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Part 1.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
만일 사회의 선량하고 행복한 성원이 되려면 전반적인 이해는 최소한으로 억제해야 한다. 그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전문적인 지식은 덕과 행복을 증진시키나 전반적인 지식은 지적 견지에서 볼 때 필요악이기 때문이다.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중에서-
전시장 입구를 지나니 뒤샹의 연보가 첫 번째 섹션 입구로 가기 전 통로에 적혀 있었다. 그는 19세기 말에 태어나 20세기를 살았다. 시대적 전환기를 살았다는 점이 변혁의 아이콘이 되는데 도움이 되었겠지. 그가 살던 시절 양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미술계의 중심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가기 시작했고 그도 물론 신대륙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의 생애가 끝나는 1968년까지를 쭉 훑고 나서 첫 번째 섹션으로 들어선다. 반예술의 선봉에 선 아이콘의 첫 번째 섹션은 생각보다 밋밋하게 마저 느껴진다. 풍자만화와 판화, 인상주의와 폴 세잔의 영향을 받은 시기의 회화작품들이다. 나는 벽에 걸린 그림들을 눈으로 훑으며 걷는다. 그림이 다시 변한다. 입체파와의 만남 탓이다. 그림을 쭉쭉 지나쳐서 한 작품 앞에 멈춘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 살빛의 알아볼 수 없는 조각들이 뭉쳐 사선으로 내려오는 형상 캔버스에 들어차 있다. 이 그림으로 뒤샹은 전통적인 그림이 주류인 뉴욕에서 주목을 받게 된다. 아직이다. 나는 서둘러 걷는다. 그것을 보기 위해.
전시실 가운데에 유리가 덮인 전시대가 서 있다. 드디어, 그 유명한 「샘」을 알현한다. 철물점에서 산 남성용 소변기에 서명을 해서 만든 바로 그 작품이다. 물론 처음 만들었던 바로 그 작품도 아니고 유일무이한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이미 만들어진 기능을 가진 기성품을 예술품이라 내놓는 그의 행위로 예술이란 재능을 가진 천재가 기술을 구사해 일상적 기능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근대적 예술관이 무너졌다.
무엇이 예술인가. 패러다임 자체를 뒤흔들며 출품된 저 변기는 파란을 일으켰다. 오늘날에 와서는 「샘」의 방식이 새롭지 않지만 그건 예술품에 대한 생각이 이미 이것을 계기로 변해서이다. 이런 변화의 순간들은 예술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시간 속에서 변화는 계속된다. 크게는 패러다임의 변화든 작게는 양식의 변화든. 인류의 지식, 신념, 행위의 총체인 문화는 세상을 보는 방식이 변화함에 따라 살아 움직인다. 그 과정을 추동하는 것은 질문이다. 「샘」이 예술이란 무언인가 질문을 던지게 되었듯이.
그런 질문이 항상 새로운 질문이지는 않다. 일례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시대를 거듭하며 반복된 질문이다. 그 질문은 계속되었지만 답은 변화해왔다. 기독교의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라는 답이 다윈의 진화론으로 뒤집히고 계몽주의의 인간이란 이성적 동물이라는 답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으로 뒤집혔다. 지금도 이 질문에 철학과 과학은 새로운 해석을 내놓으려 한다. 하지만 범인들이 이런 질문에 대해 자신이 사는 시대의 보편적 답을 뛰어넘는 일은 어렵다. 모든 것이 신 중심이던 유럽의 중세시대 사람이 인간은 원숭이에서 진화했다는 생각을 쉽게 떠올릴 수는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세상과의 연결에서 질문이 안정을 주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나라는 정체성을 형성할 때 나를 둘러싼 문화로써 내 안에 내재된 내가 사는 시대의 보편적인 사고관이 뒤집힌다는 것은 혼란을 의미한다. 특히나 기술의 발전을 따라 변화가 가속화된 세상에서 질문 없이도 급격한 발전이 가져오는 혼란을 피할 수 없다. 특히나 제3의 물결을 넘어서 4차 산업혁명에 이른 오늘날 인간을 닮은 로봇과 인공지능은 계속 발전할 것이고 인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 당장 인간에게 남는 직업이 무엇인가 라는 궁리가 급선무가 된다.
어쩌면 떠올려야 할 질문의 종류가 달라져야 해서 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 펀드란 무엇인가가 유튜브 스타가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이 시대에 적합한 현대적 질문인지도 모른다. 뜬구름 잡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같은 생활과 먼 질문은 복잡한 이 시대를 사는데 전혀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지 않는가.
그런데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 잘 팔리는 작가가 누구인가를 질문하며 살아도 세상과의 연결은 확실하고 안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종교와 철학의 시대를 지나 과학기술이 견인하는 세상이 더 복잡하고 빠르게 흘러가는 동안 기술의 발전이 주는 편리함에도 그 복잡성 앞에서 일개인은 너무 작은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 사람이 다방면에서 능통해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갖춘 르네상스 맨은 르네상스에나 가능하다. 거기다 시간도 행복도 돈으로 환산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양극화가 가속화되는 신자유주의 논리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도태될 수 있다는 불안은 낯설지 않다. 4차 산업혁명이 무인화로 노동시장의 변화를 가속시키는 상황까지 더해졌으니 개인이 느낄 세상에 대한 불안은 현대적인 질문으로 해소될 수 있을까?
전시실에는 「샘」 외에도 자전거 바퀴와 유리잔 걸이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 예술가의 손이 아닌 공장에서 생산되어 나온 물건들의 주위를 돌며 꼼꼼히 들여다본다. 지난 세기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 예술을 보러 오는 일은 다음 세기에도 계속될까? 과학이 아닌 예술이 던지는 질문은 아직도 유의미할까? 세상 속의 한 인간은 어차피 세상을 다 알 수 없다면 애써 질문할 필요가 있을까?
세상을 보는 방식은 개인이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다. 세월을 따라 유전자와 양육된 문화권으로 결정된다. 뒤샹이라는 사람은 개인이었지만 지난 세기의 예술계가 샘이 가진 가치와 위치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이 소변기를 관심 있게 들여다보는 관람객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아까부터 질문들을 떠올렸다. 왜일까. 내가 모든 문명의 이기와 사람을 거부하고 고립된 무인도에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 같다. 산책길에서, 카페에서, 지하철에서, 광장에서, 이곳에서 나는 세상을 본다. 특정 문화와 사회 속에서 타인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이것으로 설명이 전부 될까? 나는 답을 알고 싶은 걸까? 나는 왜 이 ‘예술’을 보러 왔을까? 질문은 여기까지 해야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