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생각이음 05화

4. 광장의 군중

픽션-Part 1.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

by Sadion





이름 없는 군중! 말소리, 눈길과 발걸음의 혼란!

우리는 그런 군중을 본 적이 없으며,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한다.

그 모든 살아 있는 것을!




-빅토르 위고의 시 「몽상의 언덕」 중에서-




광장바닥은 젖어있다. 비가 지나간 흔적위로 떠오르는 동상과 멀리보이는 조선시대 양식의 성문이 누긋누긋한 공기 속에서 갓 씻어낸듯 하다. 바로 옆을 보니 한복을 대여해주고 사진을 찍어준다는 안내판에 푸른 눈에 금발머리 외국인 남자가 곤룡포에 익선관차림으로 웃고 있는 위로 물방울이 맺혀있다. 양옆의 도로로 차들의 흐름이 일정한 소음을 스테레오 채널로 뿜어 올린다.


사람들이 보인다. 이 광경은 카유보트의 「비오는 날, 파리거리」보다 모네의 「파리의 카퓌신 대로」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전자의 계획설계된 반듯한 거리, 포장도로의 네모진 판석들이 촉촉이 젖어 빛나고 모노톤의 말쑥한 차림새의 사람들이 푸른 우산을 쓰고 걷는19세기의 파리의 풍경은 쉼 없이 오가는 차들도 피켓도 군중의 운집도 없이 너무나 단순하고 깔끔한 모더니즘을 보여준다.


반면. 후자의 위에서 내려다 본 각도로 그려진 거리의 사람들은 작게 찍힌 물감붓질들이 모여 군중이라는 하나의 인상을 만든다. 카유보트가 보여주려 한 말끔한 도시의 보기 좋은 스타일이 아니라 살아있는 도시의 유동성을 보여주려는 듯이. 도시를 보라, 곧 군중을 보라.


카유보트 ,「비오는 날, 파리거리」


모네,「파리의 카퓌신 대로」


그런데 그림 속 군중들은 저마다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는 중이지만 내 앞의 사람들은 집이나 직장, 쇼핑몰이 목적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약속 장소에 모인 이들이다.


사람들은 아직 덜 빽빽하다. 본격적인 시작은 아직인 듯 어수선한 가운데 지하철 입구에서 나오는 사람들 몇몇이 무리에 합류한다. 무엇 때문에 모인 것인지 별로 알고 싶지 않다. 촛불혁명은 지나갔고 노란 리본도 자취를 감췄다. 이후로도 많은 집회와 시위가 있었지만 나는 알지 못한다. 명동거리를 걸으면서 마주치는 인파와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어딘가 설치된 스피커에서 몇 마디 말이 웅웅거리며 울린다. 내 앞으로 선글라스를 낀 노인이 배낭에 태극기를 꽂고 지나간다.


“ 빨갱이들이 판치는 세상이다 이거야.”


노인의 중얼거림은 중얼거림치고는 크다. 그 옆을 지나던 젊은 남녀가 마주보더니 피식 웃으며 지나간다. 이 순간은 단순히 세 명의 개인이 스치는, 사건이 라기도 미미한 한때이지만 어떤 상징성을 내포한 것처럼 보인다. 노인의 행색과 말은 노인이 속한 집단을 보여준다. 이렇게 군중이라는 단어로 묶인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전형을 발견할때가 온다.


도시의 흐름 속에서는 더더욱 이름을 지닌 한 개인일 때보다 어떤 부류로서 인식될 때가 많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부류들이 다르다는 사실에 더 주목하게 된다. 다른 부류를 향한 경멸이나 혐오를 숨기지 않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사회라는 말로 한대 묶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뉴스의 논평과 신문 사설에서 자주 하는 우리사회의 문제에대한 지적과 제언이 주는 울림은 개인이 사회를 비판하거나 개인이 사회의 문제점이든 무엇이든 속성을 대변할 수 있다는 중세에는 나오지 못했을 생각을 나타낸다.


사회에 대해 논하는 사회라. 사람들이 무리지어 온, 사회를 이뤄온 역사는 아주 오래전에 시작되었지만 사회라는 개념에 대해 학문적으로 인식한지는 150년 정도 되었을까. 사회를 연구할 학문이 따로 필요하다는 발상은 근대성으로 인해 생겨난 새로운 관계나 노동방식, 사고방식 등 새 시대를 설명할 필요성에서 나왔다. 노인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설명을 이론을 통해 사회와 연결시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대에 시작된 방식이다.


그러고 보니 카유보트도 모네도 모던아트의 시작인 인상주의 화가다. 근대성을 담은 두 그림 속 그 시절의 도시에서 오늘날의 도시까지 얼마나 변화했을까. 도시가 담고 있는 내용물은 얼마나 변했는가. 우리는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간다. 냉전은 끝났고 마르크스의 사회발전의 최종 단계라던 공산주의 유토피아는 오지 않았다. 고전 자본주의를 계승한 신자유주의 시대를 사는 가운데 근대성이 탈 근대적 사유의 사조들로 깔끔하게 개선되었으니 된 거라고 할 수 있을까?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러 나라들에서 근대화를 통해 속성으로 근대성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전 근대적인 유물들이 21세기까지 남아있기도 하다. 민주주의 시대에 아직도 왕조시대의 사고로 공주님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아무튼, 노숙자, 학생, 이주노동자, 범죄자, 무직자, 소시민, 권력자, 부자가 뒤섞인 도시의 군중 안에 내가있다. 그러나 나는 150년 전 사람들과 다르다. 감정을 느끼고 생각을 하고 행동하는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나는 다른 군중과도 다르다. 노인과 같은 사회에 속해 있지만 나는 노인과 다르다.


나는 걸음을 옮겨 사람들 사이로 걸어간다. 피켓을 나눠주던 40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와 눈길이 스친다. 순간 다리가 멈춰서고 어깨가 움찔한다. 여자가 눈을 가늘게 뜬다. 나는 서둘러 지나간다. 사람들의 대열이 앞에서부터 좁혀져 온다. 앞에선 사람이 구호를 외치기 시작한다. 고개를 돌려 길 건너를 본다. 건너편 사람들은 태연하게 길을 지나간다. 이들을 모이게 하는 이념이라는 것이 두렵지 않은 걸까.


과거에 정권에 반항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 한데 모아 낙인찍는 수단인 ‘빨갱이’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 하려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모든 이념의 속성 자체에서 오는 두려움 말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이 틀은 같은 현상을 바라보더라도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판단을 내리게 한다. 두려움은 집단이 이념을 공유하여 다른 이념과의 차이에 어떻게 반응 하느냐 에서 온다.


외젠 이오네스코의 희곡 「코뿔소」는 이런 두려움을 잘 보여준다. 어느 주말 오후 소도시에 코뿔소 한 마리가 등장하며 소동이 일어난다. 그날 이후 도시에 코뿔소들이 계속 출연하고 주인공은 자신의 친구가 코뿔소로 변하는 현장을 목격한다. 지성도 우정도 사랑도 소용이 없이 모두가 코뿔소로 변하고 주인공만이 홀로 남는다. 주인공 역시 코뿔소 되기의 유혹에 빠지지만 결국 끝까지 인간으로 남기로 한다. 탱크처럼 돌진하는 코뿔소의 이미지는 공격성과 집단성을 지닌 동시에 복종성을 지닌다. 이 코뿔소에 대해 평론가들은 작가가 겪었던 나치즘이 투영되어 있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굳이 나치즘이 아니더라도 모든 이데올로기가 야기할 수 있는 비인간화된 광기를 코뿔소에서 읽을 수 있다.


두려움은 나라고 해서 모두가 코뿔소가 되는 상황에서 혼자서 코뿔소가 되지 않고 버틸 수 있느냐 에서 극대화된다. 코뿔소와 비슷한 맥락으로 공포를 주는 오늘날 대중문화에서 가장 익숙한 상징은 좀비일 것이다. 사유의 능력을 상실하고 축 늘어진 사지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공격해 감염 시키는 좀비는 자본주의 사회의 극단적인 노동소외, 비인간화를 상징한다.


바닥을 구르는 둔탁한 소리에 고개를 든다. 시야 속으로 수십 마리의 뿔 달린 그로테스크한 머리들이 들어온다. 스피커의 목소리는 성난 코뿔소의 울음소리로 변해있다. 나는 황급히 뒷걸음질 친다. 회색 후피 동물들의 무리에 압도되어 차도의 경계까지 간 후 고개를 돌린다. 건너편 인도에 사지를 축 늘어뜨린 썩고 너덜너덜한 얼굴의 형상들이 걸어간다. 놀라 다시 뒷걸음질 치려는데 사지가 말을 들지 않는다. 고개가 쳐지며 내 몸을 내려다본다. 축 쳐져 대롱거리는 팔 끝에 썩은 물이 똑똑 떨어지는 회색 손이 매달려 있다. 여기 살아있는 도시의 이름 없는 좀비가 걸어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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