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Part 3. 나와 나 사이의 틈을 들여다보며
그런데 오직 ‘나’라는 것만은 잘 달아나서 드나드는데 일정한 법칙이 없다. 아주 친밀히 붙어있어 서로 배반하지 못할 것 같다가도, 잠시 살피지 않으면 어디론지 또 행방을 감춘다. 이익이 보이면 떠나가고, 위험과 재앙이 겁을 주어도 떠나간다.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만 들려도 떠나가며 눈썹이 새까맣고 이가 하얀 미인의 요염스러운 모습만 보여도 떠나간다. 한번 가면 쉬 돌아올 줄 모른다. 그래서 붙잡아 만류할 수가 없다. 그러니 세상에 나보다 더 잃어버리기 쉬운 것은 없다.
-정약용 서간집 「사랑하는 내 아들아」 중에서-
침대에 몸을 던지고 하릴없이 휴대폰을 켠다. 유튜브를 켜려다가 그냥 앨범을 열어 저장된 사진들을 본다. 안내문, 책의 일부분, 풍경, 얼굴들. 얼굴 중에도 유독 많이 연달아 찍힌 건 휴대폰 주인의 얼굴이다. 스마트폰이 보급된 이후 더더욱 사람들이 셀카를 찍는 횟수도 기술도 늘었구나. 사진 속의 나는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른 각도로 렌즈를 응시하고 있다. 새삼 묘한 감각이 느껴지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얼굴을 포착해 남길 수 있게 된 일 몇 세기 전에는 화가들이나 가능한 일이었다는 점이 떠올라서다.
사람들은 자화 상하면 고흐를 많이 떠올릴지 모르겠다. 강렬한 터치로 그려낸 날카로운 눈과 튀어나온 광대뼈, 투박한 느낌의 화가의 얼굴들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하지만 나에게 자화상의 화가 하면 더 마음이 가는 쪽은 램브란트다. 그는 십 대 후반에서 육십 대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자화상을 계속 그렸다. 화가로서 독립한 지 얼마 후 커다란 캔버스를 전면에 두고 한참 뒤쪽에 왜소하게 그려진 모습에서 앞으로 펼쳐질 화가로서의 삶에 대한 기대와 압박감이 보인다.
그 그림 이후로도 다양한 표현으로 자신의 얼굴을 그린다. 그러다 삼십 대가 되면 성공의 정접에서 화려한 동방풍 옷을 입고 개 한 마리와 함께 당당한 표정으로 선 초상화가 등장한다. 그 무렵의 화가는 저축도 하지 않으며 앞날을 확신하며 사치를 부렸다. 그러나 아내가 죽고 송사에 휘말리고 유행의 변화로 일이 떨어지며 그는 파산하게 된다. 인생의 내리막길에서 자화상 속 화가는 화려함을 벗고 어두운 배경과 단색조 안에 고독과 주름을 드러낸다. 그가 죽기 몇 주 전 그린 자화상 속 얼굴은 검은 배경에서 노란 색조로 서글픈 빛을 내뿜으면서도 웃음 짓고 있다. 달관의 미소였을까. 노년의 이 그림이 이전의 자화상들 보다 삶의 깊이가 베어 나오는 것 같아 좋다.
이 셀카들 속에 나는 얼마나 깊숙이 담겨 있을까. 이 사진들 속에는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고자 하는지는 드러난다. 가장 잘생겨 보이는 각도로 외적으로 좋게 보이고 싶었다는 것은 알겠다. 책장을 배경으로 찍은 게 유난히 많은 이유는 아마 지적인 인상을 보이고 싶어서 이겠지. 이건 정말 진짜 나 일까?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치는 나의 이미지는 일반화된 타자다. 사회심리학자인 미드가 세운 자아 이론의 개념이다. 자신이 속한 사회의 가치와 문화를 따르는 일반적인 가상의 타인의 모습을 자아에 반영한 것이다. 대상을 보는 주체로서의 나가 아니라 보이는 대상, 객체로서의 나는 사회의 요구를 따르며 사회에 적응하게 한다.
그럼 나만의 고유성은 어디에서 올까. 면접서류의 증명사진이나 여권사진이 나의 외모를 식별하게 해 주기 때문에 고유성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짜 나를 타인과 구별해 주는 요소는 얼굴의 생김새인가? 그렇다면 일란성쌍둥이는 같은 사람인가. 나에게 내가 남과 다르다고 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 거지? 그것은 주체로서의 자아가 아닐까? 개인적 신념과 충동을 따르는 주체로서의 자아는 대상이 되는 외부의 사물들을 봄으로서 소유한다. 그림의 주인은 시선의 주인인 화가인 것처럼. 자화상을 그린 시선의 주인은 그림 속의 대상, 모델이기도 하다. 그렇게 안과 밖이 이어져 있기에 램브란트의 자화상들이 더 흥미로울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자화상과 달리 현실에서는 객체로서의 나와 주체로서의 나는 분열한다. 보이는 자아와 내면의 자아 사이가 현실에서는 대립해 간극이 커지게 되는 순간이 있다.’나’는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분열은 내면의 자신을 선택하는 과감함을 높이 사는 현대적이고 진보적인 말들이 넘치는 오늘날에는 자아를 찾겠다며 직장을 버리고 훌쩍 떠나는 일도 있다. 하지만 보이는 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을 수는 있을까.
일반화된 타자가 없다면 나는 사회라는 연결망에서 배제될 것이다. 더러운 옷과 부스스한 머리에 슬리퍼를 끌고 면접장 안에 들어가는 나는 면접관의 시선에 들어오는 순간 탈락한다. 졸업 앨범 속에 비슷해 보이는 나, 전교생과 똑같은 교복을 입고 교칙에 따라 머리를 자른 나는 세상의 일부일 뿐이다. 반항만 하면서는 살아갈 수 없다. 자아의 분열에 대처하기 위해 어떤 방식을 택하든 단 한쪽만을 택하는 결말이 통합을 이뤄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책장을 훑는다. 꼭대기에 있는 두꺼운 빨간 앨범을 향해 손을 뻗는다. 이 안에는 갓난아기부터의 내 사진이 있다. 유치원 발표회, 초등학교 운동회, 중고등학교 수학여행. 이렇게 보니 남들처럼 살아왔구나. 그밖에도 여러 사진들이 있지만 대부분 낯설다. 이 날들은 분명 존재했지만 기억 속에서 밀려난 지 오래다. 사진 속 나는 내가 맞을까. 지금의 내가 이 기억들의 총합이라면 기억을 잃은 나는 나라고 할 수 있을까? 타인의 기억 속에 나는 지워지지 않고 존재한다면 사회적 맥락 속의 나는 그대로라고 할 수 있지도 모른다. 문제는 내가 아는 내면의 나를 잊으면 어떻게 되느냐다.
해리성 둔주라는 정신과 질환이 있다. 신분과 이름, 과거의 경험을 잃어버리지만 잃어버렸는지 모른 채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신분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정말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생물학적으로나 법적으로는 동일인이라 할 수 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스스로를 이전의 자신과 다르게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 모른다고 봐야 하는 걸까. 나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분명한 개념으로 정리되지 않은 산재된 정보라 해도 그 모든 요소가 종합되면 나를 나로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나를 이루는 요소는 여러 가지고 유동적이다. 여러 요소가, 기억이 축적되는 것은 시간과 함께 하고 시간은 필연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는데 애초에 과거의 나를 기억한다 해도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같은 존재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사진 속의 나들을 본다. 시간 속에 변화하는 나를 , 외부와 내부의 나를 연결 짓는 근거는 뭔가. 내가 누구인지 확언할 수 없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