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생각이음 09화

8. 늦은 점심​

픽션-Part 2. 타인, 관계, 오랜 의문들

by Sadion






자반고등어처럼

너무 짜게 굴지 마세요

인생이 뭐 소금 무덤인가요


-조하도의 노래 「자반고등어」 중에서-







“자반구이 하나요.”


아주머니에게 내가 정한 메뉴를 가리키며 말한다. 생선구이 집 안은 붐비지는 않지만 손님들의 말소리로 차 있다. 옆 테이블에 한 무리의 아저씨들이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다. 윤 계장이라는 사람과의 일에서의 갈등 이야기이다. 앞 테이블에는 교회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권사인지 집사 인지인 할머니 두 분이다. 잠자코 듣고 있다 보니 사람 모이는 곳이란 다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말없이 홀로 식사하는 내가 별난 것처럼 느껴진다. 요즘 시대에 혼밥족은 예전만큼 드물지 않다지만 식사 중 나누는 이야기가 아쉬울 때는 혼자라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그래도 식당에서 혼자인 경우는 그나마 나을지 모른다. 술집에서 혼자인 사람은 어떤가. 썩 생기 있는 느낌이 아니다. 툴루즈 로트렉이 그린 「술 마시는 여자」라는 그림이 떠오른다. 탁자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한 손에 얼굴을 괸 채로 앞을 응시하는 여자의 옆모습이다. 여자 뒤로 는 빈 테이블이 있고 여자의 테이블 위에는 병 하나와 잔 하나씩이 놓인 채 혼자다. 거친 느낌의 선이 겹쳐진 결은 삭막해 보이는 여자의 현실에 인상적인질감을 형성한다. 여자는 부드럽게 미화되지 않는다. 로트렉의 그림 속 여자들이란 추하지 않은 게 그나마 나은 것이다. 그는 ‘인간은 추악하지만 인생은 아름답다.’라는 말을 남겼다.


로트렉 ,「술 마시는 여자」


참 묘한 것 같다. 화가의 눈에 비친 사람들은 그의 인간관을 반영하는 가 보다. 로트렉과 르누아르를 비교해보면 참 극명하게 갈린다. 르누아르의 녹아내리는 빛과 함께 밝은 색채의 덩어리로 아름답게 비춰지는 사람들과 로트렉의 탁한 색채로 왜곡된 모습의 몽마르트 유흥가 사람들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부유한 백작가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신체적 기형으로 추한 외모를 지녔던 로트렉은 알코올 중독으로 죽을 때까지 몽마르트의 환락가를 그렸다. 그의 그림 속 여인들이 추한 이유는 어쩌면 자신의 추한 외모 탓에 정상적인 방식으로 여인의 사랑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로트렉, 「물랑루주에서의 춤」


반면 가난한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직공으로 일했던 르누아르는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행락객들이나 어린아이와 여자들을 따뜻하게 묘사했다. 로트렉의 여인들과 달리 르누아르의 그림 속 여자들은 우아하고 부드럽다. 그는 일흔이 넘어 류머티즘 관절염 때문에 손을 쓰지 못할 때도 입으로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고 밝은 화풍을 끝까지 유지했다.


르누아르, 「뱃놀이의 점심식사」


화가가 아니라 해도 사람마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정한 방식, 나름의 인간관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느냐를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태어나서 외부세계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나 아닌 존재들과의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심리학에서 거론되는 애착 이론은 그 첫 단계인 어머니와의 관계가 한 사람의 이후의 인생에서의 인간관계의 근본 원인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1980년대에 신디 헤이잔과 필립 쉐이버는 성인의 애착 관계까지 이론을 확장시키며 안정애착, 불안정 회피 애착, 불안정 양가 애착, 불안정 혼란 애착 네 가지로 나눴다. 유아기 어머니와의 관계가 안정적이었던 사람은 행동과 말, 생각에 일관성이 있고 정서적으로 타인과 잘 조율해 새로운 도전과 인간관계를 잘 이루어 나가는 반면, 어머니와의 불안정한 관계로 두려움이나 거부, 양가적 반응으로 대처하게 되면 이후의 대인관계에서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는 이 이론은 유전적 기질, 사회적 관계의 복잡성, 애착 패턴 분류의 한계 등이 지적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주류 학계에서 의미 있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애착 유형은 인간관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안정된 애착 유형이라서 사람과의 관계란 두렵지 않은 것, 따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연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의 시선 속의 사람들이란 밝고 따뜻한 색채를 띠겠지.


그러나 내 인간관이 엄마 탓이라고 단순화해서 말하자니 조금 우습다. 나는 그보다 복잡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모든 사람이 붓을 쥐여 주었을 때 로트렉 아니면 르누아르로 갈라 질 것 같지는 않다. 윤 계장이나 장로님을 욕해도 그들을 절대 악으로 생각해서는 아닐 것이고 다른 누군가를 칭찬한다 해서 그 사람이 천사일 것이라고 여겨서는 아닐 것이다.


뭐, 한 길 사람 속을 모를 일이기는 하지만 성선설을 믿는지 성악설을 믿는지 분명하게 단언하지 않아도 사례가 될 만한 일들을 접할 때마다 사람이란 원래 이기적이라거나 사람이란 근본은 착하다는 생각을 때에 따라 양쪽 다 해본 적은 있을 것이다. 나에게 정확히 어느 쪽이냐고 당장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아주머니가 반찬과 밥을 테이블 위에 늘어놓는다. 반으로 갈린 고등어가 나란히 접시 위에 담겨 있다. 굳이 반으로 갈라서 정할 필요가 있을까.


친구들은 테이블에 음식이 다 놓이면 카메라를 꺼내 찍고는 했다. 단체 채팅방이나 SNS 페이지에 음식 사진들이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내가 뭘 먹는지도 공유하는 세상에서 홀로 식사해도 혼자가 아닌 기분을 내기란 어렵지 않다. 지금 당장 이걸 찍고 친구에게 보이면 된다. 특별한 메뉴는 아니니까 사적으로 더 친밀한 사람에게 식사 인증숏을 보내면 된다. 휴대폰으로 생선구이 상을 찍는다. 가장 최근에 연락한 순서대로 정렬된 채팅방을 훑는다. 상단에 있는 방들은 다 단체 채팅방이다. 보이지 않은 메시지의 수들이 빨간 원안에 표시되어 있지만 건너 띈다. 노랑 후드에게서는 아직도 메시지가 없다.


‘나 뒤샹 전 보러 나왔다가 이제 점심 먹어요. 소박하게 생선구이로 정했어요’


사진을 덧붙였다. 메시지 옆의 ‘1’이 지워지지 않는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밥을 한 술 떠서 입에 넣었다. 앞 테이블의 두 할머니가 일어나서 계산대로 걸어간다. 휴대폰을 다시 들여다본다. 메시지 옆의 숫자는 지워지지 않았다. 생선을 바르기 시작한다. 또 한 입 먹고 휴대폰을 다시 본다. 변화가 없다. 이 시간이면 바쁜 건지 단순히 일기 싫은 건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식사를 한다. 한참 밥을 욱여넣다 멈춘다.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든다. 대화창을 열어 스크롤을 올린다. 혹시 나의 ‘잘난 척’이 노랑 후드를 질리게 만든 게 아닐까? 어른이 된 후로는 너무 나대지 않으려고 늘 노력해왔는데. 채팅창 속 노랑 후드는 상냥하고 밝다.


나는 어땠지? 노랑 후드가 먼저 연락할 때서야 반응했다. 무슨 웃기지도 않은 아재 개그 같은 걸 쳤지. 바보 같다. 노랑 후드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겉으로는 상냥하지만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할지 알 수 없다. 먼저 다가서야 하는 걸까 미리 도망갈 구석을 만들어두고 가만히 있어야 할까? 애착 이론에 따라 날 분석한다면 불안정 회피 애착이라고 하려나.


밥알이 모래알 같다는 말이 뭔지 이제 알 것 같다. 차가운 바람이 등 뒤로 훅 들어온다. 새로운 손님들이 들어온다. 나는 짝눈을 악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노랑 후드를 아직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친구의 기준이란 뭘까. 나이가 같으면 다 친구일까. 같이 놀면 친구가 된 것일까.


식사를 함께하면? 식사를 함께하면 식구라는 말은 있다. 가족 하면 나오는 장면은 식사를 같이하는 모습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무리를 이루어 식사한다. 연인들이 만나 데이트를 하면 식사를 한다. 끼니를 같이 한다는 일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지게 한다. 노랑 후드와의 식사는 어땠더라. 노랑 후드는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었다. 그런데도 새우가 먹고 싶어서 분한 마음이 든다는 말을 했었다. 분하다니. 아쉽다도 아니고. 앞으로 몇 끼를 더 먹어야 노랑 후드가 친구라고 느끼게 될까. 휴대폰을 다시 들여다본다. 여전히 메시지는 읽히지 않았다. 어쩌면 다시 식사할 일이 없을지도 모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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