호소다 요시히코, 마츠다 루카, 카사하라 히데유키
*산들의 코멘트
주인공인 '아이'는 주위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며 지내는 20대 후반 직장인. 친구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은 모습 위주로 본인을 포장해 드러내고, SNS에는 잘 나가는 남자 친구와의 애정이 넘쳐나는 사진들만 올린다. 그러다 남자 친구에게 차이는 바람에 울적하게 지내다가 휴대폰을 잃어버리는데, 마침 그 휴대폰을 주운 사람을 만나러 간 장소가 '서니 사이드업'이라는 지하 아이돌이 공연하는 곳이었던 것.
‘아이'는 멍하니 서니 사이드업 다섯 소녀들의 공연을 보다가, 유난히 춤도 노래도 끼도 별로인 '하나'라는 멤버에게 괜히 화풀이를 해버린다. 이후 다시 찾은 공연장에서 여전히 소심하지만 나아지고자 노력하는 '하나'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아이'는 '하나'를 전력적으로 응원하며 그녀의 오타쿠를 자처한다. 항상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노심초사 신경 쓰던 '아이'가 '하나'이름이 써진 티셔츠를 입고 쇼핑몰 공연을 응원하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이 고민했을까. 그것도 지하 아이돌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친구들을 뿌리치고 말이다.
지하 아이돌이라는 소재도 독특했지만, 무엇보다 결핍을 느낀 사람이 자신보다 여리고 약한 존재를 지켜주리라 마음먹는 과정이 인상 깊었다. 누군가는 '그거 그냥 오타쿠잖아'라고 생각할 수 있는 전개지만, 현실감을 제쳐두고서 TV 속의 누군가와의 관계에 한 번이라도 과몰입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눈시울이 붉어질 드라마다. 나의 '원픽'이 지금은 보잘것없어도 주눅 들지 않았으면 좋겠고, 실력이 더욱 늘었으면 좋겠고, 조금 더 단단해졌으면 좋겠고,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으면 좋겠다는 감정. 이 사람을 위해 내가 부단히 노력해서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감정.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지면 멘털이 나가서 배신감에 치를 떨다가도 마음 한구석에선 그럼에도 믿어주고 싶고 아니라고 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
이 드라마는 단순히 아이돌-팬의 관계를 넘어서,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마음을 열고 의지하고 성장해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인기 없었던 '하나'가 덜덜 떨리는 손을 '아이'에게 손 내밀며 악수를 청할 때, 그 손을 소중하게 마주 잡은 '아이'가 느꼈을 감정. 그건 내 옆에 둘 수 없는 누군가를 열심히 좋아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 수 있는 감정이니까.
몇십 년 전에는 회사와 나를 동일시하며 일찍 출근하고 야근하고, 쉬는 날에도 회사 생각하고 한 회사에 정착해 인생을 회사에 거는 사람들도 많았다. 최근에는 세대가 바뀌고 개인 생활의 가치를 중시하는 분위기 덕에 회사와 자아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회사는 회사일뿐. 업무에서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전생에 나라를 구한 사람이겠지만, 보통의 인간이라면 회사일은 에너지가 상당히 소진되는,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들시들한 식물처럼 회사에 기 빨린 채 살 수는 없는 법. 삶에 활력을 주기 위해서는 업무 스트레스를 잊을 수 있을 정도로 즐거움을 주는 취미가 필요하다. 저녁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거나, 좋아하는 술을 마신다거나 하는 식으로 원초적인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좋고,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본다거나 밤바람 맞으며 산책을 한다거나 아이돌 덕질을 한다거나 하는 정서적인 안식을 취하는 것도 좋다. 혹은 좋아하는 소설을 읽는다거나 관심 있는 분야의 공부를 하는 것처럼 두뇌를 자극하는 취미도 인기다.
중요한 것은 회사 업무만큼이나 몰입할 수 있는 취미를 만들어 보는 것. 최근에는 직장인 대상으로 요가나 필라테스 같은 운동이나 베이킹, 공예 등 뭔가를 만드는 것을 테마로 하는 클래스도 많다. 딱히 누군가에게 배우지 않아도 시작할 수 있는 둘레길 걷기나 등산 같은 취미도 있다. 스트레스가 풀리고 체력도 기를 수 있는 좋은 휴식법이다. 뮤지컬이나 드라마, 소설이나 애니메이션 같은 문화적인 콘텐츠에 몰입해보는 것도 좋다. 가볍게 감상만 하는 것도 좋고 더 파고들어서 작품의 세부적인 설정이나 OST 같은 부가적인 요소들에 대해서 공부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무엇이 되었든 회사 일 이외에 내가 잘 아는 분야가 생기는 것은 삶에 생기를 주는 일이다.
A는 무기력함에 빠졌다. 큰 꿈을 안고 입사한 회사에서는 5년이 넘게 같은 업무를 하고 있어, 웬만한 일은 어렵지 않았고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도 적당히 대응할 수 있었다. 큰 어려움 없는 회사생활은 A를 심적으로 편안하게 해 줬지만 그와 동시에 스스로 정체되어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신입사원 때 품었던 팀장이 되리라 하던 꿈은, 책임만 많고 혜택은 별로 누리지 못하는 듯한 회사의 팀장들 모습을 보고 조용히 접었다. 그저 하루하루 사고만 안 터지게 적당히 일하자는 생각이 A를 무력하게 했다. 새로운 자극이 없는 회사는 단조로웠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 19로 회사는 재택근무 체계로 전환되었고, 외출도 잘하지 않게 되면서 A는 그야말로 인생이 재미없다고 느끼는 시기에 접어들었다. 친구들처럼 새로운 사람을 만나보는 것도 취미를 찾아보는 것도 귀찮았다.
그날도 뭔가 재밌는 거 없나 하고 휴대폰을 들고 의미 없이 유튜브를 배회하거나 볼 것도 없으면서 넷플릭스 같은 영상 플랫폼을 뒤적거렸다. 일본에서 대인기였다는 드라마가 추천되었다. 생각 없이 클릭해보니 여자 주인공이 이뻤다. 회사원이 주인공이라 뭔가 공감되는 듯 해 재미 삼아 보는데, 고등학교 때 배웠던 일본어가 조금씩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일본어 공부나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 드라마를 정주행 완료해버렸다. 재밌었던 그 드라마의 주인공을 유튜브에 검색해보았다. 관련 동영상에 그 배우가 출연했던 일본 예능 프로그램이 있어 재생했는데, 한국에도 팬이 많은 모양인지 한글 자막도 달려있었다.
배우 옆에서 사회를 보는 사람들의 멘트가 재미있어 개그맨들인가 싶어 찾아보니 아이돌 그룹이란다. 노래를 찾아봤는데, 취향에 맞아 몇 곡 플레이 리스트에 추가해두었다. 그 아이돌 그룹이 활동한 내용을 찾아보니 가수지만 드라마나 영화에도 자주 출연했고, 본인들이 고정적으로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도 있었다. 흥미가 돌아 유튜브를 뒤져보니 활동 기간이 20년 된 그 아이돌에 대한 무대나 드라마, 예능 출연 영상들이 넘쳐났다. 방송활동을 워낙 오래 해 볼만한 프로그램도 많고, 한국에도 팬이 많다 보니 그 주요작들은 대부분 한글자막 작업이 되어있었다.
보면서 빠져들기 시작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짤들을 수집하고, 퇴근하면 그 아이돌 그룹의 예능 영상이나 멤버가 출연한 드라마를 보면서 저녁을 먹었다. 가끔은 자막 없이 보면서 일본어 청해 공부도 했다. 신기하게도 학생 때 일본어 공부를 하던 때보다 더 일본어가 잘 들렸다. 올해는 일본어 자격증이나 따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퇴근하면 이 드라마를 봐야지 하는 생각에 즐거워졌다. 학생 시절에 좋아했던 아이돌 그룹, 소녀시대나 동방신기 생각이 났다. 그야말로 10여 년 만의, 소위 말하는 덕질이었다. 이제는 돈도 버니까 내가 좋아하는 멤버의 사진이나 출연 잡지, 콘서트 굿즈도 턱턱 살 수 있다. 인생 노잼 시기를 덕질로 가까스로 벗어나게 된 것 같다. 외국어 공부까지 자연스레 하고 있으니 일석이조 아닌가.
유튜브에서 영상을 보다 보니 저작권 이슈로 유튜브 영상을 삭제하고 블로그에 업로드했다는 글들이 자주 보였다. 몇 년 전 만들어 두었던 내 블로그가 생각나,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영상이나 짤을 올리는 사람들의 블로그를 이웃 추가했다. 새로운 드라마 소식이나 CF 촬영 소식, 혹은 멤버들이 잘 나왔던 과거 사진이나 영상들의 게시글을 보면서 좋아요를 누르고 때로는 댓글을 달았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이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같다는 이유로 말로 표현 못할 동질감이 느껴졌다. 5년 같이 일했던 직장동료보다도 마음의 벽을 허문 사이가 된 것 같다. 비슷한 또래인 모양인지 블로그 주인들이 올리는 일상 글에도 공감을 하게 되었고, 서로 올리는 글에 댓글을 달아주었다. 댓글에는 대댓글로 소통을 이어나갔다. 단조로운 회사생활과 코로나 19로 집콕을 하고 있는 우울한 상황에서 한 줄기 햇살처럼 내려온 아이돌 그룹과 그 한국 팬들과의 새로운 세계가 열리면서, 함께 뭔가를 좋아한다고 당당히 외치고 함께 요란을 떨 수 있다는 현실이 행복해졌다. 코로나 19가 조금 잠잠해지면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의 가족이 운영한다는 식당에 가봐야지 하고 일본 여행을 생각하며 적금을 새로 개설했다. 흑백 같은 일상에 알록달록한 색깔이 입혀진 기분이 들었다.
뭔가 하나에 집중해 전문가 수준이 되어버린 사람을 표현하는 말 중 일본어로 ‘오타쿠(お宅)’라는 표현이 있다. 일본어로 '타쿠(たく)’로 읽히는 한자 '집 택(宅)‘자에 존경어 ‘오(お)’를 접두어로 붙여 '오타쿠(귀 댁)'가 되었다. 과거에는 애니메이션이나 아이돌 그룹, SF 영화, 게임 등에 과하게 몰입하고 다른 분야에 대한 지식이 떨어져 사교성이 떨어지는 사람을 지칭하는 다소 멸시적인 말이었지만, 지금은 무언가의 전문가를 지칭하는 말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오타쿠가 될 수 있는 분야도 확대되어 등산, 골프 같은 운동이나 뮤지컬, 바둑, 사진, 소설, 디저트, 재테크, 특정 브랜드 등 무궁무진하다.
오타쿠가 강한 이유는 본인이 열광하고 소중히 생각하는 존재나 분야가 있기 때문이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회사일이 죽을 정도로 힘들어도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 굿즈를 사기 위해 버티면서 열심히 돈을 버는, 그리고 퇴근 후 아이돌을 보면서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사람들의 에너지와 정신력은 회사만 생각하는 사람의 그것보다 강할 수밖에 없다. 삶이 재미없다면 무언가의 오타쿠가 되어보자. 단, 생업에 영향이 가지 않도록 할 것. 그리고 통장 잔고를 생각하는 것도 잊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