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풍선꽃언니 Jul 07. 2021

고등학교 동창 R과의 만남

서로 다른 삶

집에 동창 R이 놀러 왔다. 우린 고등학교 때 같이 어울리던 한 반의 동무였다. 지난 십삼 년간 홀연히 사라졌다가 작년 겨울 즈음 갑자기 나타난 인물.


R한테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고 했을 때 엄마는 말했다.

옛 친구한테 연락이 올 때는 좋은 일이 있거나 안 좋은 일이 있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 잘해줘

R과 보낸 시간은 인생에 4년 남짓이었는데 나는 R을 무척 아꼈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R과의 추억은 십여 년 전 함께 무의도에 놀러 갔다 왔다는 것과 우리 집에서 가끔 R이 자고 갔다는 것 두 가지. 그렇지만 R은 재수와 반수를 하다가 이내 공무원 공부를 한다는 말을 남기곤 내 인생에서 잠수를 해버렸고 당시에는 좋아했던 친구가 그런 식으로 절연하자 멀어지고 어쩔 것도 없이 나도 연락을 끊었다. 그러다 갑자기 작년 겨울 십여 년 만에 R은 연락을 해왔고 나는 경계하는 마음 반 반가운 마음 반으로 R을 맞았다.


R은 원래도 예뻤지만 더 예뻐지고 날씬해져 있었다. 갑자기 왜 옛 친구들을 찾고 싶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R은 본가인 일산을 떠나 강원도 원주에서 터 잡고 살고 있다고 했다. 우린 어려서 잘 모르던 가정사를 얘기 나눴고 나는 R의 환경이 나와는 많이 달랐음을 느끼며 새삼 멀어져 있던 시간만큼의 거리감을 느꼈다.


R은 힘든 시기가 두 번 있었다고 했지만 그게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연락을 끊었던 앙금이 남아 있었는지 R에게 나도 모르게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R은 면접 보듯이 물어볼 거냐며 웃었다. 그렇게 들은 얘기가 공무원 공부한다고 사라진 후로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고 중소기업에서 4년간 일하다가 최근에 보험설계사로 전향했다는 얘기였다. 부모님의 이혼과 어려웠던 형편, 가정이 공중분해 되기까지 얘기를 포함해서.


나는 이제 그런 얘기들을 들으면 사정이 있었겠지, 여기고 넘길 만큼은 성숙했고 더 자세히 묻는 건 실례인 줄도 알아서 질문을 멈췄지만 조금 허무했다. 우리의 잃어버린 십삼 년은 R의 의도적 선택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꽤 오랜 시간을 나는 R과 내가 왜 그랬을까 고민했었는데 그랬던 나 자신이 소심하고 바보같이 느껴졌다. 


다만, R의 다정함은 여전했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R은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나를 안고 울어줬고 멀리 원주에서 올라와 우리 집에서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와 오랜 시간을 보내려고 저녁 일곱 시에 아빠와 저녁 약속을 했다고 했지만 난 R을 오후 다섯 시에 보냈다. 몰찼던 우리의 이별과 세월을 거스른 다정함 사이에서 혼란을 느꼈기 때문에 내겐 R과 함께 나눌 공감대를 찾아나갈 시간이 필요했다. 


R은 결혼을 곧 하게 될 것 같다는 좋은 소식도 가지고 왔다. 엄마 말대로 옛 친구의 갑작스러운 연락은 좋은 일이 있거나 나쁜 일이 있을 때라더니 그 말이 일부는 맞는 것 같다.


오늘은 좀 힘들어서 R과의 만남을  좀 짧게 줄였지만 또 언제 갑자기 R이 증발 해버리더라도 우리가 공유한 과거가 진심이었다고 믿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R을 집에 들였고 복잡한 감정으로나마 일상을 나누며 두 시간을 함께했다. 또 기회가 있겠지. R과 함께 하며 허물없던 그 언젠가로 돌아갈 계기가. 차에서 마시라고 커피를 챙겨주며 나는 R과 함께한 유년기의 힘을 한번 믿어보자, 하고 속으로 다짐했다.


다음에 만날 때는 내 안의 경계심을 내려놓고 반가운 마음만으로 R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며.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가족 수난시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