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을 맞아 한창 바빴던 일들이 끝나고, 사뭇 추워진 날씨에 뜨끈한 노천 온천에서 몸을 녹이고 싶어 졌다. 기왕이면 혼자 느긋하게 머물면서 대접받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런 곳에서. 그래서 정하게 된 목적지는 가깝고 물 좋은 규슈의 유후인. 워낙에 온천 관광지로 유명하고 료칸이 많은 곳이라, 출국하기 일주일 전이라는 촉박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예약 사이트 통해 어렵지 않게 개인 노천온천이 딸린 료칸을 예약할 수 있었다.
후쿠오카 공항에 내려 첫날은 후쿠오카 시내에서 먹고 마시고 쇼핑하며 시간을 보내고, 이튿날 아침 부지런히 짐을 챙겨 하카타 역으로 향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은 물론 온천이었지만, 아침부터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나서면서도 콧바람이 났던 것은 후쿠오카에서 유후인으로 향하는 특별한 테마열차 유후인노모리를 타게 되었기 때문이다!
후쿠오카에서 유후인으로 이동하는 것은 버스나 열차들이 많기 때문에 어렵지 않다. 그중에서도 초록빛 열차 색깔이 멀리서도 눈에 띄는 유후인노모리는 후쿠오카에서 유후인으로 가는 가장 낭만적인 교통수단인데, 목재를 재사용해서 만든 친환경적인 요소도 멋지지만 열차 내부의 고전적인 인테리어나 숙련된 직원들의 투철한 서비스 정신으로도 유명하다. 일본에는 워낙에 다양한 디자인과 테마의 열차들이 많고 소위 말하는 열차 덕후들도 많은데, 그 덕후들이 가장 애정 하는 열차 중 하나라고 한다.
하루에 왕복 편 합쳐도 10편이 채 안 되는, 성수기에는 특히 예약하기 힘든 열차지만, 이번 여행에서 나는 운이 좋게도 왕복 편을 다 유후인노모리로 예약할 수 있었다. 열차 맨 앞칸 앞자리로 예약하면 달리면서 보는 전망이 압도적이라고 하던데 나는 늦은 시점에 겨우 예약한 거였기 때문에 열차 중간 자리로 예약. 하지만 색깔이 그라데이션 되듯 열차 창밖 풍경이 후쿠오카 도심에서 공장지대, 울창한 수풀, 일본 시골 가옥형태로 바뀌어가는 것을 보니 통유리 전망이 아니어도 지루할 틈 없이 즐거웠다.
아침식사로 열차에서 먹으려고 하카타 역에서 산 와규 도시락을 까서 뜨끈한 쌀밥 위에 소고기를 큼지막하게 얹어 한 입 가득 넣으니, 도시락이지만 웬만한 고깃집의 소고기 퀄리티 정도 되는 그 맛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따뜻하게 먹어야 하는 도시락이라며 점원이 정성껏 데워준 데다, 달짝지근한 간장 양념에 절여진 부드러운 소고기가 맛있어 아침부터 우걱우걱 과식해버렸다. 진한 녹차 음료로 입가심을 하고 정신을 좀 차리고 보니, 만화 은하철도 999에서나 본 듯한 복장의 직원분들이 칸마다 돌아다니며 기념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유후인노모리 사진에 그 날의 날짜가 적힌, 어찌 보면 참 만들기 쉬운 패널이다. 하지만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닌 ‘유후인’으로의 여행인 데다, 이 아름다운 열차를 큰 맘먹고 선택한 나를 비롯한 신난 승객들에게 그 패널은 강렬한 추억거리가 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패널을 들고 웃음꽃을 피우면서 사진을 찍고 있자니 이 열차 칸에 탄 사람들을 생판 처음 보는 데도 불구하고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유후인으로 가는 길에 멋진 곳에 들어서면 열차는 일부러 속도를 느리게 하면서 방송으로 그 풍경을 설명해주어 승객들로 하여금 창 밖 풍경을 충분히 즐기게 해 준다. 마을과 인접한 철길이나 정차하지 않는 역들을 지나갈 때에도 속도를 줄여준다. 유후인노모리의 사진을 찍으려고 우리 열차를 기다리면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이다. 다른 열차를 기다리며 역에 서있는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손 흔들어주면 열차 안의 우리들도 웃으며 손인사를 한다.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면 이 여행은 무조건 합격이다. 1시간 40분여 달렸을까, 기분 좋은 감성에 빠져 어느덧 유후인 역에 도착했다.
유후인 역에 내리면 거침없이 코인로커에 짐을 넣어놓고 여기저기를 구경한 뒤, 다시 역으로 돌아와 료칸에서 보내주는 송영차량을 타고 이동하는 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항상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유후인이기에, 역 가까이의 코인로커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이럴 때는 당황하지 말고, 역 오른쪽에 있는 인포메이션 센터로 향할 것!
인포메이션 센터에서도 캐리어 같은 큰 짐을 맡길 수 있다. 센터 내에도 코인로커가 있고, 호텔 로비처럼 별도 공간에 번호표를 달아 사람이 짐을 보관해주는 서비스도 제공한다. 원한다면 추가 비용을 들여 짐을 머무는 숙소로 보내주는 서비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송영차량을 탈 것이기 때문에 짐만 맡기고서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유후인 거리 구경을 나섰다.
사실 7년 전에 유후인에 엄마와 한 번 와본 적이 있었기에, 이번에 혼자 가도 그리 낯설지 않겠군 생각은 했지만 직접 와보니 마치 한 달 전에 왔다 갔던 기분이 들 정도로 변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7년 전처럼 금상 크로켓에서 크로켓을 먹고, 길가의 벌꿀 소프트 아이스크림 집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도토리의 숲(만화 이웃집 토토로에 나왔던!) 가게 앞에서 토토로와 사진도 찍었다. 롤케이크로 유명한 비 스피크에도 갔지만 롤케이크 작은 사이즈는 품절이라고 해서 지난번처럼 또 못 사 먹었다! 나름 오전 내 도착해서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벌써 품절이라니, 여행지를 설렁거리며 다니는 나로서는 이번 생에 그 롤케이크 먹기는 틀린 모양이다.
역에서 넉넉잡아 30분 정도 걸어가면 킨린코호수를 맞이할 수 있는데, 이 곳은 아침 일찍 오면 물안개가 피어나는 장관을 보여준다. 그리고 녹음 가득한 산과 호수, 예쁜 전통 가옥이 조화된, 분위기 있는 모습 때문에 항상 단체 관광객들로 붐비는 사진 찍기 포인트가 되어 버렸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맑게 떠있었기 때문에, 그저 싱그러운 초록 산 풍경을 새초롬히 등 뒤에 얹은 평범한 호수였지만 말이다.
음악을 들으며 호수 주변을 하릴없이 거닐면서, 사진도 많이 찍고 놀다 보니 어느덧 송영서비스를 신청한 오후 4시가 다가왔다. 유명하다는 우유푸딩과 편의점에서 주전부리 몇 개 사서 후다닥 뛰어,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캐리어를 다시 찾아 유후인역에 도착하니 딱 4시.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료칸의 경우 산 중턱에 위치해 있어 주변에 진짜 아무 시설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먹을거리들은 미리 사서 들어가는 것이 좋다.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료칸 차가 와서 데려가는데 나는 10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 역 앞에서 고객을 찾고 있는 다른 료칸 직원에게 내 료칸 이름을 대며 혹시 여기 차는 아직 안 왔냐고 여쭤보니, 친절하게도 우리 료칸에 전화해서 손님이 기다리는데 차가 출발했냐고 여쭤봐 주신다. 감사인사를 5번쯤 하고 나니, 우리 료칸의 차가 도착했다. 차가 좀 막혀서 늦었다며 미안하다고 연신 사과하시는 아저씨에게 ‘아니요, 괜찮습니다’하는 대화를 하면서 십여분을 달렸을까, 정말로 도로와 산 밖에 없는 고립된 곳의 료칸에 도착했다.
이렇게 고립된 곳의 료칸을 고른 것은,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곳에서 조용한 산 소리를 들으며 뜨끈한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있기 위해서였다. 료칸에 도착하자 저녁은 몇 시에 먹겠냐고 여쭤보시는데 6시로 준비해 달라고 하고서 안내해주시는 나의 방으로 이동했다.
일본식 다다미가 깔린 와실. 그리고 베란다처럼 생긴 곳의 문을 열면 눈에 들어오는 나만을 위한 노천 온천. 세 사람이 들어가도 충분할 것 같은 온천 크기와, 온천 너머 산 능선이 보이는 풍경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다다미는 난방이 안되기 때문에 틀어놓은 온풍기로 실내가 뜨끈 건조해서 하루 종일 많이 걸었던 온몸이 더 노곤해지는 기분이었다. 짐 정리를 하고, 료칸의 유카타로 갈아입고 나와 주변을 산책하면서 오랜만에 산속 공기를 들이마셨다. 후욱-하고 들이마시는 숨에 회색빛이었을 내 폐 속이 조금은 초록색으로 변한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
다시 방에 들어와 있으니 6시 10분 전에 프런트에서 준비되면 나와서 식사를 하라는 안내 전화를 해주었다. 익숙지 않은 게다를 신고서 종종걸음으로 식당에 들어서니 나만을 위한 정성스러운 일인상이 차려져 있다. 가이세키 요리를 신청해놨기 때문에 전채와 본식, 디저트까지 나의 먹는 속도에 맞추어 준비해주셨다.
‘좋은 요리에는 술 한잔 같이 해야지’하는 생각으로 맥주 한 병을 추가했다. 전채요리를 깔아놓고 직원은 열심히 재료 설명을 해주셨고, 설명이 끝나자마자 구운 두부를 한 입 먹으니 만족스러운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개인 화로에 구워 먹는 두툼한 소고기는 양이 적어 아쉬웠지만 그 부드러움이며 육즙이 일품이었고, 새우나 가리비 같은 해산물들도 맛있었다. 나는 생선회를 먹지 않지만 이 정도 기분이면(술기운이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으로 참치회를 입에 조금 넣어봤다. 오, 생각보다 괜찮은데 하며 정체모를 하얀 회도 조금 떼서 먹었더니 갑자기 비린맛이 확 올라온다. 역시 무리였어! 하며 나의 회에 대한 도전은 거기서 중단. 맥주로 입가심하고 따끈한 쌀밥을 씹으니 좀 전까지 역했던 속은 어디 가고 다시 또 음식에 탐닉하게 된다.
디저트로 나온 음식들까지 먹어치우고 나니, 이제 온천 좀 해야겠다 싶다. 잘 먹었습니다- 인사를 남기고 방으로 돌아오니, 직원이 나를 위한 이부자리를 펴놓았다. 식사하러 가 있으면 이불을 깔아주겠다고 하더니 정말 몸만 쏙 들어가 바로 자면 되도록 폭신하고 무거운 이불을 깔아놓았다. 성인이 된 이후 누군가가 나를 위한 이부자리를 이렇게 정성스럽게 준비해준 적이 있었던가 싶다.
더 추워지기 전에 샤워하고 온천탕에 들어가야지 싶어 수건들을 챙기고 노천탕으로 나갔다. 개별 노천탕이라 머무는 동안 언제든 내가 원하면 온천을 할 수 있고, 누구의 눈치도 안 봐도 되는 공간이라 좋았다. 탕이 있는 곳은 말 그대로 야외인지라 샤워를 하면서는 조금 추웠지만 탕 속에 쏙 들어가 몸을 담그니 ‘어후~’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얼굴을 시원하고 몸은 뜨끈한, 기분 좋은 이질감.
해는 이미 져버려서 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가운데 희미하게 산 능선 형태만 보이고. 탕 속에서 고개를 드니 그 어떤 건물의 방해도 없는 하늘이 눈 안에 가득 들어왔다. 오늘 먹은 것, 생각한 것, 지금 이렇게 몸을 담그고 있는 것 모두 정말 나 자신을 위한 선물이 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온천을 하고 나오니 목이 말라 시내 편의점에서 골라온 호로요이를 한 캔 하면서 감자과자를 먹었다. 온몸의 피로가 녹아 사라지는 듯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무겁고 폭신한 이불을 덮고 꿈도 없는 깊은 잠을 잤다.
이른 아침 눈이 떠져 또 온천을 하기로 했다. 해가 뜨려고 하는 찰나의 온천은 스물 거리는 안개가 일어나는 듯,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이런 곳에 한 달만 살면 정말 건강이 좋아질 수밖에 없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은 8시에 먹겠다고 했다. 어김없이 10분 전에 방으로 전화로 알림을 준다. 1박이라는 짧은 기간이라 곧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도 잠시, 정갈하게 차려진 아침 밥상을 보니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이 곳에서의 나는 편식 따위 하지 않는 세상 착한 아이다!(회는 빼고..) 아침부터 비가 보슬거리며 와서 산 중턱의 이 료칸을 더 분위기 있어 보이게 했다. 한 곳의 장소를 맑은 날과 비 오는 날, 함께 겪어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하늘이 돕는 여행이다 싶었다.
방으로 돌아와 짐을 챙기고 료칸의 송영서비스를 받아 다시 유후인역으로 돌아왔다. 어제처럼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캐리어를 맡기고 자연스럽게 킨린코 호수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가 오는 흐린 날씨 탓에 호수에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누가 CG로 작업해놓은 것처럼 정말로 선명한 물안개가 살아있는 생물인 양, 서서히 이동하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역시 여기는 새파란 하늘보다 회색빛 흐린 하늘이 더 어울리는 곳이었어! 마침 아직 단풍이 있던 시기여서 한 발짝 늦은 단풍놀이를 즐기고서, 아까 호수로 들어오며 봐 두었던 마메시바 카페를 가기로 했다.
마베시바는 일본 전통견인 시바견 중에서도 덩치가 작은 시바견 종류를 말한다(‘마메’는 일본어로 ‘콩’이라는 뜻!). 이용시간은 30분, 한국의 애견카페들처럼 차 한잔을 내어주는데 차이점이라면 마루처럼 펼쳐진 다다미 방에 나랑 마메시바들이 같이 철퍼덕 엎어져 있을 수 있다는 것. 긴린코 호수 주변을 방황하며 여기저기 사진 찍느라 우산 들 손이 없어 비를 고스란히 맞은 처량한 꼴을 하고 들어간 곳이었지만, 내 카디건에 죽일 듯이 달려드는 강아지들 덕에 모든 것이 보상되는 기분이었다. 나라를 불문하고 강아지들은 정말로 천사인 것이 틀림없다!
후쿠오카로 돌아가는 유후인노모리를 타러 다시 역으로 돌아왔다. 비 내리는 풍경을 유후인노모리 안에서 바라보는 것도 너무나 낭만적이었다. 유후인에서의 1박 2일은 짧았지만 차분하고 알차게 보낸 시간들이었다. 무엇보다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에게 무리함을 강요하지 않았고, 좋은 공기와 음식과 여유를 주는 시간들이었기에 더욱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