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나기의 휴식'
*방영시기 : 2019년
*등장인물 : 쿠로키 하루, 타카하시 잇세이, 나카무라 토모야, 이치카와 미카코, 타키우치 쿠미
*산들의 코멘트
드라마 '중쇄를 찍자'에서 '코코로' 역을 했던 '쿠로키 하루' 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다. 남의 눈치를 너무 살피는 성격 탓에 본인이 하고픈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던 '나기'가 여러 숨 막히는 직장 동료와 남자 친구 '신지'의 막말로 인해 회사에서 과호흡으로 쓰러지고, 이내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로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 무엇보다 나기가 새 생활을 하기로 한 곳이 뜨끈하지만 산뜻할 것 같은 여름의 풍경을 담고 있어 보고 있으면 여름 방학이 그리워진다.
‘공기를 읽는다'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는 일본 사회 특유의 눈치 문화에 늘 눌려 있던 나기가 조금씩 본인 할 말을 하게 되고 당당하게 변화해가는, 나기의 성장 이야기가 큰 틀이 된다. 그 과정에서 나기는 그녀의 전 남자 친구 '신지', 이사한 곳의 옆집 남자 '곤'과 삼각관계 비스름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엘리트 직장인처럼 보였던 전 남자 친구는 알고 보니 울보에 남들 시선을 의식해 거짓말을 하는 찌질한 남자였고, 썸남은 클럽 이벤트 오거나이저로 일하면서 무수히 많은 여자들에게 자기 집 열쇠를 뿌리는 대책 없는 바람둥이.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는 나기의 모습까지 총체적 난국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이 세 명, 귀여웠다.
의외로 개그 요소도 꽤나 있고(신지의 지분이 크다), 영화광 할머니, 싱글맘, 도쿄대 출신 친구 등 나기와 유대하면서 힘을 주는 이웃 캐릭터들도 매력 넘친다. 후반부로 갈수록 나기도 씩씩해지고 드라마 제목처럼 제대로 쉰 것 같아서 나도 속이 후련해졌다. 무엇보다 드라마에서 나른하고 신선한 풀향을 머금은 여름 공기 맛이 난다. 그리고 단순한 힐링물 이상으로 시청자에게 울림을 준다, '주위 눈치 보지 말고 원하는 대로 사세요' 하고.
신입사원일 때 선배에게 들었던 인상 깊은 말이 있다.
"넌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느껴본 적이 있니?"
"..? 아니요 아직 그런 적은 없어요."
".... 그렇구나."
"차장님은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느낀 적이 있으세요?"
뭔가 최근에 행복한 일이 있나 싶어 물어본 질문에 대한 답은 너무도 의외였다.
"난 그냥 요즘 죽고 싶어. 여한이 없다기보다 이만큼 했으면 죽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내년도 사업계획을 수립하던 시기라 연이은 야근에 눈이 퀭한 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 들이키는 차장님의 모습은 내가 꿈꾸던 능수능란한 직장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기 없고 재미도 없는 삶 속에 이주일 가까이 주말도 없이 밤 10시가 되어서야 퇴근하는 차장님을 보고, 능력 있는 직장인이라는 생각보다는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되뇌었던 기억이 난다. 그 차장님은 일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라 승진도 빨랐고, 주변의 평판도 좋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사원을 붙잡고 넋두리를 하면서 쓴웃음 짓던 그 얼굴이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난다. 물론 차장님은 그때의 힘겨웠던 시기를 잘 넘기셨다, 매년 그러했듯이.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고비가 올 때가 있다. 임원 보고나 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처럼 너무 바쁘다거나, 회사에서 특별한 이유 없이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거나, 주변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거나. 고비에 대한 역치 값도 사람마다 달라서 힘든 시기를 무던히 넘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문제를 부풀려 생각해 깊이 파고들고 스스로 스트레스를 배가 시키는 사람도 있다. 힘들 때 상사나 동료들에게 이야기하고 도움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괜찮다. 본인이 힘든 상황을 조금은 티 내서 주변인들이 알아서 배려하게끔 하는 것도 방법이다. 진짜 위험한 사람은 본인의 내면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고 혼자 버티려고 하는 사람이다.
한동안은 그렇게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스트레스라는 것은 배출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에 쌓이고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폭발할 수 있는 위험한 것이다. 취미 생활로든 사람으로든 맛있는 음식으로든 고생한 스스로에게 보상을 주며 나를 잘 관리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 정도면 괜찮아' 하고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해 버티는 사람은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릴 수 있다. 최근에 우리 생활 주변에서도 '공황장애'라는 단어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데, 공황장애를 앓았다고 고백하는 연예인이나 TV에서 공황장애를 다루는 방송 프로그램이 늘어나 사람들이 '아 이 감정이 공황장애였구나.' 하고 깨닫게 되면서 병원 진료를 받거나 주위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늘어난 듯하다. 신체의 병 못지않게 마음의 병을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는 인식이 퍼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A는 10년 차 과장이다. 나름대로 회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맡으며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은 열이 좀 나는 듯 싶더니 오른쪽 어깨와 등 부분이 찌릿찌릿 저리는 느낌이 들었다. 별 것 아니겠지 싶었지만 계속되는 통증에 다음날 거울을 보니 어깨와 등에 벌겋게 발진이 일어난 것을 발견했다. 열심히 인터넷을 검색해 대상포진이란 걸 알게 되었고, 서둘러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초기에 병원을 가서 그런지 발진과 통증은 약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없어졌다.
대상포진에 걸렸었다는 사실조차 잊었을 법한 시점에 A는 또 오른쪽 어깨 부분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최근에 시스템 문제로 회사 커머스몰 구매 고객들에게 포인트가 과다하게 적립되어 이를 회수하는 작업을 하던 시기였다. 규정 상 최대로 받을 수 있는 포인트를 보장하고 그를 초과한 부분에 대해 회수를 하는 일이었지만, 회사의 과실로 발생한 문제였고 이미 지급된 혜택을 다시 빼앗는다는 모양새라 고객 항의가 하루에도 수십 건씩 A에게 전달되었다. A는 유관부서와 고객응대 팀을 상대하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A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수습을 하게 되어 억울한 마음도 있었다. 그렇지만 최대한 빨리 상황을 해결해야 고객들도 납득하고 회사에 잘 소명할 수 있기 때문에 참고 대응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고객들의 불만이 직접 전달되는 상황과 빨리 수습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A는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고, 결국 그로 인해 대상포진이 재발한 것이었다.
증상이 재발한 것에 대해 A는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나름 건강한 편이라 생각했었는데,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다시 이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게 다시 스트레스가 되었다. 사고를 대략 수습하고 회사에 일주일 휴가를 내고 치료를 받았다. 이 병은 면역력과 관련이 있어, 면역력이 떨어지면 재발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이 우울하게 들렸다. 앞으로 일하면서 힘든 일이 많을 텐데 나는 이 정도도 견디지 못하나 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이겨내면 되겠지 하고 회사로 복귀했지만 이후 A는 이상하게도 오후 4시만 되면 심장이 평소보다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이전에 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오후 4시경에 대상포진이 재발했음을 느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 병이 또 도지면 어떡하나 하는 강박이 생겨버린 듯했다. '나는 왜 이렇게 유난스러울까' 하는 생각을 하다 결국 A는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고 눈앞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어, 동료의 부축을 받아 회사 의무실로 향했다.
증상을 말하자 의사는 일시적인 문제인 것 같다고 잠시 누워서 심호흡을 해보자고 했다. 조용한 의무실 침대에 누워 의사와 간호사가 말하는 대로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점차 내가 누워있는 곳의 천장이 또렷해지면서 호흡이 돌아옴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즘 방송에서 많이 들었던 공황장애인가 싶어 A는 대학병원 정신과를 찾았다.
'어떤 일이 힘들어서 오셨나요? '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주는 의사를 보자마자, A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펑펑 운다는 것이 창피하다는 생각보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누군가가 눈앞에 앉아있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면서도 '내가 이만큼 힘들었어요' 하고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투정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 섞여있었다.
의사는 익숙한 듯 티슈를 건네주고 A의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곧 A는 최근에 대상포진을 앓았고 스트레스받거나 피곤할 때마다 재발되는데, 이게 언제 재발될지 모른다는 강박과 공포 때문에 불면증도 생겼고 스스로 무너지는 것 같다고 솔직히 이야기를 꺼냈다. 의사는 불안과 강박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약물을 처방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A의 경우에는 원인이 비교적 명확한 상황이기 때문에 원인만 이겨내면 금방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정해진 시간에 약을 복용하되, 갑자기 공황이 올 것 같으면 즉시 먹을 수 있는 약도 줄 테니 항상 지니고 다니라고 했다. 약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공황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길 수 있다고 위로해주었다. A는 왠지 모르게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A는 팀장과 면담을 한 끝에 회사를 3개월 쉬기로 했다. 팀장은 A가 겪고 있는 어려운 상황에 공감해주었고, 회사가 휴직이라는 제도를 보장하고 있으니 이번 기회에 천천히 쉬면서 건강을 회복하자고 조언해주었다. 휴직을 하고 오면 앞으로의 인사고과나 승진에 불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지만, A는 이러다 정말 내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팀장이 내민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A는 휴직계를 내고 고향의 부모님 댁으로 내려갔다. 시골의 맑은 공기를 마시고, 건강한 밥을 먹고, 낮에는 읽고 싶은 책을 읽거나 텃밭을 가꾸고, 저녁에는 가족들과 함께 동네 산책을 하고, 아침에 일어나고 밤이 되면 잠드는 생활을 했다. 병원에서 챙겨 온 약도 꼬박꼬박 먹었다. 걱정으로 잠 못 이루던 밤이 없어지고 A는 조금씩 더 자주 웃게 되었다.
나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몸의 건강과 정신의 건강 모두 중요하며 정신이 피폐해지면 신체를 망치는 경우도 왕왕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회사 업무에 모든 것을 걸지 말 것, 무리하지 말 것,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말 것. 힘든 일이 있으면 나누라고 팀장과 동료가 있다는 것도 잊지 말자. 스트레스를 받는 시기라면 하루 정도는 나 자신을 위해 쉬는 시간을 만들 것. 중요한 일을 마쳤다면 스스로에게 보상을 해 줄 것. 즐길 수 있는 취미를 만들 것. 건강한 음식을 먹기 위해 노력하고 적당히 몸을 움직일 것. 하루에 10분이라도 낮에는 햇빛을 쬘 것. 밤이 되면 비슷한 시간대에 잠들고 해가 뜨면 일어날 것. 돈을 버는 것도 내가 온전히 건강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지 않는다면 누가 대신해줄 수 있을까.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