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Part 2. 타인, 관계, 오랜 의문들
이 이상의 말도 없고
이 이상의 사이도 없다
만물은 모두 이런 정에서 산다
-김광섭의 시 「우정」 중에서-
빵이 든 까만 봉지를 달랑 거리며 큰길로 나섰다. 바람이 불어와 귓가를 새게 스친다. 고층 건물들이 늘어선 왼편과 비교적 낮은 건물이 늘어선 이편 번갈아본다. 그 사이를 오가는 차들은 쌩쌩 달린다. 도심은 오후의 나른함에 아랑곳 않고 깨어있다. 블록 끝까지 걷다 횡단보도를 만난다. 아직 빨간 불이라 얌전히 서 있는다. 고개를 들어 무심코 맞은편의 인파를 훑는다. 그 속에서 어딘가 익숙한 인형이 보인다,
순간, 머릿속이 깨끗이 비워진 것 같다. 한 얼굴이 멀리서도 너무 선명히 박혀 와서 떨어지지 않는다. 짝눈, 이 얼굴을 내가 잊을 리 없지. 신호가 바뀐다. 나는 잠시 망설인다. 피할까? 아니야, 내가 왜 피해야 하지? 목에 꼿꼿하게 힘을 주고 성큼성큼 나아간다. 횡단보도의 중간쯤 오자 눈을 돌려 짝눈의 얼굴을 보고 만다. 시선을 느낀 짝눈의 눈이 내 얼굴을 향한다. 나를 알아보지 못한 눈빛이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발은 계속 앞을 향해 걷고 짝눈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인도에 발이 닿는다. 나는 한참을 굳어서 서 있는다. 저 인간에게 나는 뭐였지?
거의 존경심에 가깝던 태도는 칼을 배에 품은 아첨이었고 거기 넘어가 여기저기서 자투리 지식을 엮은 장광설을 늘어놓던 난 바보였지. 다른 친구들 앞에서는 단둘만 이야기하는 걸 티 내지 않는 게 특별해서 라고 생각하는 건 비밀일기를 번갈아 쓰며 들떠있는 초등학생 계집애 꼴이었구나. 누군가 건넨 캡처된 채팅 내용, 내가 보낸 채팅 메시지를 캡처한 이미지 밑의 ‘잘난 척 절어’를 보았다.
그러고도 미안한 기색 없이 도리어 나를 유난스러운 사람으로 만드는 재주는 혀를 내두르게 했지. 나도 그에 맞서서 떠벌이고 다녔어야 했나. 짝눈이 털어놓은 얘기들을 그게 두려워서 더 뻔뻔하게 나를 은근히 따돌리는 분위기를 만들었겠지. 대놓고 괴롭히지 않은 건 뱀 같은 성격 탓이었는지 그래도 조금은 사람이라서 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돌아보니 횡단보도를 건너가던 인파는 흩어져 남아 있지 않다. 다시 걷는다. 휴대폰을 꺼내 메신저 앱을 연다. 그러고 보니 노랑 후드에게서 오늘은 아침 인사가 없다. 답문이 늦어도 언제나 먼저 메시지를 보냈는데. 노랑 후드에게 메시지를 보낼까? 좀 더 두고 보자. 나는 더 이상 고등학생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다. 다른 생각을 하자. 웃긴 생각. 뚱보 왕이 엄숙한 표정으로 구린내 속에서 변기 위에 앉아 호령하는 광경 같은 거. 변기 위엄이라니. 실제로 태양왕은 그랬지.
태양왕 루이 14세는 절대왕권을 공고 이한 왕으로 교과서에서 왕권신수설을 설명할 때 그 초상화를 자료사진으로 싣는다. 초상화 속 왕은 매부리코에 통통한 아줌마 같지만 입고 있는 옷과 자세는 당당해서 왕다운 고귀함과 권위를 나타내려 한 흔적이 보인다. 그런데 사실 이런 왕은 국정을 보는 동안에도 변기에 앉을 정도로 연신 설사를 했다. 변기 위의 권위라니.
지금 생각하면 엽기적이고 우습지만 신이 부여한 왕권 덕에 당당히 변기 위에서 중대사를 치렀고 호화로운 보석으로 여러 변기들을 장식했으며 왕의 변기를 관리하는 일은 고위 귀족들이 앞 다투어 맡으려는 자리였다. 권력이란 게 권력자의 사소한 것조차 당당하게 끌어올려 받드는 행태는 우스꽝스럽지만 그런 작은 것조차 그들의 힘이 깃든다는 사실은 두려움도 동시에 준다. 물론 두려움은 그 권력이 살아있을 때 유효하지만.
권력의 속성은 한번 잡으면 놓기 힘들고 귀신도 부린다는 것. 이런 힘이라는 것은 정치적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이 곧 힘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를 차지한 사람들도 힘을 행사한다. 재벌의 정경 유착뿐 아니라 프랜차이즈 대표가 가맹점 주인에게 횡포를 부리는 것처럼 갑질로 나타나기도 한다. 갑이 재벌급의 대단한 힘을 가진 게 아니어도 어디나 존재한다.
다 같이 회사의 주인이 아닌 월급쟁이어도 상사라는 이유로 업무와 무관한 허드렛일을 지시하고 욕하고 성희롱한다. 그 갑 역할을 수행한 상사가 아니라 회사의 문제가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회사의 조직 구조에 편승한 상사가 자율성이라고 하나도 없는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사회구조가 그러니까, 관습이니까 그런다면서 조금이라도 빨리 들어왔거나 나이가 한 살이라도 많은 걸로 서열을 나눈다.
우리나라는 특히 서열에 민감하다. 문제는 이런 서열의 수직구조 속에서 내가 내 아래 있는 사람보다 우위에 있다는 대서 안도감과 자존감을 충족할 수 있다는 접에서 온다. 그래서 개인으로서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일수록 서열에 기댄다. 웃긴 건 나이나 직급 같은 눈에 보이는 서열만이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동갑내기들이 모인 학교 교실에서도 서열이 생긴다. 친하다는 같이 몰려다니는 친구들 사이에도 서열이 생긴다.
사람들이 서열을 생각하는 것은 동물로서 갖는 본능일까? 그러고 보니 짝눈은 나와 제 서열을 구분해서 내가 자기보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잘난 척한다는 말속에는 내가 저와 비교해서 못나면 못났지 잘난 것처럼 유식한 채 하며 길게 설명하는 것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있는 것이다. 자기가 나보다 친구도 많고 답답하게 꽉 막혀 있지 않은 인사이더이고 친구들 사이에서 의견을 이끄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말이다. 짝눈이 생각하는 식이라면 반 전체에서 내 서열이 낮았던 건지도 모른다.
짝눈의 교복을 입은 등. 짝눈은 나와 열띤 대화를 나눈 다음에도 교실에서 다른 친구들 사이에 들어가면 조금 전의 대화가 무색하게 등을 보였다. 사람은 누구나 다 평등하다는 내 생각은 얼마나 어린 생각이었나. 나는 짝눈이 깊은 속내를 털어놓은 사실이 부끄러워서 그런다고 여겼다. 대체 얼마나 바보였던 거지? 인간관계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이 있었던 게 아닐까. 우정이나 사랑이라는 말에 동화 같은 울림을 떠올렸던 거다.
일단, 밥을 먹어야 한다. 그 인간은 내 얼굴을 알아보지 조차 못하는 데 나 혼자 옛일을 떠올리는 상황은 불쾌하다. 들어갈 만한 식당을 찾아야 한다. 저 앞에서 한 초라한 행색의 아저씨가 젊은 남자에게 다가간다. 아저씨는 길을 물을 요량인 것 같다.
젊은 남자의 시선이 아저씨의 입성을 훑는다. 사람을 만나면 무의식적으로 나보다 나은지 모자란 지 재어보는 게 인간의 본능 아닐까? 물론 젊은 남자는 내색하지 않을 것이다. 시선을 거두고 골목 쪽으로 간다. 몇 년 전에 화제가 된 광고가 떠오른다. 광고 판 속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영화 「7년 만에 외출」에 나오는 메릴린 먼로처럼 통풍구 바람에 치마가 들쳐 올라가는 모습이었다. 21세기는 평등한 세상이니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