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벤츠 타고 샤워 동냥을 다니는 이유
방금 전 <궁금한 이야기 Y>라는 티비 프로그램을 한참동안 심각한 표정으로 쳐다보다 불현듯, 트라우마란 영영 지워지지 않는 고약한 멍자욱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지날 수록 더 넓게 퍼져 결국 한 생애를 짙은 어둠에 빠뜨리고, 빠져나오려 해도 앞이 보이지 않아 주저앉게 만드는 그런 치명적인 멍.
신축아파트에 살고 벤츠를 타며 다달이 남편이 주는 생활비와 카드를 받으면서도 늘 어린 아기를 안고 남의 집을 전전하며 샤워 동냥을 다니는 여자.
남의 집 앞에 놓인 택배 상자를 훔치고 중고 거래 어플에서 공짜 기저귀 나눔을 기다리는 여자.
꽤나 상습적이라 이미 맘카페에선 유명하다고 한다.
이번엔 아이만 덜렁 있는 집에 들어가 샤워하는 바람에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란 아이 엄마의 신고로 결국 경찰에 연행 됐고, 제작진도 그녀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일대일로 마주한 여자는 매우 지쳐보였다.
어디론가 끝없이 도망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번듯한 아파트와 좋은 차, 경제력 있는 남편도 있는데.
대체 왜 그럴까?
어린 시절 아버지가 진 빚 때문에 가세가 휘청해 강박적으로 돈을 아끼게 됐단다. 학창시절 버스비가 아쉬워 걸어다녔고 그렇게 모인 버스비를 고스란히 엄마께 드릴 만큼 고운 맘씨를 가졌단다. 하지만 가난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고 계속해서 무자비하게 그녀를 갈취했을 터, 그 결과 강박이 자신을 집어삼켰고 도벽까지 얻었다고.
결혼해서 아기까지 낳았지만 그녀의 멍자욱은 옅어질 기미도 없이 계속 광범위로 퍼져나갔다.
이어지는 독박 육아에 우울증까지 겹쳐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그렇게 전신이 시커멓게 멍든 것이다.
아마도 가장 심하게 멍이 든 곳은 심장이겠지.
그녀의 그릇된 행동을 두둔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그렇게 행동하게 된 데에는 그럴 듯한 개연성이 있었다고 본다.
각자만의 진실이 있듯 각자만의 아픔도 있는 거다.
이렇다할 처방 없이 살아온 그녀는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뤘지만,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그녀의 아이도 그러하며
그녀의 남편 역시 꿈꾸던 결혼생활을 할 수 없었다.
부디 치료 뒤에 그녀가 행복을 되찾길 바란다.
트라우마는 타산지석이 되어 더 나은 삶을 살게 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악마의 형상으로 나타나 우리를 벌벌 떨게하고 스스로 자멸하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우리는 두렵지만 똑바로 서서 그 악마의 눈을 응시할 줄 알아야겠다.
어차피 그것은 나를 죽이지 못한다. 내 스스로 자멸할 수 있을 뿐.
살다가 어딘가에 멍이 들면, 적절한 찜질과 연고를 처방하자.
내일 아침이면 엷어진 상처에 희미하게 웃어보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