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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선꽃언니 Aug 09. 2021

큰 병원에 가봐야 할까 봐요

갑자기 쏟아지는 눈물

어제저녁 남편과 모처럼 데이트를 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비틀 주스>라는 공연을 봤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출발하는 때 맞춰 비가 쏟아졌다. 삼 주전부터 예약해놓은 공연인데 가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남편을 실망시킬 수 없어 내색하지 않고 오랜만에 곱게 화장을 했다. 화장이라고 해봐야 BB크림에 립스틱을 바른 게 다이지만 남편은 우리 부인 예쁘네, 하고 빙긋 웃었다.


엄마의 생일을 기점으로 나는 가슴 한 편에 차오르는 슬픔과 분노가 커졌다. 이런 가운데도 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모두의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해야만 하는데 그런 내가 서글퍼졌다.


공연은 좋았다. 화려했고 동시에 슬펐다. 죽었지만 죽은 게 아니라는 비틀 주스의 운명에 엄마 죽음의 상처로 저승까지 따라나선 딸의 이야기가 플롯의 일부였다. 딸의 역을 맡은 배우는 엄마를 계속 외쳐댔고 나의 심연의 아픈 구석을 쿡쿡 찔러댔다는 것만 빼면 슬플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나는 공연 내내 불편한 기분이 들어서 가슴이 죄이는 기분이 들었다.


차에서 돌아오는 내내 울었다. 광화문에서 일산까지 한 시간 내내 끝없이 울어댔다. 혼란스러웠다. 엄마가 그리워 흘리는 눈물은 아니었다. 그냥 왠지 내게 닥칠 인생의 시련들이 많을 것 같고 그 시련을 견딜만한 힘이 내게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깊은 잠에 빠져버리고 싶었다. 공연에서 말하듯 죽음은 평온하고 무감각한 것이라면 아마도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두려움에 떨며 울었다. 슬픔보다는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남편에게 말했다.

나는 너에 대한 감정이 혼란스러워. 널 많이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싶은 감정이 차오르다가도 그러다가 네가 날 떠나거나 한다면 내가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 떠난 다는 것은 네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날 떠난다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무슨 일이 생겨 네가 죽거나 없어지면 내가 견딜 수가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야. 그래서 더 사랑하지도 못하겠어.

집에 돌아와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피우면 몸에 냄새가 나고 어지러워서 싫다. 담배를 한 개비 집어 물면 잘 피우지도 못하는 그 담배 때문에 한껏 어지러움이 밀려온다. 어지러움은 정신적인 혼란을 잠시 끊어주고 어지럽고 토할 것 같은 그 느낌에 집중하게 돼 외려 내 고통이 나아지는 기분이 든다. 남편은 말없이 화장실 문을 닫아주고 내가 잠시 욕조에 기대 어지러움을 다스리는 동안 기다린 후 집안의 모든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켜줬다.

담배 피워도 되고 약 먹어도 되는데 나를 사랑한다면 네가 없는 내가 얼마나 슬플지를 생각해. 난 너를 끝까지 지켜줄 거야.

그러곤 술을 찾는 날 위해 맥주 한 캔을 따서 정성껏 유리컵에 따라주고 참외 한 개를 깎아 주었다. 나는 두 개 피 피운 담배 갑을 구겼다. 남편에게 건네주며 버려달라고 했다. 고통스러운 감정 속에서도 앞으로 2세도 가져야 하고 등등 나의 방황이 남편의 속을 끓게 할까 싶어 속상했다. 남편은 집안에 담뱃갑을 버릴 수없어(아빠가 알까 봐) 출퇴근하는 회사 가방에 쓰레기를 챙겨 넣었다. 그런 남편의 사려 깊음이 고맙고 미안했다.


밤새도록 잠을 설쳤다.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잠 자체를 제대로 자지 못했다. 온몸이 결렸다.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말랐다. 화장실에 계속 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침에 퉁퉁 부은 얼굴로 일어났다. 전날 피운 담배의 여파인지 너무 울어서 인지 눈이 부시고 아팠다. 두통이 엄습했다. 필라테스를 취소하고 예약 없이 정신과를 찾았다.

기분이 좋아졌다 나빠졌다 해요. 어제는 밤새 잠을 설쳤어요. 엄청 슬픈 것도 아닌데 계속 울었어요.
자꾸 담배나 술을 찾게 되고 괜찮다가 무너져요.
기분이 좋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땐 제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남일인 것처럼 느껴져요. 표현이 맞는 건지 모르겠는데 기분이 좋은 느낌조차 이상해요.
약간 성적으로 흥분한 것처럼 들뜬 느낌으로 기분이 좋다가 갑자기 어떨 땐 두렵고 불안해서 무슨 일이 꼭 생길 것만 같아요. 어제 공연을 봤는데 죽음이라는 것이 꼭 나쁜 것 같지 않다고 느꼈어요. 죽는다는 것은 모든 것이 평온해지는 상태가 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요.

의사 선생님은 조울증의 전조증상으로 보인다며 큰 병원에 가볼 것을 권유했다. 나는 큰일 난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엄마도 조울증 조현병이 원인이 되어 죽었는데 나까지 그 병에 집어삼켜져 버리는 건 아닐까 내가 미친 걸까. 의지로 해결이 안 되는 걸까. 나는 왜 이렇게 나약한 걸까.


의사 선생님에게 큰 병원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정확한 진단이 조울이나 조현 같이 심각하게 느껴지는 정신병으로 드러나면 나는 정말 <미친년>이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의사 선생님에게 좀 더 지켜보고 싶다고 말하며 내 상황에 걸맞은 약을 처방해 줄 것을 요구했다. 약을 끊고 싶어서 그간 먹던 약을 하나씩 빼고 있었는데 이번엔 <기분조절제>라는 연두색 알약을 하나 추가해서 처방받아왔다. 의사 선생님은 말했다.

죽음에 대해 갖는 사고가 평온함, 안정 같은 긍정적인 인지를 한다는 것이 제일 좋지 않은 예후예요. 일주일 지켜보고 다시 얘기하죠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내 상황과 내 뜻대로 통제되지 않는 내 기분. 엄마가 죽고 몇 개월간 병원을 다니며 치료하던 과정.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불안증에서 시작된 나의 병원 내원 과정들. 나아지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시간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뭔지. 모든 것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병원에서 큰 병원을 권유하네. 일주일 동안 새로 처방받은 약 먹어보고 괜찮지 않으면 큰 병원 같이 가줄 수 있어?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남편은 말했다.

같이 가보자. 미안할 거 없어. 너는 나만 믿어.
나는 네가 이겨낼 수 있다고 믿어. 내가 끝까지 곁에 있으면서 네가 나아지도록 해줄 거야

건강하고 밝게 살며 행복해야 하는데 내가 겪는 고통이 언제쯤 해소되는 건지 궁금하고 조급하다.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할 것은 순서가 뭘까. 아무것도 안 하기엔 여유로운 시간 속의 사색이 두렵고 무언가를 집중하기엔 맘처럼 따라주지 않는 정신적 혼란이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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