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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Dec 17. 2023

슬램덩크 덕후는 가마쿠라 성지순례를 해야 합니다

도쿄와 사뭇 다른 매력적인 바다마을

 어렸을 때부터 슬램덩크 만화책, 애니메이션을 섭렵하고, 어른이 된 후에도 가끔 만화방에 가서 슬램덩크를 보며 살아온 나는, 올해 1월 '더 퍼스트 슬램덩크' 개봉 이후 해당 영화를 8번 관람했다. 자막, 더빙에 일반관, IMAX관, 돌비관 골고루. 그리고 그중 한 번은 후쿠오카 가서 봤다, 8월 31일 자로 일본 전국 영화관에서 슬램덩크가 내려간다길래. 처음 본 날 북받치는 감정으로 브런치에 글도 썼더랬다. 훌륭한 슬램덩크 오타쿠로 자란 내가, 코로나 이후 일본 여행길이 다시 열리자마자 가마쿠라로 달려간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 가마쿠라가 슬램덩크 배경지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강백호의 학교인 북산, 그리고 북산과 경쟁하는 능남, 상양, 해남이 가마쿠라가 소재한 가나가와 현 내 고등학교라는 설정이다)


https://brunch.co.kr/@saddysb/207




신주쿠에서 가마쿠라까지


 나는 숙소가 신주쿠였기 때문에 오다큐선을 타고 신주쿠-후지사와 역으로 이동, 후지사와에서 에노덴으로 갈아타고 가마쿠라를 돌아볼 생각이었다. 이 루트를 이용할 경우, '에노시마 가마쿠라 프리패스'(1640엔)라는 교통패를 이용하는 게 합리적이다. 이 패스로 신주쿠에서 후지사와까지 가는 교통편은 물론, 에노덴도 하루동안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다. 후지사와에서 에노덴을 타면 에노시마, 가마쿠라 코코마에, 시치리가하마, 이나무라가사키, 하세 등 가마쿠라까지 가는 중간중간 내려서 구경할만한 역들이 많기 때문에 매번 승차권을 결제하는 것보다 패스권을 이용하는 게 경제적. 다른 노선 얹는 거 없이 에노덴 노선만의 1일 자유 승차권 '노리오리쿤'도 있기 때문에 편한 걸 선택하면 되겠다.  


 신주쿠역의 오다큐선 출입구 쪽으로 가서 기계를 통해 '에노시마-가마쿠라 프리패스'를 발권했다. 메뉴를 영어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사용은 어렵지 않다. 먼저 왼쪽 사람 그림 모양 버튼 통해 인원수를 고르고, 화면에 보이는 'FREE PASS' 버튼을 누른다. 그러면 화면이 바뀌는데, 우측 하단의 빨간 배경색으로 되어있는 'Enoshima-Kamakura'를 버튼을 누르면 된다. 성인 1640엔, 나는 현금으로 결제했다.


신주쿠 오다큐선 출입구
티켓발권기
FREE PASS 메뉴를 누르고 우측 하단 붉은색 동그라미 '에노시마-가마쿠라'를 누른다
에노시마-가마쿠라 패스 가격을 안내하고 있는 회색 네모 버튼을 누르면 된다
신주쿠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이 종이 티켓이 필요하니까 잃어버리지 말자


 사실 가마쿠라는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올 3월에도 가마쿠라와 에노시마에 갔었는데, 바다 낀 고즈넉한 동네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꼭 다시 오고 싶었기에. 신주쿠에서 후지사와 역까지는 급행 전철로도 50분 정도 걸린다. 멍하니 앉아서 음악을 들으며 창밖 풍경을 바라본다. 이 날은 하늘이 파랗고 날씨가 참 좋아서 창밖에 비치는 마을들의 풍경도 더욱 예뻐 보였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만 조금 여유로운 것 같아, 잠깐 평일에 백수 된 호사스러운 기분을 누렸다.

 

전광판을 잘 보고 타자! 저 전광판으로 치면, 곧 출발하는  둘째 줄 RAPID EXPRESS의 FUJISAWA 행을 타면 된다!
전철 내 전광판에도 목적지가 영어로 안내되어 나온다


 후지사와 역에 도착해서 내리면 곳곳에 에노덴 갈아타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가마쿠라는 원래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였지만, 아무래도 슬램덩크 개봉 후엔 더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겠지. 안내판에는 한글도 적혀 있었는데, 역시 좋은 곳에 한국인이 빠질 수 없지 싶었다. 에노덴 상징색인 초록빛의 안내 사인을 유심히 보고 걷는다. 역 바깥으로 나가 육교 위를 걷게 되는데, 원래 그렇게 가는 거니 당황하지 말자. 곧 에노덴 승강장이 보이고, 마침 출발을 앞두고 정차해 있는 에노덴에 오를 수 있었다. 에노덴은 참 레트로한 분위기를 풍긴다. 일본에서도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쇼와풍 킷사텐(80년대 파르페나 나폴리탄, 오므라이스 같은 걸 팔던 다방 같은) 같은 곳이 유행한다고 하던데, 요즘 시대에 보니 더욱 예쁜 전철이다.


계단을 오르지 말고 개찰구를 나갑시다
에노덴선 안내를 잘 보고 간다
여.. 여길 나간다고?
저 육교 계단을 올라갔다
이 초록 사인이 보이면 잘 가고 있는 것
에노덴 승강장 도착!




에노덴을 타고서!


귀여운 에노덴


 에노덴의 명당은 맨 앞칸 앞자리다. 이유는 아래 사진처럼, 전면이 유리로 되어 탁 트인 전망을 보며 갈 수 있기 때문. 플래시를 터뜨린 사진이나 승무원 사진 촬영은 삼가 달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전망 사진을 찍다가 슬그머니 휴대폰을 내렸다. 덜컹덜컹하는 전철 소리와 조용하고 소박한 동네 풍경, 번쩍거리는 도쿄 도심과는 전혀 다른 매력이 느껴졌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사카이 마사토'가 나왔던 가마쿠라 배경의 영화 '운명: 가마쿠라 이야기'의 OST를 들으며 에노덴을 타고 있자니 더욱 감상에 젖어 날리는 기분.


이 레트로한 느낌이 정말 좋았다
에노덴 노선.


 에노덴에서 한국인 관광객들이 자주 내리는 역은 아래와 같다.


- 에노시마(역에서 내리면 대교를 걸어 섬으로 갈 수 있는데, 아담한 상점가와 멋진 신사가 있다. 날이 좋을 때는 후지산이 선명히 보임)


- 가마쿠라코코마에(그 유명한 슬램덩크 애니메이션 오프닝의 강백호 샷을 찍을 수 있는 곳)


- 시치리가하마(예쁜 카페, 멋진 식당들이 밀집한 동네)


- 하세(고토쿠인의 대불과 내가 사랑하는 절, '하세데라'가 있는 곳)


- 가마쿠라(가마쿠라 상점가 '코마치도리'와 신사 '츠루가오카 하치만구'가 유명)


 슬램덩크에서 강백호가 재활하며 앉아 있었다는 해변이 쿠게누마 해변 공원이라고 하던데, 그쪽을 먼저 가볼까 싶어서 쇼난카이간코엔 역에서 내려 무작정 바다를 향해 걸었다. 날이 워낙 맑았던 데다 바다 근처 동네라 선글라스는 필수다. 조용한 동네를 걷다가 '사카이가와'라고 적힌 다리를 건너면서 강가의 야트막한 집들이 이쁘구나 하고 고개를 들었는데 후지산이 보이는 거 아닌가! 후지산이 기운이 좋다고 하던데, 우연히 멋진 각도에서 후지산을 볼 수 있다니, 운이 좋았다.


평일이라 그런지 그리 유명하지 않은 곳의 역은 정말로 한산했다
저 멀리 보이는 후지산, 럭키!
이런 기차역이 있는 동네, 멋지다


 15분 정도를 걸었을까, 해변 일대 마을 특유의 바이브를 뿜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지도를 들여다보니 내가 점찍은 백호 스팟은 아직 요원한 듯하고.. 오늘 다른 곳도 많이 걸어서 봐야 할 텐데 하는 생각에, 깔끔하게 쿠게누마 해변 공원은 포기하고 역으로 돌아간다! 포기가 빠른 오타쿠.. 라기보단 저질 체력을 인정하고 중요한 것에 집중하는 오타쿠라고 포장해 본다.


재활 중인 백호 앞에 굳이 일본 국대로 뽑힌 걸 자랑하는 태웅이, 이 씬의 배경이 쿠게누마 해변 공원이라고 한다
여기 살면 까무잡잡하게 태워서 서핑하고, 조깅하고,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겠는걸!
곳곳에서 서핑샵이 눈에 띄었다
힙한 느낌의 가게들이 많았다




뜨거운 코트를 가르며~ 너에게 가고 있어~


 다음 목적지는 가마쿠라코코마에 역. 직역하면 가마쿠라 고등학교 앞 역이다. 슬램덩크 애니 팬이라면 이곳을 지나칠 수 없지! 백호의 뒷모습과 함께 에노덴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는 그 장면을 재현하기 위해 많은 팬들이 이 앞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다. 대부분이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인데 에노덴이 걸리는 장면을 찍기 위해서 버티고 있는 일부 사람들 때문에 인상이 찌푸려지기도.


바로 이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많은 팬들이 대기하고 있다

 

 내가 갔을 때도 어떤 중국인 여자분 두 명이 계속 앞에 서 있어서 다른 사람 사진에 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신경 쓰지 않았지.. 나는 이번에 띠웅이 피규어를 챙겨갔기 때문에 나 대신 띠웅이 사진을 찍어주었다. 토에이샵 공식 피규어인데 얼굴을 보면 서태웅이라기보다 서띠웅 같이 생겼음.. 많은 사람들이 백호를 생각하며 이곳에 오지만, 설정상 이곳은 능남고교 앞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러니 이 길은 윤대협과 변덕규가 걸어 다녔겠지.


 에노덴은 보통 한 시간에 네대 정도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인증샷 찍는 시간을 절약하고 싶다면, 에노덴에서 가마쿠라코코마에 정차 안내가 나오면 문 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역 밖으로 후다닥 뛰어가자. 백호 뒷모습 스팟에서 내가 타고 온 에노덴이 걸리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늦으면 다음 에노덴 올 때까지 15분 정도를 기다려야 함... 물론 이곳 앞바다는 너무도 아름답고 서핑하는 모습들 구경하는 재미도 있기 때문에, 이 역에서 시간을 오래 보내도 좋을 것 같다. 나도 3월 방문 때는 해변으로 내려가보기도 하고, 이 역 근처에 한 시간 넘게 있었다.


올 3월 갔을 때 모습, 오른쪽에서 에노덴이 들어왔으면 딱인데!
능남, 붓쯔부스..
낡은 듯한 역 모습이 오히려 유니크하고 멋지다
띠웅이 윤대협이랑 원온원하러 여기 자주 왔겠네..




서태웅 자전거 타던 곳 찾아가기


 다시 에노덴에 올라 '이나무라가사키'역에서 내렸다. 이 역에서 내려 고쿠라쿠지 역 방향으로 20분가량 걸으면 슬램덩크 신장재편판 2권 표지, 서태웅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방파제(?)를 볼 수 있기 때문. 서태웅 최애이신 팬분들 사이에서는 성지로 소문이 나 있다. 나 역시 인증샷을 찍기 위해서 만화책을 챙겨 들고 그곳으로 향했다. 이나무라가사키 역에서 바다 방향으로 나와 해변가를 따라 걸어가면 된다.


 걸으며 오른쪽으로 보이는 바다로 자꾸 시선이 간다. 철썩이는 파도에, 반짝이는 윤슬에. 정말 날 잘 골랐다, 이렇게 날씨가 좋으니 온통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 투성이잖아. 걷다가 사람들이 몇몇 모여있는 곳이 있어서 구글맵을 찾아보니 '이나무라가사키 곶'이란다. 이곳도 나름 후지산 명당 스팟으로 유명하다고. 어쩐지 등을 돌려 보니 멋진 후지산 전경이 보인다. 오늘 운 좋네. 그 간 일본 여행을 몇 번이나 했는데 후지산을 본 건 오늘이 처음이다, 그것도 다른 각도에서 두 번이나! (사실 이번 방문 때 후지산 버스투어를 신청했었는데, 신청한 사람 수가 최소 모객인원에 미달되어 취소되었다.. 또르르..)


저 앞에 보이는 게 이나무라가사키 곶
이나무라가사키 곶에서 바라본 후지산의 자태


 이나무라가사키 곶에서 사진 몇 장을 남기고 슬렁슬렁 발걸음을 옮겨본다. 이윽고 아 여기구나 싶은 지점에 도착했다. 정확한 주소를 말하긴 어렵지만, 신장재편판 2권의 표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태웅이 자전거 타던 곳은 여기구나!' 싶은 지점이 있다. 바닥에 타일이 깔려 있어서 구분하기 쉽다. 그리고 내가 이곳으로 진입하는데 슬램덩크 쇼호쿠 져지를 입은 여성분이 사진을 찍고 나오고 계셨기에.. 수줍어서 말 걸진 못했지만 슬램덩크 져지 입은 그분과 양손에 서태웅 피규어, 슬램덩크 만화책을 들고 있는 나.. 누가 봐도 슬램덩크 오타쿠들이잖나.. 말없이 '야 너두? 야 나두!'의 눈빛을 주고받으며 태웅이 존에 입성했다.


이 타일 깔린 길로 들어서면 된다
자전거 타는 서태웅.. 멋있어..

 

 표지와 풍경이 딱 들어맞는 장소가 어딘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타일이 깔린 방파제길 들어서고 곧 나오는 주차장 같은 곳 앞이 가장 잘 맞는 것 같았다. 감격하며 인증샷을 찰칵찰칵 찍었다(나 말고 태웅이 표지인 만화책을). 근데 만화책 표지에서도 그렇게 느꼈는데, 실제로 여기 와서 보니. '이 위를 자전거 타고 갔다고? 제정신이야??'싶다. 이 좁은 폭에, 이 높이에.. 너무 위험하잖냐!! 더구나 상습 졸음운전하는 태웅이를 생각하니 만화적 허용을 생각해도 오타쿠는 그만 불안해지고 마는 것이다. 운동하는 애가 몸이 재산인데 이 놈 자식이, 좀 조심히 다니지 않고!


이 위를 졸면서 자전거 타면 바로 입수다 태웅아
위험하니 올라가지 말라고 쓰여있잖니, 태웅아

 

 비단 태웅이 존이어서 뿐 아니라(이곳은 '사카노시타'라는 멀쩡한 지명이 있음에도 오타쿠에게는 태웅이 존이다), 바다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길을 따라 걸으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파란 하늘에 그 보다 더 파란 바다에, 햇빛에 반짝이는 윤슬, 바람에 밀려 철썩이며 부서지는 파도소리. 아, 지금 슬램덩크 노래 들어야지! 싶어서 선택한 bgm은 애니메이션 판 노래 '너를 좋아한다고 외치고 싶어'. 마치 내가 슬램덩크 속 북산고교 학생이 된 것 같고, 부활동 하러 가는 길인 것 같고, 서태웅 친위대로서 깃발 들고 응원해야 할 것 같고.. 현실은 부활동 하는 학생보다는 부활동 담당 선생님에 더 가까운 나이라는 것이 함정. 하지만 기억과 음악의 힘이라는 것은 너무도 대단하다. 지금 나는 TV 속 슬램덩크에서 태웅이가 대단히 활약하는 장면을 두 손 꼭 모으고 보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이런 감각을 언제까지고 느낄 수 있다면, 영원히 늙지 않을 것만 같다.


 행복한 마음을 가지고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어느 해변에 도착했다. 여기가 어디지 싶어 구글맵을 보니 '유이가하마 해변' 초입인 것 같았다. 이토록 평화로운 해변이라니. 근처에 편의점이 있었는데, 그 편의점에서 먹을걸 사서 해변을 보며 먹으면 참 좋겠다 싶었다. 평일이고, 조금 쌀쌀한 날씨라 사람들이 많이 없어서 더 좋았고. 가만히 서서 파도 철썩이는 것만 봐도 이렇게나 재미있다니. 여기서 난 참 쉽게 웃고, 쉽게 즐거워한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풍경에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아담하고 조경이 멋진 절, 하세데라


 사실 이나무라가사키역에서 이곳까지 걸어온 것은 태웅이 존을 훑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하세데라를 가기 위함이기도 했다. 하세역에 내려 10분 정도 걸으면 도착하는 절, 하세데라. 나는 유이가하마 해변에서 조금 시간을 보내고, 하세데라를 향해 걸었다. 날씨가 좋아서 걷는 것도 즐거웠다.


 하세데라는 올해 3월, 처음으로 방문해 보고 홀딱 반했던 곳이다. 그때는 어여쁜 복숭아꽃과 절 가운데의 커다란 벚꽃나무를 즐기고 왔었다. 하세데라 정문 앞의 소나무가 정말 명물인데, 아쉽게도 내가 방문한 오늘은 소나무가 이발을 하고 있었다(조경공사). 키오스크로 400엔의 비용을 치르고 입장권을 샀다. 8개월 만에 다시 발을 들인 하세데라. 계절이 바뀐 만큼 나무들의 인상만 변했을 뿐, 그때의 분위기 그대로다. 그다지 붐비지 않고, 나무와 연못의 조경이 아름답고, 흑백 톤의 본당이 단정하면서도 올곧은 느낌을 준다.


3월 방문했을 때 봤던 하세데라 앞의 멋진 소나무
입장료는 400엔이다.
관음보살 오마모리도 하나 샀다


 계단을 올라 본당으로 향했다. 절도 있고, 금욕적인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커다란 관음보살불상에 절을 올리고 돌아 나오는데 오마모리(부적)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작년 11월에는 교토의 청수사에서 오마모리를 샀었는데, 올해는 여기서 사볼까 해서 구경하다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오마모리를 구입했다(700엔). 참고로 '하세데라'라고 하면 나라에 있는 하세데라가 더 유명하다. 오마모리를 사면서 여기와 나라의 하세데라가 뭐가 다른지 물어보니, 같은 관음보살을 보시고 있다고 한다. 다만 규모는 나라 쪽이 더 크다고. 다음에는 나라의 하세데라에도 가봐야겠군 싶다.


 본당을 나와 가마쿠라의 전망을 내려다보면서 쉴 수 있는 곳으로 가보았다. 3월에 볼 때는 벚꽃이 지천이었는데, 이번에는 나뭇가지들이 앙상하다. 그렇지만 탁 트인 시야로 보이는 풍경이 나쁘지 않았다. 매점에서 당고를 팔고 있길래 하나 사들고 풍경을 내려다보면서 우물우물 먹었다. 말랑 뜨끈한 당고에 짭짤하고 달콤한 간장 소스의 조화를 내가 어찌 거부할 수 있을까.


내려다본 가마쿠라 풍경
말랑말랑 맛있었던 당고
절이 잘 관리되고 있는 듯하다
경내를 슬렁슬렁 산책하는 게 좋았다


 두리번거리면서 다니다가 굴껍데기 에마가 걸려있는 걸 발견했다. 보통은 나무로 된 판때기에 소원을 쓰는데 여긴 굴껍데기군. 300엔을 넣고 내가 좋아하는 하늘색의 끈이 달린 껍데기를 하나 집어 간결하게 소원을 썼다. 이런데 오면 다른 사람들이 쓴 소원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한데, 여긴 구석에 있어서일까 한글로 써진 에마는 발견하지 못했다. 다른 한국분들이 오시면, 내가 쓴 걸 읽어보실 수 있겠지! 뭔가 나무보다 친환경적인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소원 한 번 쓰는데 300엔!
굴껍데기 에마라니, 기발하다!
헌화된 꽃들이 싱싱했다
여기서 물을 저 동상에 끼얹어 주고 있었다


 본당에서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오니 여유롭게 연못을 유영하는 잉어들이 보이고, 그리 넓지는 않지만 공들여 가꾼듯한 하세데라의 조경이 눈에 들어온다. 하세데라 곳곳을 돌아다니다 화장실 건물 옆에서 공들여 나무를 손질하고 있는 직원분을 봤다. 그다지 사람 눈이 안 닿을, 구석진 곳이었는데도 물을 주면서 세심히 살피고 있었다. 직원 분이 다듬은 흔적 속에 있고 싶어서 굳이 벤치에 앉아 바람소리를 들었다. 나는 식물 가꾸기에는 도통 재주가 없는 사람이라, 우리 집에 들어온 식물은 바싹 마르기 일쑤인데.. 신기하게도 죽어가는 화분을 부모님 계신 본가로 데려오면, 금세 생생하게 살아난다. 식물을 대하는 마음가짐의 문제일까나.


 그 반대쪽으로 걸어오면 웬 저택 같은 출입문이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 보면 자갈이 깔린 정원. 일본은 옛날에 자객들의 침입을 쉽게 파악하기 위해 모래나 자갈을 깐 정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들의 발자국이 남을 테니. 그래서 닌자는 지붕을 달렸던 걸까나? 정갈한 일본 전통 가옥처럼 생겼다는 생각을 하며, 여긴 누가 사는 걸까 부러워졌다.


잉어 개체수가 그리 많지 않아서 더 좋아 보였다
참으로 정적인 풍경
정갈한 일본 전통 가옥에 놀러 가는 느낌이 들었던 대문
일본 전통의 자갈 정원 형식




가마쿠라 코마치도리


 하세데라를 나와 하세역에서 에노덴을 타고 종점인 가마쿠라로 향했다. 이곳 코마치도리는 식당, 카페, 잡화점 등 다양한 가게들이 모여있는 상점가다. 도쿄 아사쿠사 센소지 앞의 '나카미세도리'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곳. 거대하고 빨간 도리이를 기점으로, 구경할만한 좋은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쓰루가오카 하치만구' 가는 길목이기도 해서 사람들로 붐빈다. 나는 이곳에서 늦은 점심 삼아 우동으로 유명한 '미요시'를 가려고 했는데, 이미 문을 닫았더라. 가마쿠라의 음식점들은 재료가 떨어지면 가차 없이 문을 닫는다. 맛집이면 더더욱. 허망한 마음으로 뒤돌아 섰는데 눈앞에 크레페 집이 보였다.


코마치도리의 시작을 알리는 커다랗고 빨간 도리이
코마치도리는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가게 이름이 '코쿠리코의 크레이프'인 듯


 사람들이 크레페 가게 앞에서 맛있게 먹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도 먹고 싶어졌다. 들어가 보니 자판기에서 메뉴를 골라서 점원에게 제출하는 방식이다. 한글로 된 메뉴도 있기 때문에 고르는데 어렵지는 않았다. 내가 선택한 것은 생크림 사과(550엔). 자판기에서 티켓을 뽑고, 크레페 주문을 하려는 사람들 뒤로 줄을 섰다. 이곳은 주문 넣으면 그 자리에서 직원분이 얇은 크레페 반죽부터 만들어 주신다. 그래서 따끈따끈 갓 만든 크레페를 먹을 수 있다! 직원 분께 주문한 메뉴를 말하고, 티켓을 직원 분 앞에 놓인 작은 쟁반에 올려놓으면 된다.


 이윽고 건네받은 크레페. 하라주쿠의 크레페와 비교하자니 한결 소박한 비주얼이었다. 근데 이 크레페, 반죽이 너무 고소하고 맛있었다. 안의 내용물은 생크림과 설탕에 조린 사과로 심플. 근데 반죽이 맛있어서 자꾸 들어갔다. 가게 안에 여유 있게 앉아 먹을 테이블 같은 건 없기 때문에 간이로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코마치도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먹었다. 가게 안에도 주의문구가 쓰여있는데, 이곳은 가마쿠라, 솔개의 습격이 번번이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에 걸으면서 먹는 건 삼가 달란다. 안 그래도 지난번 에노시마에서 휘휘- 소리를 내며 나는 커다란 솔개들을 보고 잔뜩 겁먹었었는데.. 먹을 걸 손에 들고 걷다간 언제든 솔개의 타깃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할 것! 웬만하면 가게 앞에서 먹고 이동하자.


자판기에서 원하는 메뉴의 티켓을 산다
한글로도 메뉴이름이 나와있다!
솔개 조심!
내가 주문한 애플 생크림 크레이프!


 사실 이 날 우동이 실패하면 가마쿠라 역 근처의 'sahan'에서 식사를 하려고 했다. sahan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오가와 이토'의 가마쿠라를 배경으로 한 소설 '츠바키 문구점'에 나온 식당으로, 지난 3월에 방문해서 정갈하고 맛있는 식사를 즐겼던 곳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달려갔으나 이곳도 재료가 소진되어 문을 닫았다! 어째서... 가마쿠라에서 밥 먹으려면 민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웨이팅과 완판, 재료 소진 시 셔터 내림의 나라 일본에서 나는 너무도 안일했다. 식욕을 잃은 채 다시 코마치도리로 돌아왔다.


sahan 문 닫았어 엉엉 ㅠㅠ


https://blog.naver.com/saddysb/223069294228


 아까 크레페를 먹었기 때문인지, sahan의 식사를 놓쳤기 때문인지 조금은 주눅이 들어있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B-SIDE LABEL'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캐릭터/애니메이션/오리지널 스티커와 배지 같은 제품들을 파는 곳인데, 체인점이고 도큐핸즈 같은 문구점에도 입점해 있는 곳이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지, 가게 안으로 자동으로 들어간다. 산리오를 비롯해, 포켓몬, 원피스 등 인기 애니메이션 스티커와 배지들이 잔뜩 있었다.


 이번에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배구 만화 '하이큐' 스티커와 배지. 올 10월에 새로 나온 라인업인 듯했다, 처음 보는 것인 거 보니. 그러면 또 사야지! 작은 스티커지만 가격은 하나당 300엔씩 한다, 비싸.. 욕심내지 말고 조금만 살 테다 하고, 학교 별로 최애 한 명 씩만 골랐더니 네코마의 켄마, 카라스노의 스가와라, 이나리자키의 아츠무, 세이조의 오이카와가 남았다. 고르고 골랐는데, 다 각 학교의 세터들이다 ㅋㅋㅋ 나 세터 좋아했네.. 배지도 세 개 집었다. 가마쿠라의 밥 집을 다 헛걸음해서 서글펐던 기분이 조금 좋아지기 시작했다. 오타쿠란 이렇게나 단순하다. 계산대로 갔는데 계산해 주시는 직원분이 언뜻 봐도 ENFP, 여행 왔다고 하니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부터 해서 이것저것 명랑하게 말을 걸어주셨다. 서비스라며 '웰컴 투 도쿄'라고 가타카나로 써져 있는 캐릭터 스티커도 주셨다. 나의 가마쿠라 여행은 슬램덩크로 시작해 하이큐로 마무리 짓는구나, 어쩌면 오타쿠로서 가장 행복한 결말인지도. 아무도 요구한 적 없지만 서태웅 친위대로서 스스로 서태웅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준 하루라고 자평하며 뿌듯한 마음올 도쿄로 돌아왔다.


산리오 스티커, 배지, 귀걸이, 마스킹 테이프까지!
내 눈길을 끌었던 하이큐 제품들
좋아하는 애들 고르다 보니 각 학교 세터들만 모여있네, 나 세터 좋아하네 ㅋㅋㅋ
금세 기분이 좋아진 오타쿠! 내가 이렇게나 단순하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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