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생각이음 11화

10. 박명​

픽션-Part 2. 타인, 관계, 오랜 의문들

by Sadion




난 말이죠, 당신을 모욕할 생각도 기쁘게 할 생각도 없습니다. 친절하게 굴거나 못되게 굴거나 때리거나 얻어맞거나 유혹하거나 당신에게 유혹당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난 그저 제로이고 싶습니다. 난 따뜻한 온정도 싫고, 남과 반드시 친해져야 한다는 사명감도 없고, 주먹질이라는 폭력 이상으로 우정이라는 폭력을 두려워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서로 비집고 들어갈 수도 없고 그저 잠시 나란히 놓여 있다가 각자의 방향으로 굴러가는 그런 제로가 됩시다. 정의할 수 없는 시공간이 이 시간과 이 장소의 끝없는 고독 속에서 우리는 혼잡니다. 내가 여기서 당신을 만날 이유도 당신이 나와 마주칠 이유도 온정을 나누어야 할 이유도 우리가 내세울 만한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해 줄 만한 적당한 수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단순하고 외롭고 오만한 제로가 됩시다.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의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 중에서








땅거미가 져가는 한길을 건너 우측으로 꺾어들자 기와집을 연상시키는 지붕이 얹힌 콘크리트 건물이 나온다. 자세히 보니 장례식장이라고 쓰여 있다. 검은 정장에 삼베 띠를 팔에찬 사람들이 주차장 한편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다. 잠시 걸음을 멈춘다.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멀리서도 지친 기색이 엿보인다. 조문객을 받을 필요가 없다면 고인의 가족들이 이곳에 머물 일도 없었겠지. 조문객 없는 장례식이라. 문득 영화 「스틸라이프」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쓸쓸히 놓인 관 앞에 사제와 키 작은 중년 남자 둘만이 서 있다.


키 작은 중년 남자는 고독사 한 사람들의 장례를 치러주는 공무원 존 메이. 자신이 장래를 치러준 사람들만큼이나 고독하게 살아온 그는 격식을 차린 장례는 예산과 인력 낭비라는 시청의 태도에도 고집스레 조사를 써 낭독하고 고인이 좋아하던 음악을 틀고 고인의 종교에 맞춰 식을 치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부서 간 통폐합으로 인해 해고를 앞두게 된다. 그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맡은 고독사 사망자 빌리 스토크의 연고자를 직접 찾아다니며 교도소를 드나드는 알코올 중독자에 부랑아였지만 풍부한 인생사를 지닌 그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고립된 채 틀에 박혀 살던 그의 삶에 작은 변화를 맞지만 곧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그의 장례식에는 아무도 오지 않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시각 같은 묘지에 묻히는 빌리 스토크의 장례식에는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여러 지인들이 참석한다. 스토크의 장례식이 끝난 뒤 존의 무덤가에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의 손으로 생의 마지막 길을 인도받은 영혼들이다.


인간은 혼자다. 죽음 앞에 한 인간의 의미와 존엄은 무의미해지는 것 같다. 그리해서 죽음 앞에 인간은 더 철저히 고독해진다. 그러나 존 메이는 그게 다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시에서 비용 절감을 종용해도 장례식의 형식을 고집한다. 죽은 이들 역시 인간적으로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완전히 혼자인 사람이어서였을까.


그는 인간은 결국 혼자이며 죽음 앞에서 삶의 의미는 사라져 버린다는 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빌리 스토크의 장례식을 통해 증명하고 싶어 한다. 그의 시도는 성공했지만 그의 삶의 변화에 대한 희망은 죽음으로 사라지는 아이러니란. 가로등이 일제히 켜진다. 이젠 정말 밤이 시작되었다. 지금 이 밤에도 사람이 죽고 그의 연인, 가족, 동료와 친구, 그와 연결된 이들에게 연락이 이어질 것이다. 내가 죽으면 그들과의 모든 연결은 사라져 버리는 걸까?


노랑 후드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가 내 장례식에 오는 장면이 떠오르자 도리질 쳐진다. 아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라면 존 메이처럼 아무도 오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시체가 썩어 들어가 악취가 날 때쯤에야 이웃들이 죽음을 알게 될 때는 공중곡예 중에 문득 아래를 보았다 안전망에의 구멍을 발견할 순간이다.


고독사가 두렵지는 않다. 죽은 이는 말이 없는 법이다. 그 모든 관계의 피로를 감수한다 한들 그 연결은 죽음 앞에 무의미해지리라. 어쩌면 관계에서 빚어지는 골치 아픔을 최대한 피하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나는 휴대폰을 켜 메신저 알림 창을 살핀다. 단체 채팅방에 보지 않고 쌓인 메시지들이 불어나 있다. 채팅방을 열어 주고받았던 메시지를 살핀다. 농담들, 식사 잘하라는 인사, 생일 축하 멘트, 일정 공지가 이어진다. 대부분은 인사치레고 나머지는 가벼운 잡담이다. 따로 가까이 지내는 사이가 아니라면 이 사람들은 서로의 속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사실 알 필요가 없겠지. 나도 알고 싶지 않다.


문제는 예의와 의무를 넘어 다가오는 사람들이다. 부모님께 예의를 갖추고 성의를 표하는 것 이상의 섬세한 감정적 교류를 기대하는 일이 분란을 불러오고 연인에게 특별한 예외만을 강요하는 행동이 예의를 넘어 도의를 무너뜨리듯이 선을 넘어서는 관계의 균형은 무너져 버리게 되어있다. 주는 만큼 받기를 기대하게 되는 게 사람 마음이지만 관계란 늘 똑같이 주고받을 수 없기 때문에 관계에 대한 불안이 생긴다. 사람들은 가까워졌다는 생각을 할 때 기대를 가지게 된다. 내가 이만큼 많은 말을 해서 스스로를 드러내는데, 내가 이만 큼 베풀었는데 저 사람도 이만큼 돌려주겠지.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실망한다. 실망이 반복되면 어느새 불안해진다. 우습게도 그런다. 실제로는 상대가 나에게 해를 입히지나 않으면 다행인데도.


그렇다면 느슨한 연결이 답일까. 70년대에 사회학자 그라노베터는 정서적 열결이 강하지 않은 관계인 느슨한 연결고리가 의외의 힘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다른 환경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같은 환경의 사람과는 다른 정보를 접하기 때문에 새로운 기회, 정보, 판단을 줄 가능성이 커서 가족이나 친구 같이 가까운 사람보다는 친하지 않지만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실질적인 도움은 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근래의 소셜 네트워크의 확산은 이를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것 같다. 기대로 인해 실망할 필요가 없지만 도움이 될 수 있는 관계라. 불안할 일이 없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소셜 네트워크의 가상의 관계에서 가상의 자아를 형성하고 중독에 가깝게 몰입하는 사람들에게 타인의 시선에 대한 집착 아래 현실과 가상의 괴리가 주는 불안이 있다는 사실을 과연 간과할 수 있을까. 그러한 가상에 대한 집착이 현실의 관계에 대한 문제에서 비롯되기도 한다는 점은 사람이란 선을 넘어오는 타인을 불편해하는 한편으로 선을 넘고 싶어 하는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지도 모른다. 타인의 시선을 통한 인정, 사랑을 갈망함으로 인해 수반되는 불안은 여기에도 존재한다.


가로등이 켜졌지만 사위는 아직 어렴풋이나마 빛이 남아있다. 문상객들이 장례식장 입구로 들어선다. 느슨한 연결이든 강한 연결이든 어떻게 해야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편안해질 수 있을까. 과거의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 옛사람이나 정서적 좌절과 부채감을 동시에 선사하는 가족으로부터 도망치면 평안해 질까. 느슨한 연결만으로 만족하며 살면 될까.타인은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희곡 대사를 되새기면서도 타인에게 기대를 버릴 수 없는 마음은 무엇인가. 결국은 혼자일 수밖에 없음에도 혼자일 수 없다. 늘어선 가로등을 따라 걷는다. 나의 장례식은 오늘이 아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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