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풍선꽃언니 Apr 14. 2021

나는 엄마처럼 살고싶다

#26. 지지리도 운이 없게 태어난 엄마를 만났지만

엄마가 죽고 유품 정리가 남았다.

아직 충분히 나를 다스리지 못해 혼란스럽다.

"너한테 맡겨놔야 진도가 안 나가, 내가 내일 다 갖다 버릴 거야. 죽은 사람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할 테니까 나한테도 시간을 좀 줘 아빠"

갑자기 엄마가 죽어버리고 나서 둘이 같이 살던 친정집에 아빠 혼자 들어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티브이를 볼 것을 생각하니 그 쓸쓸함과 음산함을 참을 수 없었다.


평생 성실하게 살아온 나의 부모님, 그리고 우리가 함께 이룬 왕국이 붕괴하는 것 같았다. 모든 게 끝장이 난 것만 같달까. 무튼 언어의 조잡한 조합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참담한 심정이다. 아빠가 불쌍하다. 그리고 나도 불쌍하다. 남동생도 불쌍하고, 이 가족의 가족 된 남편과 올케가 불쌍하다. 우리 모두는 한배를 탔는데 침몰하는 배안에 각자의 방법으로 두려움을 이기려고 사투하고 생존을 모색하는 것 같다. 엄마는 원래 없었던 사람인 듯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 아무 일 없이 살아가고 있다. 나만 빼곤.


슬픔에 허우적거리고, 유품 정리에 손도 못 대며, 신경안정제를 먹고 밤새 죽은 엄마와 싸우거나, 또는 엄마를 구하려고 사투를 벌이며 헤매는 나만 빼곤 모두가 겉보기엔 평온하게 지내고 있다. 외려, 죽겠다고 앓는 나만 보면 아빠는 신경질을 내고, 남동생은 정신 차리라고 한다. 남편은 제발 다른 사람들 이겨내는데 힘들게 하지 말라고 날 타이른다. 외롭다.


오늘로 엄마가 죽은 지  주 지나지 않았다.

나는 엄마가 죽은 바로 그날을 매일 살고 있는데 내 가족들이 나더러 괜찮으라고들 한다. 어떻게 이제 괜찮지. 엄마가 갑자기 집 거실 창문으로 떨어져 죽었잖아. 어떻게 이게 괜찮은 거지.


남편이 말하기를 본인도 그렇지만, 다른 가족들도 안 괜찮아도 잊으려고, 가슴에 묻는 중이라고 슬퍼하는 방법이 나와 다를 뿐 괜찮아 보인다고 안 슬픈 게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 내가 힘들어하며 말을 꺼내 굳이 모두의 슬픔을 상기시키지 말라고.


여느 평범한 오후, 문득 내가 남편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만약에 훗날, 양쪽 부모님 중에 한 분이 돌아가셔서 혼자되시면 우리가 집 큰 거 얻어서 같이 모시고 사는 게 어때?"


젊은 사람도 홀로 된 시간을 견디며 산다는 건 시린 일인데 부모님 중 남은 한쪽이 혼자 어떻게 그 무게를 짊어지고 사시겠냐는 생각에 말이다. 그런데 이게 다 뭔지, 당시 내가 염두했던 건 한 이십 년 즈음 뒤에 사별하고 홀로 된  어머니들이었지, 지금 당장 그것도 우리 엄마의 죽음으로 혼자될 아빠를 염두한 건 아니었다.


지금에 와서는 생각하면, 생각하는 대로 된다고 누군가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한 것만으로도 내 상상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것일까? 죄책감이 든다. 인생이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라 해도 계획을 하면 허튼짓으로부터 자신을 구한다고 믿고 살았는데 배신감이 느껴진다.


엄마가 죽기 전 최근 2년간 가장 열심히 했던 건 글짓기였다. 니들 다 키우고 나니, 나도 내 이름을 찾고 싶다며 새로 시작한 취미였다. 하루 종일  머리를 싸매고, 시를 썼다. 산문 비스므레한 것도 썼고 나름의 그 비슷한 것을 하는 사람들끼리 모임도 하고 동인지 몇 권에 시를 냈다. 정체모를 사단법인 문학단체에서였지만 시로 당선이 되어 상호 간에 시인님 시인님 하면서 어울리는 무리도 생겼다. 엄마는 모든 남은 인생의 불꽃을 거기에 불태웠다. 밤에도 낮에도 새로운 시인님과 카카오 스토리로 내가 쓴 시가 어떠녜 저떠녜, 하며 논했고 회춘한 듯 젊어졌다. 활력이 넘치다 못해 달뜬 표정으로 간혹 "나 이제 공인이야" 하며 외치기도 했고, 가족 단체 카톡방에 본인이 쓴 시라며 소감이 어떤지, 느낌이 어떠냐는 둥 시도 때도 없이 물었다.


먹고살기도 바쁜데, 당장 화장실 갈 시간도 줄여서 일 끝내고 빠른 퇴근에 사활을 거는 판국에 엄마의 배려 없는 관심 갈망에 적잖이 짜증도 났다. 시 짓기 취미 좋고 아빠도 엄마 장단 맞춘다고 같이 시 쓰는 시늉도 하고 다 좋은데, 나는 뭔가 잘못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어 엄마 그거 좀 때려치우라고, 남 보여주는 시 쓰지 말고 정상적인 루트로 신춘문예 같은 거 하고 동인지 낼 돈으로 조용히 시 써서 자가출판도 하면 된다고 설득했다. 아니, 원한다면 방송통신대 국문학과 편입 학비를 대 줄 테니 다니라고도 했다.  뭔가, 평범하지 않아 설득을 해도 전혀 먹히지 않자 나는 짜증을 냈고 화를 냈다. 시 얘기만 나오면 기분이 나빠져서 몰라 난 관심 없어 읽어보지도 않고 무시했다

미국에서 일 년에 한 번 한 달 정도 한국에 오는 고모가 집에 왔을 때 본인이 쓴 시집이라며 그 동인지를 쓱 내밀기에 아 그만 좀 하라고! 하고 소리를 빽질렀다. "엄마가 행복하다잖니, 그걸로 된 거야" 고모가 말했다. 그러니 할 말이 없었다. 엄마 인생에 그렇게 즐거운 일이라는데 내가 어쩌겠나 싶었고 어차피 내 말은 엄마 귀에 들리지도 않았으니. 차라리 태어난 지 두 달 즈음된 아기하고 대화를 해도 이보다 답답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엄마가 죽었다.

어느 무리에서든 처음엔 너무 좋고 행복하다가 몇 개월이 지나면 항상 그 무리에 죽일 놈 년이 생기고, 분개하지만 정작 그 상대에게는 말 못 하는 엄마. 대신, 가족들을 붙들고 본인이 못 사네 죽겠네, 걔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없니 하는 수십 년 반복되는 엄마의 사회생활과 사교모임은 이번 시모임(허울 좋은 문인협회 회원들과 시인님들)에서도 같은 패턴으로 깨졌다. 이번엔 고소를 동반하는 사건이 될 판국이었다. 사유인 즉, 상대가 엄마의 의사에 반해 자신의 시를 베꼈다.  상대가 엄마를 사랑하고 싶소, 자고 싶소, 당신을 위한 시를 쓰고 싶소 등의 성추행을 했다. 동인지에 싣을 시 쓰기를 강요했다. 기부금을 요구했다. 등등


고소의 증거가 될만한 녹취나, 문자메시지 하나 없이 고소를 하겠다며 일산경찰서 민원실에 찾아가 억울하다 호소하고, 고소 거리가 안되어 접수 불가하다는 답변을 듣고는 바닥에 누워 뒹굴고 통곡했노라고 말했다. 나 역시도 경찰인데 범죄가 성립이 될 법한 내용도 아닐뿐더러 근거도 없이 그 경찰관들도 어찌할 도리 없음이요, 외려 엄마의 과민하고 비 상식적인 생떼가 업무방해 혹은, 무고나 뭔가 이상한 상황으로 번질까 걱정되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엄마를 달래려 고소장 대필까지 해서 경찰서에 동행한 아빠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엄마한테 세상 일상다반사 일어나는 일이니 엄마가 넓게 보고 그것들의 무식한 행실엔 상대하지 말라, 어차피 그들은 시간 많아 문학질 한다고 모여 다니는 한량 아니냐, 할 말 못 할 말 못 가리고 경우 없는 거 보니 질이 안 좋은 사람들이다. 이참에 끊고 다른 거 재미난 거 찾아보자, 온 가족이 화도 내고 설득도 하고, 타일러도 봤다. 드디어 "그래, 내가 잊어버리고 말지, 내 인생에 스쳐간 오염된 것들" 이라기에 엄마가 좀 진정하나 보다 안도하면 며칠 뒤엔 또 똑같았다. 반복은 끝이 없었다.


"카카오스토리에서 만난 양○○가 날 김○○에게 팔아넘기고 내 시와 사생활을 MBC에 팔아넘겼다"


 "MBC에서 어떻게 알고 방송 소재로 너네(우리 부부)가 지난번 다녀온 러시아가 나왔다.


"내가 해먹은 음식이 나왔다. 나만 알 수 있게 교묘하게 내 사생활이 유출되고 있다. 김○○ 개새끼가 내 정보를 팔아넘겨 돈을 챙겼을 것이다"


엄마는 고등학교 시절 내 외조모에게 돈 벌어오라며 생면부지 부산의 한 미역공장에 버려졌고, 가족들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몰랐어요 저도 얼마 전에 들었어요." 이모가 말했다. 모를 수는 없지. 학생인 큰 언니(누나)가 며칠을 집에 안 들어오는데 집안이 뒤집어질 일인데 몰랐다, 말도 안 되지. 수시로 엄마가 푸념하기를 집에서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고 혹은 또 맞아 죽을까 봐 친구 집으로 도망쳐 잠을 자고, 돈이 없어 학교에서 망신을 당하고, 그래도 대학을 가고 싶어 돈 빌려 등록을 하고 나니 돈 없는 집구석에 쓸데없는 학교 간다고 설치는 천하의 썅년이 되었던 엄만, 출근 차비마저 다 빼았아가 용산 원효로에서 남산 일원의 직장까지 걷던 비참한 가난이 싫어 스물네 살 직장생활 일 년 만에 아빠랑 결혼했다고 한다. 그제야 그 집을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항상 버려질까 봐 과잉 친절하고 예쁘고 고상하게,

타인 앞에서는 과장되리만큼 티 없이 밝고, 정작 가족들끼리 있는 순간에는 밖에서의 일들로 속상하고 화가 난다며 가족들 붙잡고 하소연,  특히, 아빠가 듣다 듣다 버럭 하며, 엄마의 잘못을 지적하면 "내편을 들어주지 않는 남편"에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자식인 내 앞에선 똑같은 사람인 아빠를 두고 대체로는 "세상 사랑하는 남편" 이랬다가 어느 날은 "너네 아빠가 얼마나 웃기는지 아니" 흉을 보고, 가끔은 "이혼하고 싶다"는 둥 막말을 하며 아빨 천하의 나쁜 새끼를 만들었다.


엄마가 죽고, 남편과 나 아빠 세 식구가 적적함과 슬픔을 달래며 소주 한잔으로 시작한 술자리가 찬장의 아무 양주를 폭음하기에 이르러서 아빠가 분통을 터뜨렸다.


 "너네 할머니, 지 새끼도 버리는 악마 같은 그 개 같은 년, 죽을 건 그년인데 너네 엄마가 먼저 갔다."


"느이 엄마 죽기 며칠 전에 할머니한테 전화해서 꺽꺽 울면서 느이 할머니한테 따졌다고. 그때 나 왜 버렸냐고"


"귀찮다는 듯이 한다는 소리가, 옛날 일은 다 잊어라 하더라. 새끼를 버리는 년이 사람이냐 그러고도 옛날 일은 다 잊어라 하는 년이 사람이냐. 그때 그냥 느이 아버지 벌이 없고 먹고살기 어려울 때 밑에 새끼들이 줄 줄이라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하다. 그 한마디 했으면 느이 엄마 한이 그렇게 맺히지는 않았을 거다"

어린 시절 학대와 비정상적인 양육환경(추정)에서 기인된 경계성 인격장애 및 피해망상. 조현, 조울증

엄마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나는 잘 몰랐다. 그런데 아빠는 결혼하던 그날부터 엄마의 조울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에 살면서 많이 이해하고 참고 살았노라고, 엄마의 죽음이 힘들지만 반은 해방된 기분이 들기도 한다고. 그래서인지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고 했다.


엄마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찾고 싶었던 사람.

열정 많은 만큼 하고픈게 많았지만 기회가 없던 사람.

평범한 가정주부. 정 많고 다정하던 그런 사람이었는데

단지 자신을 지키는 법을 배우지 못해 혼란 속에 죽었다.


엄마는 재수 없그런 집 그런 사람 자식으로 태어난 죄로 마음의 깊은 병과 평생을 좋았다 나빴다 사투를 벌이며 롤러코스터를 타다 죽었다.


엄마의 롤러코스터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딸은 엄마가 늘 불안해 보였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기쁘게 해주고 싶었고, 엄마가 행복하면 좋았다.


엄만 운이 참 없었는데 대신 행운이 다 나에게 왔나 보다.

나의 부모님을 부모로 만나 사는 내 행복했다.

엄마는 엄마처럼 살지 말랬는데, 나는 엄마 잃고 홀로 설 남은 생을 엄마 같은 사람으로 살고 싶다.

고마웠어. 엄마. 박 여사.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 죽음에도 예방 백신이 있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