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Part 2. 타인, 관계, 오랜 의문들
바쁜 이 세상 속에 휴게소처럼
잠시라도 들리고 싶은 작은 희망들이 있는 곳
서로의 정이 묻어나는 곳
너와 내가 닮아가는 곳
사람 사는 세상 바로 여기죠
- 김건모의 노래 「시장풍경」 중에서-
시장 골목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계획 없는 방문은 재촉할 일이 없어 느긋함을 준다. 시간이 곧 돈인 이 시대에 이렇게 느린 감각에 너무 빠져있는 사람은 뒤쳐진다. 느림은 빠름에 밀려나고는 한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빠릿빠릿해야 살아남는다고들 한다. 그럼에도 때로 느림의 가치를 역설하는 사람들이 있다. 슬로우 씨티. 슬로우 푸드 같은 말이 생겨난 걸 보면.
물론 느린 것이 도태되는 것도 맞다. 올림픽 슬로건에는 더 빠르게라는 말이 있고 메달은 꼴찌가 아닌 가장 빠른 이에게 주어진다. 사람들은 속도로 줄이 세워지고 누구도 맨 끝에 기꺼이 서려고 하지 않는다. 뒤쳐진다는 것은 주어지는 것이 적어진다는 말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피에르 쌍소는 그의 책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느림이란 단순히 뒤처져 게으르고 무능력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절제를 가지고 경건하고 주의 깊게 살아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썼다. 단순히 행동만 느리다는 것과 느리게 산다는 것은 다르다.
그래도 요즘이 과거보다 빠른 건 어쩔 수 없는 흐름이긴 하다. 공간과 공간의 연결이 물리적으로 가까워졌을 뿐 아니라 온라인의 연결을 통해 실시간성이 확보된 세상이니까. 연결은 빠름을 불러오는 것 같다. 지금도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고 있을 천억 개의 세포들 사이의 연결도 반사작용처럼 될 패턴을 만들고 있다. 저 판매대에 놓인 팥빵을 보고 바로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처럼.
주말 정오의 시장 골목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다. 저쪽 끝에서 부터 사람의 무리가 눈에 띈다. 저쪽에 숨은 맛집이라도 있는 걸까. 자세히 보니 무리는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사람들이 둘러싼 안쪽에서부터 무언가가 삐죽 나와 있다. 붐 마이크다. 보아하니 저 안쪽에 촬영 팀과 연예인이 있는 듯하다. 무리는 서서히 가까워지고 나는 멈춰 선다. 작은 퍼레이드의 행렬 같구나.
행렬이 지나는데 가게 아주머니 둘이 그 속에 있던 연예인을 알아보고 이름을 부른다. ‘저거 OOO잖아.’ ‘테레비랑 똑같네.’ 무리 바깥쪽의 어린애가 스마트폰을 들어 올리며 말한다. ‘진짜 OOO야.’ 적지 않은 나이의 그를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그냥 이름만 부른다. 그는 그만큼 친밀한 존재로 받아들여지는지도 모른다. TV 화면을 통해 웃음과 글썽임을 선사했던 이 인물과의 관계는 LED 화면에 뜬 전기신호를 통해 일방적으로 맺어졌음에도 말이다. 뭐 어찌 보면 1대 1에 서로를 아는 관계라고 해서 다르랴마는.
시끄럽든지 말든지 나는 빵집 판매대에서 빵을 고른다. 어머니는 팥빵을, 특히 시장표 팥빵을 좋아한다. 화해의 증표로 좋지 않을까. 아침에 잠든 어머니를 깨우지 않으려 숨을 죽여 가며 집을 빠져나왔었다. 내일도 그렇게 반복하고 싶지 않다. 어머니와 나의 사이는 전형적인 갈등유형이라 그다지 신기할 것이 없을 것이다.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갈등유형이니까.
그런데 세계 고전 문학 속 어머니들은 왜 딸의 어머니가 아닌 아들의 어머니일까. 고전적인 작품 속 아들의 어머니들이란 자식밖에는 모르고 희생적이며 남편이 없어졌거나 없느니만 못하다. 자연히 아들에게 모든 것을 거는 어머니. 물론 아들이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성공해 어머니의 희생에 보답하는 경우도 있다. 내 생각에 전자든 후자든 아들은 심리적 압박을 느끼기는 매한가지다. D.H 로렌스의 「아들과 연인」 속 모자간처럼. 물론 아들의 사상을 받아들여 투사로 성장하는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 속 어머니 같은 경우도 있지만 아들 편에서 주는 영향력보다 어머니가 주는 영향력이 더 크다.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은 어머니라는 너무 큰 존재감으로 무겁게 어깨를 눌러오기 십상이다.
“맛있어요. 어머님 손맛이!”
지나간 줄 알았던 촬영 팀이 저쪽 가게 앞에 멈춰있다. 그의 어머니의 음식 맛과 비교가 될까. 그래도 선거철 정치인보다는 진실한 반응이지 않을까. 엄마의 손맛이라니. 음식을 준비하는 일은 전부 어머니의 일이기만 하나. 하긴 요즘 젊은 부부들은 각자 돌아가며 요리하기도 한다지만 우리 아버지는 요리를 하지 않는다. 나도 어른이 되었지만 요리를 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가끔 혼자 살려면 요리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딱히 화를 내거나 강권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차린 밥을 마지막으로 먹은 건 이틀 전이다. 저녁, 상 앞에 마주 않았을 때 어머니는 갑자기 애정이 넘쳐 나와 감명 깊은 눈으로 내 밥 먹는 모습을 감상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신경이 곤두서서 나는 TV 쪽으로 관심을 돌리려고 먹방 싫어하면서 왜 또 생활정보 프로를 보냐고 물었다. 물론 많은 꼭지들 중에 오직 한 코너, 오지 기행을 보기 위해서임을 나는 잘 알았다.
어머니는 은퇴 후 오지에 집을 짓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텃밭을 가꾸는 미래를 이야기했다. 어머니가 노래를 불러댔기에 그 얘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냥 그래요 하고 넘어갔으면 될 텐데 어떤 생각이었는지 문득 집을 짓는데 드는 비용과 생활비를 집을 판돈으로 전부 충당할 수 있는지, 일을 그만두면 어떻게 생계를 이을 것인지, 오지에서 다치고 아프면 어쩔 것인지를 따져 묻기 시작했다. 느린 삶, 자신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삶은 현실에서 공짜가 아니다.
자신의 꿈이 현실적으로 수월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어머니도 모르지 않았다. 그 사실을 굳이 진지하게 따지고들 필요는 없었다. 다만 그때 내 눈에 들어온 주름이 패기 시작한 마른 얼굴과 일할 때 귀찮다고 귀밑 바로 아래 바짝 촌스럽게 짧게 자른 머리와 힘줄이 불거지고 거칠게 닳은 손, 옷 사이로 삐져나온 손목과 어깨에 붙은 파스가 눈에 박혀서 현기증을 불러오는 폐쇄감이 목에 탁 걸려버렸다.
그 모든 것이 나에게 지워진 부채와 현실의 무능력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젊을 적 그녀 얼굴의 히스테릭함과 간헐적으로 나오던 잔인한 처사와 째지는 고함, 현실을 인정하지 않던 쇠고집을 애써 다시 떠올리고는 신경을 긁는 말투로 물고 늘어졌다. 그녀는 그렇게 단순한 희생만 하는 천사가 아니었다는 점을 상기시켜야만 했다. 그 무엇도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갑작스러운 애정의 분출 한끝에 얼마 전까지 신경질적인 분노가 자리하고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되니까. 그녀는 나의 비아냥에 화를 냈다. 나는 그다음 날 아침부터 집에서 식사하지 않았다.
팥빵을 사고 모퉁이를 꺾으니 촬영 팀을 둘러싼 군집이 어느새 떨어져 나가고 단출해져 있었다. 작은 퍼레이드 같던 활기가 보이지 않는다. 하기야 비유를 그렇게 했어도 유원지의 가시적인 화려함을 떠올리면 과장이 심한 지도. 진짜 유원지의 퍼레이드 행렬은 화려함과 동시에 모조품의 냄새를 물씬 풍긴다. 국적 불명의 콘셉트들이 구색을 갖추기 위해 본떠온 외관을 뽐내는 동안에 주민들이 정체성을 지켜오는 진짜 축제는 없고 정해진 시간표에 따른 출몰이 있을 뿐이다.
지난 시간 동안 시장을 찾았을 정치인과 보좌진 그리고 취재진들도 인공적인 효율성에서 예외가 아니리라. 시간은 전략적으로 조정해야 할 자원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느림을 추구할 수 없는 어머니는 노동 시장에 자신의 시간을 내놓고 있을 것이다. 이 봉지 안의 팥빵은 몇 시간 어치인가.
“ 오천 원? 비싸요. 별로 신선하지도 않구먼.”
장바구니를 든 아줌마가 야채 파는 아줌마에게서 쪽파 값을 깎는다. 아줌마들. 모든 아줌마들은 엄마라는 속성을 포함하고 있나. 제례시장에서 물건 값을 깎아가며 장을 본 아줌마가 전을 지져 제사상을 차린다. 제사상 앞에서 아줌마의 남편과 시아버지, 시숙, 조카가 제사를 치른다. 제사가 끝나면 상을 차리고 다 먹으면 과일을 깎아 내온다. 설거지를 한다. 아줌마는 친척들의 경조사를 챙긴다. 엄마는 친척들의 경조사를 챙긴다.
엄마는 나의 혈연의 고리다. 사촌이 어느 학교에 들어갔는지 이모가 어디에 집을 샀는지 큰아버지가 어디가 아픈지 어머니의 입을 통해 듣는다. 친척들과의 관계는 내가 원해서 맺어지지 않았기 때문인지 썩 편안하지 않다.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비교하고 뒷담화 하고 때로는 덕담이나 조언을 빙자해 앞담화 하는 사이니까.
그렇다고 친척들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관심이 가지 않을 뿐이다. 내가 문화인류학자라면 친족제도에 대한 학술적 의미로라도 친척에게 관심을 가졌으려나. 가족은 사회의 기초적 연결 단위로 인간의 성격과 인격 형성의 틀을 형성하며 문화적 가치를 가르쳐 준다면서. 그러나 나는 문화인류학자가 아니다.
어머니도 친척들도 어릴 적에는 단순하게 다가왔는데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 엄마이던, 명절이면 떠들썩함과 음식에 마냥 들떠하던 시절로는 돌아갈 수 없다. 그러니까 더욱 나는 시장의 사람들 속에 섞여 들려고 애써야 한다. 아까 카메라에 담겼을, 대형 마트보다 정이 넘치고 사람 냄새가 나는 시장을 보라. 사람 사이에는 정이 있어야지. 빠르지 않게 걸어서 인사하고 값을 깎고 농담을 섞자. 엄마에게 이 팥빵을 가져다 드리자. 나는 좋은 자식, 정 있는 조카, 사촌, 이웃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그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