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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선꽃언니 May 05. 2021

엄만 널 보낼 준비가 안되어 있었나봐

#27. 애착대상이었던 나의 결혼이 슬펐던 엄마

봄비가 내린다. 봄비라기엔 을씨년스럽게 내린다. 창 밖으로 엠뷸런스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 저 하얀 봉고가 실어 나른 사람은 살았을까 죽었을까. 엄마는 누군가의 신고로 앰뷸런스가 도착했을 때 파릇파릇 사춘기 남자아이 턱수염만큼 자란 화단의 풀잎들 사이에 그 가여운 육신을 뉘어 숨을 거둔 뒤였다. 봉고는 미끄러지듯 단지를 빠져나갔다. 병원에서는 곧장 엄마를 영안실에 안치했다.

27층에서 추락했다니 그럴 리가 없어. 만일 추락이 사실이래도 엄마가 죽다니 절대 그럴 리가 없어.

남동생은 사고가 단순한 편이다. 주어진 일에 충실하고 닥치지 않은 일에 걱정하지 않는다. 엄마의 죽음에 대해 <왜>를 파헤치며 온 몸으로 고통에 쳐 받는 나보단 지금 상황들에 대한 감정 정리가 빠른 것 같다.

엄만 죽었어. 사람은 어떻게든 죽긴 죽어. 병원에서 암 걸려 죽든 늙어서 죽든. 추락이 대수야. 자살 아니야. 지금 중요한 건 살아있는 아빠한테 최선을 다 하는 거야. 그러니 제발 그만 좀 울어

아빠는 엄마가 죽은 뒤 내가 먼저 얘기를 꺼내거나 하면 과민하게 반응했다. 잊으려고 애쓰는데 왜 자꾸 기억을 상기시키냐며 날 힘들게 하는 건 너라고 화를 냈다.


나는 아빠마저 잃을까 불안함이 극에 달했다. 아빠가 예방 차원에서 먹는 혈압약이나 면역에 좋다고 챙겨둔 비타민을 안 먹거나 하면 화가 났다. 안 먹은걸 체크하려고 약봉지마다 월화수목금토일 한 달치 요일을 매겨놓으니 안 먹으면 바로 눈치를 챘고 난리 치고 싶지 않아도 내 안에 불안이 이성적인 사고를 집어삼켰다. 아빠가 집 밖에 나갔는데 GPS가 제대로 안 잡힌 건지 이동 반응이 없으면 사고라도 났나 싶어 놀라서 전화를 해댔다. 하루 종일 집에 들어앉아 눈으로 아빠의 움직임을 따라다니며 조금만 어디가 불편해 보여도 잠 못 자고 아빠를 들들 볶았다. 조현병을 겪었던 사람의 가족들은 조현병 발병률이 높다기에 아빠도 제발 정신과에 한 번만 가서 괜찮다는 것을 확인시켜달라고 졸랐다. 아빠는 어딜 나갈 때마다 불안해하는 나 때문에 남편이 퇴근하길 기다렸다 교대하는 방식으로 자유를 찾으려 했다. 내가 억지로 보낸 상담센터에 가선 딸의 구속이 갑갑해서 미치겠다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상담했다. 나는 내발로 정신과에 찾아가 약을 타다 먹기 시작했다. 엄마가 죽고 한 달 반이 지나니 이제야 아빠에게 조금은 자유를 줄 수 있을 만큼 정신을 추슬렀다. 지금이 그런 상태다.


나는 동생처럼 단순하지 못하다. 현재에 문제가 있다면 과거에 원인이 있었을 것이고 가족들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그 문제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자살인지 실족사가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집안을 이 잡듯이 뒤져 유서를 찾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그렇다면 이젠 왜, 엄마가 이름도 볼성사나운 조현병(정신분열증)에 걸린 건지 언제부터인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엄마 유품을 정리하며 그 흔적을 더듬기 시작했다. 우리 엄만 남 부러울 것 없이 훌륭한 생활환경 속에서 따뜻한 정서적 지지를 주고받는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엄마의 남편은 내가 보기에도 성실함 자체였다. 속 썩임 없이 제 밥벌이하는 남동생과 내가 있었다. 우리 둘 다 엄마 마음에 쏙 드는 베필을 만나 결혼도 했고 사위와 며느리 되는 우리의 배우자들을 엄만 자식처럼 사랑했다. 그런데 왜.


조현병 의심 증상을 보이는 가족이 있고 우연히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참고하길 바란다. 또 다른 내가 다시없기를 바라며 크고 작은 (추정) 징후들을 적어보고자 한다.
엄만, 널 보낼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었나 봐
(애착대상이었던 나의 결혼과 독립)

나는 16년도에 결혼을 했다. 올해 햇수로 6년 차 신혼이다. 남편과는 스물한 살 때부터 연애하여 십 년을 꽉 채워 만났다. 결혼 당시 나는 서른 살이었다. 스물여덟 살에 프러포즈를 받았고 스물아홉 살 때 엄마 아빠의 주도하에 남편과 나 공동명의로 집을 분양받았다. 다시 말해 결혼은 천천히 예정된 수순에 따라 진행이 되었는데 엄마와 나는 결혼 과정에서 정신적 진통이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엄마의 딸로만 살던 나는 엄마의 분신 같은 존재였다. 나는 성실한 아이였다. 어릴 때는 문인협회니 하는 곳에서 글이나 표어로 상장을 많이 받았고, 중학교에 들어서는 외국어에 감각이 있다며 집중적으로 공부를 시켜주어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왔다. 대학입시 때도 애먹이는 일 없이 한 번에 입학했고 11년도에 모 금융 대기업 계열 회사에 졸업과 동시에 취업도 했다. 엄마의 희망과 기대에 맞게 뭘 하든 독하게 진짜 열심히 했다. 때로는 엄만 나에게 "저거 영어  한다고" "저거 이제 돈 좀 번다고" 자존심 긁는 말로 상처를 주긴 했지만, 나는 대게 엄마의 프라이드였다. 동시에 엄마의 유년기 학대와 박탈당한 꿈꿀 기회의 보상심리를 채워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어렴풋이 엄마의 욕심과 깊은 사랑 그 어디쯤의 경계에서 부담을 느끼며 성장했다. 그런 덕에 어찌 보면 인생 자체가 평탄하게 흘러왔다고 생각하지만 그 때문에 엄마가 떠난 지금 나는 가슴의 한 복판이 너무나 공허하고 시리다. 지금은 내 결혼 전 엄마가 비상식적으로 공격하던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아빠는 내가 결혼하는걸 엄마가 슬퍼하는  같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결혼 한다는 것에 굉장한 죄책감을 느꼈다.


엄마와 아빠가 내 신혼집에 짐을 정리해 주러 왔던 어느 날이 있었다. 나는 직장에서 배정받은 관사를 신혼집 삼았기 때문에 다음날 출근을 위해 집에 먼저 들어와 살고 있었다. 몇 날 며칠을 싸우고 감정이 상할 대로 상했던 때 저녁 무렵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려고 신발장 앞에 선 엄마와 집안에 머물던 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엄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엄마는 너무나 슬퍼 보였다. 나는 온몸으로 엄마의 슬픔이 느껴졌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팠다. 나는 엄마, 하고 불렀다. 엄마는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지 "잘 지내. 간다" 문을 열고 휙 나가버렸다. 나는 뒤따라 나가지 않았다. 한 주 열심히 출근하다 주말 되면 또 볼 엄마인데 그날은 이상하게 주체못하도록 눈물이 흘렀다. 엄마가 가고 소파에 기대어 몇 시간을 울었는지 모르겠다. 엄마와 나는 그날 왜 그랬던 걸까. 이유는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그 후에도 한 번씩 모든 사랑과 아쉬움이 가득 담겨있었던 그날의 엄마 얼굴이 문득 떠오를 때면 가슴이 저려 아픔에서 잘 빠져나오지 못했다.


결혼식 당일 엄마는 고왔다. 하객으로 오신 어르신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오늘 엄마가 결혼하냐고 놀렸다. 문제는 나였다. 신부화장을 할 때부터 울기 시작해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너무 울어서 주례 선생님이 신부가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고 둘러대가며 진땀을 뺐다. 폐백 때도 시 어르신들 다 계신 데에서 나도 우리 엄마, 아빠 폐백 절 하고 싶다고 울며 생떼를 부렸다. 어머님은 남편에게 얼른 부모님 모셔오라고 했고 아래층 식당에서 하객들과 인사를 나누던 엄마와 아빠는 난처한 얼굴로 얘가 유별나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폐백을 받고 내려갔다. 나는 그제야 웃었다. 그리고 아팠다. 새벽부터 내둥 몇 시간을 울어댄 데다 하객 맞이한다고 잔뜩 긴장을 해서 신혼여행 가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도착 후 삼일 정도 계속 몸살로 고생을 했다. 오죽하면 남편은 신혼여행 인증사진을 자는 나와 남길 정도였다. 관광지니 따라나서긴 해야겠고 몸이 아파 계속 잠이 왔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그렇게 울었던 이유도, 엄마가 울었던 이유도 다 같은 것 같다. 엄마와 나는 보통의 딸과 엄마 그 이상의 기대와 애틋함으로 뒤범벅 되어있었고 서로를 의지하면서도 구속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결혼 직후 변화한 환경은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큰 스트레스였고 서로를 대하는 적정 온도를  찾지 못해 각자의 자리에서 공허했다.


당시에 나는 이유 없는 무기력함에 시달리며 가끔은 가슴 압박이 느껴지며 숨이 막혔다. 동시에 신혼의 단꿈에 빠져 행복했다. 괴리가 컸다. 왜인지 원인모를 혼란스러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남편이 있고 행복한 것 같은데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 때문에 마음의 틈이 비어 허전했다. 삶의 목적과 의미가 잘 그려지지 않았다. 혼자 있으면 자주 슬펐다. 그러면서 심리상담사를 찾기 시작했고 남편은 내 코트 겉 주머니 속에서 결제된 78만 원짜리 영수증을 보고 조심스럽게 왜 상담센터 같은 곳을 찾는지 물었다.


남편에게 상담의 내용을 아주 구체적으로 얘기하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상담센터 선생님은 나와 엄마는 서로를 얽매고 있다고 했다. 통제를 사랑이라 믿고 엄마의 허락이나 동의 없이는 나만의 선택을 해 본적이 특별히 없던 나는, 결혼 후에 나를 밀어내는 엄마와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 노력했다. 계속 사랑을 갈망하는 상태에서 더 이상 예전 같은 관계로 돌아가지 못하자 상처를 받았다. 유아기적인 분리불안증과 비슷한 기조의 태도라고 했다. 성인으로서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결과의 기쁨을 남편과 나눌 수 있도록 행동교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후에도 오랜 시간 엄마와 나의 줄다리기는 계속되었고 극단적 사랑반목을 반복했다.


나는 내 결혼이 엄마의 조현병 발병의 계기와 관계있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나라는 부분을 깎아내고 나는 홀로서기를 시작해야했던 그때. 그 순간들이 우리 둘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기억한다.


엄마는 내 결혼 직후 아래와같은 증상을 가지고있었다.

<비상식적인 짜증 증가(감정의 극단)>
가령, 회사에서 늦게 퇴근 해 전화를 못받았을 뿐인데 죽을죄를 진 것처럼 질책함

집의 와이파이 등에 볼펜 구멍처럼 작은 틈에서 새어 나오는 <파란 불빛에 두려움을 느낌(피해망상)>

<운전 중 갑자기 우측으로 핸들을 틀어 화단에 충돌> 마주오는 차가 자신을 공격하려고 돌진하기에 두려워 그랬다는 답변.
(피해망상, 블랙박스 확인 시 마주오는 차는 아주 멀리서 오고 있어 충돌을 우려할 상황이 아님)
  * 엄마는 운전경력이 20년 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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