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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Jun 06. 2017

코타키나발루, 석양을 품은 해변

 수트라하버 리조트 마젤란을 고른 것은 순전히 휴양지 같은 자유로운 느낌을 원했기 때문이다. (수트라하버는 퍼시픽도 있는데, 퍼시픽은 호텔식 건물이다.) 기대했던 대로 로비는 말레이시아 느낌이 물씬 풍기는 멋진 개방형 인테리어로 되어 있었다. 객실은 올드한 느낌이 있었지만 그래도 킹사이즈 침대에서 기분 좋게, 알람이 채 울리기도 전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이렇게 잘 자본 적이 얼마만인가, 머리를 긁적이며 커튼을 열어보니 싱그러운 초록 풍경이 펼쳐져있다. 그렇지, 바로 이거지, 하며 조식을 먹으러 계단을 내려가면서 룰루랄라 콧노래가 나왔다.

객실에서 바라본 전망
조식 먹는 식당 야외 자리가 꽤 운치 있었다

 수트라하버 조식 식당은 전날 머물렀던 하얏트보다는 작았지만, 어차피 내가 아침에 먹는 건 계란, 햄이나 소시지, 치즈, 과일과 구운 식빵에 우유 정도이기 때문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야외에서 식사하는데 아침이라 그런지 바람도 선선하고, 새소리가 기분 좋게 들리는 게 썩 좋았다. 참새가 정말 많았는데, 새한테 먹이를 주지 말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을 정도. 참새랑 거의 합석하며 식사했단 말이지, 저 녀석들에게 내 음식을 하나도 뺏길 수 없다는 의지를 가지고!

마젤란 리조트의 외형
아침 먹고 산책하던 길
요트 선착장 근처였는데 물이 맑아 물고기도 성게도 보인다

 조식을 먹고 나서는 리조트를 산책 겸 돌았는데, 요트 선착장 있는 곳의 바다가 어찌나 맑고 투명한 지. 그 안에 들어찬 성게와 산호초, 물고기들이 다 보였다. 우와, 그런데 그 수가 꽤 많다. 송사리 같은 애들도 있고, 니모 친구도 있고, 금붕어 같은 애들도 있었다. 얘들아 안녕~하며 인사하다 보니 어느덧 리조트 한 바퀴. 10시에 출발한다는 리조트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마젤란 리조트 앞바다

 리조트에서 이마고 몰까지 가는 유료 셔틀이 있어서, 오늘은 그걸 타고 이마고 몰에서 쇼핑을 좀 해볼까 했다. 둘러보니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들도 꽤 있었다. 빅시에서 속옷을 세일하길래 몇 개 사고(브라는 없었다, 바텀이랑 향수, 바디로션 라인들만 있음), 배스 앤 바디웍스에서 여행용 사이즈 바디로션도 사고, 세포라에서 화장품도 몇 개 사고. 어제 와서 대충 둘러보고 간 덕분에, 필요한 것만 샤샤샥 빨리 살 수 있었다.

아시안 돌체 라테를 시켜봤다

 스타벅스가 있길래, 시원한 커피가 당기기도 하고, 말레이시아 스타벅스에는 뭘 파나 싶어 들어가 봤다. 메뉴판을 보니 아시안 돌체 라떼라는 메뉴가 보인다. 돌체 라테 좋아하는데, 대체 아시안 돌체 라테는 뭐지? 싶어 주문해봤더니. 여긴 휘핑크림이 올라가네? 그리고 한국식 돌체 라테는 연유 맛이 나는데, 여기는 커피 부분이 블랙커피에 가까운 더 씁쓸한 맛이 났다는 거! 암튼 스벅을 좋아하는 나로서 나라별 한정 메뉴는 매력적이다. 공항에도 큰 스벅이 있던데 돌아오는 날엔 거기서 책 읽으며 여유롭게 커피나 한잔해야지 싶었다.

가야 스트릿의 선데이 마켓

 커피 마시고 뭐하지 하다가 사테가 먹고 싶어 무작정 가야 스트릿 쪽으로 갔다. 그쪽에 사테를 맛나게 하는 집이 있다는 블로그를 미리 체크! 위대한 그랩 택시와 구글맵 덕분에 '유잇청'이라는 작은 가게로 무사히 찾아갈 수 있었다. 12시 좀 넘은 시간에 갔는데, 안타깝게도 사테는 2시부터 굽는다고 했다. 아쉬운 김에 카야 토스트와 밀크티를 시켰는데, 5링깃도 안 한다. 2천 원도 안 되는 돈에 이 정도 퀄리티라니! 토스트가 작기는 했지만 달달한 카야잼과 바삭한 빵의 조화, 거기에 깊은 맛이 나는 밀크티가 더해지니, 이 가게에서 사테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확 들었다. 마침 오늘 일요일이라 바로 옆에서 선데이 마켓을 하고 있었고, 나는'저 마켓을 구경하고 2시에 올 테니 그때 꼭 사테 주셔야 해요!'하고 인상 좋은 주인장 아저씨에게 신신당부하고 시장으로 나섰다.   

액세서리 파는 노점들이 많았다
눈에 띄던 반지

 다른 나라에 가면 시장 구경이 제일 재미있다. 가야 스트릿의 선데이 마켓은 이른 아침부터 시작해서 오후 2시쯤 닫는다. 내가 갔을 때도 거의 막장이었어서 소심하게 두리번거리며 구경하고 있는데, 액세서리를 올려놓고 파는 노점이 보였다. 평소 같았음 그냥 보고 지나쳤을 테지만, 나는 코타키나발루에 있고 여긴 알록달록한 게 이쁘고, 가격도 저렴하니까. 반지도 팔찌도 사서 하고 다녀야지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초록색 알이 귀엽게 박힌 반지를 고르니까, 노점 아주머니가 거기에 어울린다며 팔찌를 하나 건넨다. 어라, 이거 좀 이쁜데? 싶어 반지와 팔찌 하나씩 사기로. 반지는 10링깃, 팔찌는 20링깃이었지만, 두 개 사니 25링깃으로! 나는 가격을 깎았고, 아주머니는 막판에 물건을 더 팔았다, 이것이 윈윈!

코타키나발루가 사바주의 주도라고 한다
시장에서 받은 헤나

  좀 더 걷다 보니 기념품 샵들도 나오고, 과일 파는 곳들도 나오고. 저기 어떤 여자분이 헤나 받고 있는 것도 보인다. 가까이 다가서 보니 아티스트가 꽤나 프로페셔널해 보인다. 좋아, 나도 헤나 받겠어! 하고 무작정 의자에 들이밀고 앉았다. 무슨 도안으로 할까. 도안 예시 책자가 있었지만 돌고래, 연꽃, 고양이 이런 모양은 영 끌리지 않았다. 그냥 평소 좋아하는 단어인 Libertas 레터링을 하기로 한다. 나는 그냥 스펠링만 알려줬을 뿐인데, 이 아티스트는 금세 내 맘에 쏙 드는 도안을 만들어 낸다. 헤나를 한 지 3년 반 정도 됐다는데, 정말 아티스트구나 싶었다. 룰루랄라 헤나도 하고선, 다시 유잇청으로 향했다.

유잇청의 카야토스트 싸고 맛있었다
주문하면 사테를 이렇게 바로 구워준다
이 사테 정말 맛있었다 양념도 완전 맛남

 사테를 굽는 맛있는 냄새. 코를 킁킁거리며 가게로 들어가니 주인아저씨가 금세 알아보시곤 자리를 내주신다. 음, 사테 사이즈가 좀 작군, 그러면 일단 치킨 3개, 비프 5개 주세요! 하고선 맥주나 한잔 할까 했는데, 이럴 수가, 여긴 술을 안 판다. 어제도 느꼈지만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야, 술을 이리도 멀리하다니.(말레이시아는 이슬람 국가라 관광객들이 많은 음식점에서만 술을 판다) 아쉬운 대로 망고주스와 사테를 먹었는데, 짭조름하게 시즈닝이 된 부드러운 고기가 아주 맛났다. 결국 2개 추가해서 10개를 금세 먹어치웠다. 치킨사테는 하나에 0.7링깃, 비프는 0.8링깃. 10링깃 안 되는 돈에 이렇게나 맛있는 식사라니. 이 곳이 점점 더 좋아졌다.

리조트 내 극장에서 영화 상영도 해준다, 눈에 띄는 부산행!
혼자 극장을 빌려 보는 느낌이었다 덜덜

 사테를 먹고선 리조트로 돌아왔다. 뒹구르르 하면서 오후 4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왜냐면, 리조트 내 극장에서 오후 4시에 영화 부산행을 틀어준다는 안내를 보았기 때문에! 말레이시아에서 부산행이라니! 드라마 '도깨비' 공유에게 한참 빠져있는 나는 매일 도깨비를 한 회씩 보며 지난 며칠을 보냈는데, 여행으로 공유를 못 봤더니 금단현상이 생길 지경이었다. 나는 뭐, 여기서 특별히 할 일도 없는 멋진 잉여니까,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한다. 마젤란 건물에서 마리나 빌딩으로 이동하면 3층에 극장이 있다. 조그만 극장인데, 영화 상영이 임박했음에도 관객이 나 혼자밖에 없는 것 같다. 부산행을 한국에서 보기는 했지만, 나는 공포영화를 못 보는 소심한 사람이다. 공유 때문에 억지로 참으며 견뎌야 하나, 무서운데 하고 있는 찰나, 어느 외국 할아버지 두 분과 한 커플이 극장으로 들어온. '히유, 감사합니다. 혼자 보고 울 뻔했어요.' 했으나, 마지막 장면에 수안이가 울면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어찌나 찡한지 참지 못하고 또 눈물을 흘리며 극장 밖을 나서는 모습은 좀 모양 빠졌을 거다. 석양 볼 거라고 이쁜 롱드레스도 입었었는데...

수트라하버 퍼시픽 쪽 해변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석양이다. 나는 바다와 하늘, 석양 보는 것을 좋아한다. 바다를 좋아하지만 수영은 못한다. 물놀이도 사실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바다를 보는 거, 해변가를 거니는 것만 좋아한다. 이런 다소 이상한 취향이지만, 경건한 마음으로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바다가 보이는 리조트 바 자리에 앉아서 해가 지기를 기다린다.

리조트 내 알프레스코에서 먹은 락사르막, 특이한 맛이다
리조트 내 바에서 마신 다이키리와 티라미수

 마침 라라랜드 ost 중 epilogue가 흘러나오는데. 해가 저물어 가면서 바다에 내려앉고, 파도가 일렁여서 바다는 한순간 흐르는 금처럼 보였다. 이토록 웅장한 석양이라니. 동그랗고 붉게 흘러내려오다가 수평선 전체를 물들이고, 바다를 감싸안는 동안 내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카메라는 반의 반도 잡아내지 못했다. 이래서 과연 멋진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질 땐 카메라를 들이대기보다 더 선명한 눈빛으로 마주하라 했던가. 매일 지는 태양일뿐인데, 여기서 마주하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는 앞으로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까, 내 인생의 마지막 모습은 어떨까, 그런 생각들. 태양은 내일도 다시 뜨겠지만, 그게 오늘 내가 마주한 그것과는 다른 것일 테니.

리조트 앞에 앉아 하염없이 바라봤던 석양

대충 쉬러, 게으름 부리러 왔던 여행지에서 뒤통수를 쿵 하고 크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기분 좋게 피나콜라다를 한 잔 하면서, 다시 생각했다. 순간순간을 아쉽게 흘려보내서는 안 되겠구나. 한국의 일상에서는 이런 다짐을 너무 쉽게 잊고는 한다. 다시 한번, 반성!

여러 가지 얼굴을 보여주던 하늘

 한동안 여운에 빠져 라라랜드  ost를 들으며 리조트 여기저리를 거닐었다. 리조트 자체가 굉장히 커서, 로비와 복도만 돌아다녀도 산책이 된다. (사실 내 방을 한번 못 찾아서 헤매고 다녔던 적이 꽤 있다.) 지친 시점에 여기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이 되면 바람이 시원해지고 분위기도 낭만적으로 변한다

 내일도 오전에 조식을 먹고 산책을 할 것이다. 맑은 물속 물고기들에게 인사하고, 초록 나무들이 주는 공기를 마시고. 객실로 돌아와 조금 뒹굴거리다가, 캐리어를 컨시어지에 맡기고, 리조트 야외 카페에 앉아 어제 30프로 할인받아 산 오즈의 마법사를 읽을 거다. 다이키리를 한 잔 시켜놓고서 여행기도 쓰고, 사진을 정리하고, 넋 놓고 또 바다를 바라볼 테지. 모히토를 마시면서 마지막 석양을 보고선, 아쉬운 발걸음으로 그랩 택시를 타고서 공항을 향할 거다. 호핑투어 물놀이 한 번을 안 하고, 그저 좁은 범위 내에서 뒹굴거리면서 시간을 보낼 테지만, 나는 코타키나발루에서의 이 게으름이 왜 이리도 행복한 지 모르겠네.

   가끔 기억이 날 것 같다. 유난히 붉고 동그랗고 커다랬던 태양과, 내게로 와 닿는 듯 보석보다 빛났던 물결들, 맑은 물속 신나게 헤엄치던 물고기들도, 비린내 없이 머리칼 사이를 기분 좋게 어루만져주던 바람도, 여행 내내 파란색보다 하얀색에 가까운 모습만을 보여줬던 하늘도. 한국으로 돌아가면 더 행복하게 잘 살아야겠다 생각하며.

밤의 리조트 풍경,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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