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저, 정시에 퇴근합니다'
*방영시기 : 2019년
*등장인물 : 요시타카 유리코, 무카이 오사무, 나카마루 유이치, 에모토 토키오, 이즈미사와 유키
*줄거리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설레는 그 말, '정시 퇴근'. 나 또한 어쩔 수 없는 직장인인지라, 이 드라마는 제목에서부터 끌렸다. 가벼운 로맨스 드라마인가 싶었지만, 보면 볼수록 현실 고증 잘 된 리얼리티라는 생각.
직장인 '히가시야마 유이'는 주변에서 야근을 해도 개의치 않고 본인의 업무가 끝나면 6시 퇴근을 한다. 정시 퇴근 후 단골 중국요리점으로 달려가 맥주 한 잔에 샤오롱바오를 먹는 것이 그녀 인생의 낙. 그 중국요리점은 6시 10분까지 맥주를 반값에 판다. ‘아, 이건 못 참지’ 하고 뛰어가는 그녀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이 드라마는 의뢰처가 원하는 방향으로 홈페이지나 캠페인을 제안하고 입찰되면 비용을 받고 실행하는 웹 에이전시 배경으로 2019년 드라마인 만큼 회사에서, 특히 IT 회사에서 이슈가 될 만한 소재들을 다룬다. 버릇없는 신입사원과 답답한 꼰대의 갈등이라든지, 번아웃 증후군, 육아휴직, 워킹맘, 직장 내 성희롱, 워크홀릭 등. 직장인이라면 사실 비슷하게 겪어봤을, 그런 일상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주인공이 일하는 부서에 주인공의 전 남자 친구가 상사로 부임해버리는 다소 판타지스러운 소재를 결합함으로써 궁금해서 보고 싶어지는 드라마를 완성한다. 그리고 성격도 상황도 전혀 다른 세 주인공, 유이, 시즈카타게, 미타니의 조화에도 눈이 간다. 과거 번아웃이 올 정도로 열심히 일하다 말 그대로 죽을 뻔하고 회사보다 자기를 우선시하게 되지만 동료들에 대한 애정과 의리를 지키고 싶어 하는 '유이', 쌍둥이를 출산하고 일과 육아, 가사를 완벽히 해내려 발버둥 치는 '시즈카타게', 나 자신보다 회사와 일 우선으로 살아왔던 '미타니'가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를 이해하고 돕는 관계가 되는데 보기만 해도 든든하달까.
오피스 드라마 중에서도 기분 좋을 정도로 현실적인,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게 빠져들어 보게 되는 작품. 모든 직장인들이 '90년 대생이 온다'만 보지 말고 이 드라마도 봤으면 좋겠다. 회사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거다, 내가 회사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회사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연봉이다. 그리고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일과 삶의 균형, '워라밸'이라고 생각한다. 정시 퇴근을 눈치 없이 할 수 있는지, 야근을 한다면 야근 수당이 제대로 지급되는지, 휴가는 원하는 시점에 사유를 보고 하지 않고도 쓸 수 있는지 등. 회사 업무가 끝나면 개인이 자유로이 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는지가 중요하다. 소위 말하는 ‘저녁이 있는 삶’이다.
최근에는 유연 근무제의 확대로 코어타임만 지키면 원하는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할 수 있는 회사도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제도보다 중요한 것은 구성원들의 인식이다. 특히 지위가 높은 사람의 인식. 복지가 제도로서 존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복지를 실제로 많은 이들이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윗사람이 솔선수범해서 회사 복지 제도를 사용하고, 누구나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필요하다. 인턴사원부터 팀장, 임원들까지.
최근, ‘90년대 생이 온다’와 같이 새로운 세대의 직장 생활관이 텍스트로나마 알려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도 '꼰대스러움'이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게 요즘 애들이구나' 하고 신기하다 생각만 하고 실제 회사생활에서는 달라진 문화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해야 할 업무가 끝나면 눈치 보지 않고 정시 퇴근하는 것. 회사가 마련해 둔 복지를 누리는 것. 누가 해주길 바라기보다 필요한 부분은 내가 먼저 영리하게 챙겨보자. 책임을 다했다면 권리를 당당히 요구하는 거다. 주변 선배들이 퇴근하지 않아서, 나는 할 일도 없으면서 자리를 지키며 시간을 보냈다면 이제 그러지 말자. 할 일이 끝났으면 집에 가자. 처음에는 용기가 없거나 눈치가 보일지도 모르지만, 할 일도 없으면서 시간을 죽이는 것만큼이나 비효율적인 일이 없다. 오늘 할 일을 다 했다면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제대로 휴식하자. 우린 모두 알고 있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엔진은 과열되다가 언젠가 터진다는 것을. 적절한 휴식이 취해야 일의 효율도 올라가는 거니까.
직원들의 '저녁이 있는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 앞으로 관리자 급이라면 직원들의 업무분장을 잘하는 것이 핵심 역량으로 꼽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팀 멤버들이 직급에 맞게 업무 시간 내 끝날 수 있는 일 분량을 배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회사에 있다 보면 일 잘하는 사람에게 일이 더 몰리는 경향이 있다. 관리자 입장에서는 일 잘하는 사람에게 업무를 몰아주는 게 처리가 빠르고 본인이 관리해줘야 할 부분이 적어서 귀찮지 않으니까 그런 불합리한 상황이 왕왕 발생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렇게 실컷 부려먹어 놓고 인사평가 철이 되면 그 사람을 배제하고 본인을 잘 따르는 직원만 챙겨주는 경우가 있다. 회사에 충성했지만 이런 식으로 배신당하는 경우, 보통 그 능력 있는 직원은 다른 회사로 이직한다. 그리고 그 팀에는 또 다른 일 폭탄을 받는 희생양이 생기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직원들은 회사와의 계약관계에 의한 근로자 일 뿐 노예가 아니다. 회사에서는 업무에 대해서만 다루되, 누군가에게 과부하가 걸리지 않도록 공정하게 업무를 분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관리자는 팀에서 돌아가고 있는 일을 부지런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직원의 경우에도 업무가 너무 과중하면 이를 조정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참으면 본인도 손해고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도 손해다.
A는 신입사원이다. A가 입사한 회사에서는 연차 외에도 리프레시 휴가라는 항목으로 5일의 휴가를 지급해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휴가가 많은 회사라 좋다고 느꼈는데 팀 내 선배들 중에 실제로 그 휴가를 쓰는 선배는 B 밖에 없었다. B는 야근하는 일도 잘 없었고 한 두 달에 한 번 꼴로 연차를 썼으며, 리프레시 휴가를 토요일, 일요일과 붙여 길게 쉬다 오곤 했다. 평소에도 6시가 되면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조용히 퇴근했다. 지극히 개인주의 성향인 선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업무 시간에 다른 선배들처럼 커피 마시러 가거나 담배를 피우러 가지 않으면서 본인 업무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야근 없이도 업무가 소화 가능한 듯했다.
하루는 B와 점심식사를 하다 올해 휴가 이야기가 나왔다. B는 올해는 10일 일정으로 강원도를 돌아보는 여행을 할 거라고 했다.
“선배는 좋은데 많이 다니시네요! 여행도 많이 다니셨을 것 같아요.”
“응, 나는 취미도 딱히 없고 여기저기 혼자 다니는 거 좋아해. 직장인이 휴가 때 멀리 여행 다녀오는 낙이라도 있어야지 돈 버는 보람이 있지 안 그러냐. 맛있는 거 먹고, 좋은 거 보고, 편한 데서 자고. 넌 올해 휴가 어디 갈 거야?”
“저는 아직 못 정했는데 올해는 제주도 가보고 싶어요.”
“제주도면 10일이면 동쪽, 서쪽 나눠서 충분히 볼 만하겠네.”
“제가 휴가를 10일 쓸 수 있을까요?”
“왜? 너 휴가 다 썼어?”
“아뇨, 그런 건 아닌데.. 팀 막내인데 눈치가 좀 보여서요..”
“야, 그런 게 어딨어. 리프레시 휴가는 안 쓰면 돈으로 보상도 안 해준다. 쉬라고 회사가 등 떠밀어 주는 건데 왜 그걸 안 써. 우리 팀장님은 그런 거 못쓰게 하는 사람 아니야, 본인이 휴가 오래 쓰는 게 익숙지 않아서 잘 안 가는 거지 남들 간다고 하면 싫은 소리 안 하거든. 결제 올리고 인수인계 필요한 업무 있으면 미리 인계하고 가면 아무 문제없어. 다녀와, 입사한 지 1년 된 것 같은데 스트레스도 좀 풀어야 할 거 아냐.”
A는 B의 조언에 힘입어 리프레시 휴가 사용한다는 결재를 올렸다. 결재를 올리기 전에 먼저 구두로 보고를 했어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결재가 완료됐다는 메일이 왔다. 속 태우며 기다린 게 무색할 만큼 휴가 신청은 쉬운 거였다. 10일 가까이 자리를 비우는 만큼 업무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할 수 있는 일들은 해두고 혹시 부재중일 때 발생할 수 있을 문제들은 같은 파트 선배에게 내용을 공유했다. 휴가 기간 중 메일이 오면 A가 부재중이라는 사실과 이슈에 따라 연락할 수 있는 팀 선배 정보를 기재한 메일이 자동 발송되도록 세팅했다.
A는 이제 매년 착실히 휴가를 다녀온다. 처음에는 ‘넌 참 휴가를 길게 가는구나’ 하는 선배들도 있었지만, 멀리 여행 다니는 게 멋있다, 제대로 리프레쉬하고 와라 하고 응원하는 선배들도 있었다. 매년 그렇게 휴가를 다녀오고 다녀와서는 동료들에게 작은 기념품을 선물하거나 여행지에서 산 간식거리를 나눠 먹으면서 여행하며 재밌었던 이야기나 멋진 사진을 공유하기도 했다. 그게 몇 년씩 이어지다 보니 A는 어느새 ‘1년에 한 번은 오래 여행 가는 사람’로 포지셔닝이 되었고, 올해는 어디 갈 계획이냐며 좋은 여행지가 있으면 추천해달라는 동료들의 부탁을 받기도 했다.
회사 생활을 견딜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휴가를 얻어 집에서 뒹굴거리는 것, 멀리 여행을 떠나 일상과 다른 경험을 해보는 것, 맛있는 걸 사 먹는 것, 예쁜 옷을 구경하는 것, 숨이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리는 것 등. 그런 에너지를 평소에도 얻을 수 있도록 워라밸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 정시에 퇴근하고, 아프거나 쉬고 싶을 때는 쉬고.
처음에는 너만 왜 유난스럽냐 하는 눈총이 있을 수도 있지만, 진득하게 밀고 나다가 보면 나에게 동조하는 동료들이 분명히 생긴다. 분위기는 그렇게 새롭게 만들어진다. 물론 내 워라밸이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긴 휴가를 가는 경우에는 업무가 바쁘지 않은 시기로 일정을 잡되, 사전에 내가 처리해야 하는 업무는 최대한 해결해두고 혹시 내가 부재중일 동안 진행되어야 하는 업무가 있다면 동료들에게 충분히 인수인계해야 해서 누군가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휴가로 인해 수고한 동료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도 잊지 말고, 동료가 휴가 갔을 때 그 공백을 채워주는데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거다. 나 혼자만 지키는 워라밸보다 함께 누릴 수 있는 워라밸을 지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