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Part 3. 나와 나 사이의 틈을 들여다보며
세상에는 참 평화 없어라, 고통 없이는
-비발디의 칸타타「세상에는 참 평화 없어라」 중에서-
한밤, 방안에 무거운 생각이 가라앉는다. 잠긴다. 생각이, 생각에. 생각은 나를 그 속에 가라앉히고 문을 잠근다. 도망치자. 문을 두드려. 거기 누구 없어요? 밤은 언제나 빨리 왔다. 시계는 자정을 넘겼음을 보여준다. 지나간 하루 동안 비틀비틀 생각을 밟아왔지만 되돌이켜 생각해보면 미망이다. 그 바글거리는 생각들 끝에 남은 것은 후회다. 밤에 후회가 없다면 평안할 텐데. 비발디는 자신의 종교 칸타타 첫머리에 “세상에는 참 평화 없어라”라고 했다. 성당의 미사 시간이면 평화의 인사를 한다.”평화를 빕니다.” 평화의 반대말은 전쟁일까. 시계가 죽었다.
생각이 조각 조각나서 흘러간다. 감각은 붕 떠 있다. 내가 나라는 느낌에 이상이 생기려는 걸까? 나를 나로 느끼게 하는 감각이라.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라는 책 속의 한 장이 생각난다. 몸이 없는 크리스티너 였던가. 건강한 27살 여성인 크리스티너가 쓸개 제거 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입원한다. 수술 당일 날 크리스티너는 몸을 제어하지 못해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한다. 그녀의 몸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사람의 몸의 감각은 시각, 평형기관, 고유 감각으로 이루어진다. 그녀는 근육, 힘줄, 관절 등으로 전달되는 연속적이면서도 의식되지 않는 감각의 흐름인 고유 감각, 제육감을 잃어버린다.
무의식 중에 자동적으로 일어나기에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는 감각이지만 이 감각을 잃게 되면 스스로의 몸을 제어할 수 없게 된다. 내 몸이 내 몸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눈으로 신체 각 부위를 지켜보며 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여서 일상적인 생활이 가능해지지만 빼앗긴 감각은 돌아오지 않고 그녀는 몸이 없는 채로 살아가게 된다.
나를 ‘나’이게 하는 감각은 제육감 외에도 무엇이 있을까. 자의식? ‘나’를 의식하는 것이 자의식이라면 의식한다는 건 또 뭘까? 사전에 따르면 의식이란 깨어있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이나 사물에 대해 인식하는 작용이다. 의식이란 인지한다, 즉 안다는 것이다. 의식에서의 인지란 먼저 감각기를 통해 들어오는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인 감각적 인지가 있다. 지금 들리는 창밖의 빗소리와 보이는 번개의 섬광을 알듯이.
그다음 기억 인지다. 기억력이 없다면 이것이 비이고 번개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터다. 기억 인지는 감성인지를 이끈다. 이 날씨는 기분을 가라앉힌다. 그리고 이성적인 인지는 이런 의식의 인지에 대한 분석을 이끌었다. 만약 의식 안에 이성적 인지만 있다면 나는 평화로웠을 것이다. 나를 이성적으로 들여다보았다면 독백은 깔끔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이성과 동시에 감성이 존재하기에 이 날씨에 이 뒤숭숭한 기분이 흐르는 걸까.
이성과 감성이라. 제인 오스틴의 책 제목과 같다. 이 책은 「 분별력과 감수성 」이라고도 번역된다. 이 이야기는 장자상속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두 자매가 사랑이 금전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그린다. 분별력은 언니인 앨리너의 성격을 대변하고 감수성은 동생인 메리 앤의 성격 대변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결혼을 통해 감수성으로 이어지는 낭만적 사랑보다 금전적 신분적 안정을 택할 분별력을 얘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성적인 언니의 사랑은 능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경쟁자의 배신을 통해 이루어지고 바람둥이를 사랑했던 여동생은 사랑하지는 않지만 자신을 위해주는 존경하는 사람과 결혼한다. 오스틴의 다른 작품인 오만과 편견과 대비되는 씁쓸한 결말이다. 소설 속 19세기 영국 중류 계급의 여자들이 사랑 앞에서 이성과 감성 사이에 놓였다는 이야기는 그냥 연애담으로만 취급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성과 감성 중 어느 쪽을 따를 지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를 테면 지금 이대로 느끼는 기분에 따라 스스로를 둘 것인지 계속 이성적으로 생각을 가다듬을 것인지 처럼. 시계가 멈췄다. 그럼 배터리를 갈아라.
이론이나 그림, 책과 영화 따위를 떠올리며 주위를 돌리려는 독백은 공허하다. 내 속에서 이어지는 수다는 정신 건강이 무너지고 있다는, 내 자아가 분열되고 있다는 전조가 아닐까. 생각과 생각의 연결이 끊어져 가고 있는 동안 일관성과 동일성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성이 자아의 연결을 지켜 주리라고 난 믿어왔다. 하지만 본래 나라는 균일한 실체가 존재하지 않다면. 그럼에도 나라는 꼴을 연명하기 위해 내일도 오늘과 같이 필사적으로 생각에 매달려야 한다는 전망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침묵하면 되지 않느냐. 그러나 나는 침묵이 두렵다. 속으로 끊임없이 말을 하지 않는다면 생각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까. 생각이 없다면, 내면의 목소리가 없다면 내가 존재하지 않게 되지 않을까 불안하다. 해리포터 시리즈 속 마법사 감옥의 간수인 인간의 행복과 영혼을 먹는 디멘터는 죄수의 영혼을 전부 빨아내기 위해 입을 맞춘다. 디멘터의 입맞춤을 받은 인간은 더 이상 생각하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육체만 살아있는 빈 껍질이 된다. 생각을 영영 멈춘다는 일은 디멘터의 입맞춤과 같은 공포다. 물론 이런 두려움은 비이성적인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는 하다. 생각 없이 흘리는 순간들이 없다면 사람의 정신은 쉴 수 없을 것이다.
천장을 올려다본다. 모노톤의 굵은 바둑판 같이 붙인 방음 블록이 보인다. 흑과 백처럼 이성과 감성, 정신과 육체, 세상과 개인을 나눌 수 있다면 이해하기 쉬웠을 테니 모든 게 평화로울 수 있지 않을까? 현실에서 모든 것이 얽혀있다. 뒷목이 뻣뻣해지고 머릿속이 불쾌하게 출렁거린다.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지는지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에 몸이 불편한지 모르겠다. 책상 위의 컴퓨터와 휴대폰을 본다. 웹서핑을 하거나 메신저로 대화하나 해볼까. 아니면 모 연예인처럼‘난 가끔 눈물 흘린다’라고 올리는 거다. 감성 포스팅이라. 헛웃음이 난다. 설령 그 순간은 몰입하여 고통을 잊더라도 어차피 오프라인 되는 순간 홀로, 다시 제자리로 강한 관성을 느끼며 돌아간다. 나라는 감각은 분리될 수 없고 없앨 수 없지만 확신할 수 없다.
이럴 때는 이성적여 지자. 낭만적 사랑과 분별력 있는 선택을 칼로 자르듯 가를 수는 없기에 소설 속 자매는 감정적 고난을 겪지만 결말은 이성으로 판단했을 때 현실적인 방향으로 맺어진다. 시계는 멈춘 채이지만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떨어질 것처럼 몸이 무겁게 바닥으로 당겨지는 이 감각은 오늘 하루치 불어난 생각의 무게일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