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생각이음 14화

13. 불면​

픽션-Part 3. 나와 나 사이의 틈을 들여다보며

by Sadion





죽는다, 잠잔다....... 다만 그것뿐이다. 잠들면 모두 끝난다. 번뇌도 육체가 받는 온갖 고통도. 그렇다면 죽음, 잠, 이것이야말로 열렬히 희구할 생의 가치가 아니겠는가. 잔다, 그러면 꿈도 꾸겠지. 아, 이것이 문제다. 대체 생의 굴레를 벗어나 영원한 잠을 잘 때, 어떤 꿈을 꾸게 될 것인가. 이를 생각하면 망설여질 수밖에...


-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 중에서-








새벽이다. 지금 여기 나는 깨어 있다. 나는 누운 채로 이미지를 떠올린다. 어느 영화 속이었다. tv 채널을 돌리다 발견한 장면이었는데 흰 침상 곁에 한 여자가 있었다. 여자가 고통스러운지 끙끙거리고 있자 그 곁에서 일감을 들고 앉아있던 다른 두 여자가 일어나서 그 여자를 양옆에서 부축해 침대에 뉘었다. 아픈 여자를 눕히고 나서 한 여자가 힘겨워하는 그녀와 눈을 맞추자 어느새 떨림이 멎더니 웃는 것이었다. 거기에 마주 웃으며 두 사람이 웃었다. 그 뒤로 채널이 바뀌었고 그 영화의 이름을 알아내지 못했지만 이상하게 그 장면만큼은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있다. 왜 일까?


지금 이 순간에 생각을 이어나가는 것이 상처 난 발바닥으로 한 걸음씩 내디디는 것 같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난다. 나는 창가로 간다. 밖을 내다본다. 가로등의 불빛이 아직 남아있다. 카페, 지하철, 광장, 미술관, 시장, 횡단보도 위의 스쳐감. 되감기, 되감기. 맨 처음은 어떻게 시작되었더라. 새벽. 꿈을 꾸다 깨었지. 그때부터 보고 듣는 매 순간 희미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통증이 저 아래로부터 있어왔다. 아래를 내려다본다. 보도는 촉촉이 젖어 있다.


‘그녀는 창 아래를 쳐다보고 있었다.....그녀는 한 번 서편 타인 연못에 1 실링을 던진 적이 있었다. 더 던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삶을 던져 버렸다. 반면에 그들은 계속 살아간다. 그들은 늙어가리라. 중요한 어떤 것이 있었다. 그것은 시시한 이야기에 둘러싸여서, 외관이 흉하게 되고 , 그녀의 삶 속에서 손상되어 매일매일 부패와, 거짓말과, 잡담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이것을 그대로 보존하였다. 죽음은 도전이었다. 죽음은 의사를 소통하려는 시도였다. 반면에 사람들은 신비하게도 자신들을 피해 가는 중심에 다다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꼈다. 친밀했던 관계는 멀어져 가고, 황홀함은 시들고, 사람은 혼자다 하지만 죽음에는......... ‘


“씨발, 개년. 졸라 잘난 척이야!”


오른편 모퉁이에서 젊은 남자 둘이 걸어오고 있다. 술을 마신 듯 언성이 높고 걸음걸이를 느리 뺀다. 두 사람은 비속어와 울분을 담아 지껄인다. 어리석은 생각은 술주정 같다. 나는 독한 술을 먹은 듯 위장이 뒤집혀 오늘 하루로 날궂이 해댄다. 도서관 가는 길의 어슴푸레한 빛, 가페의 진동벨의 소리와 원두 냄새, 광장의 군중이 내는 웅성임, 뒤샹의 변기, 시장의 냄새, 횡단보도, 횡단보도 너머의 얼굴, 자반구이의 맛, 똑같은 얼굴이 연이은 사진들, 기도문, 내 탓이요 내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오니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천사와 성인들은 저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나는 욕을 하고 싶다. 창밖의 사람들처럼. 시침은 세시를 가리키고 있다. 잠들어야 한다. 그러나 잠들 수 없다. 내가 이대로 잠들어서 깨어날 필요가 없다면 잠들 수 있을까? 잠들었다 일어났을 때의 내일이 오늘과 같다면? 더 이상 살아갈 자신이 없다면? 영원히 잠들어 버리는 편이 났지 않을까?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걸까?


죽음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인간은 인지할 수 있다. 그 앎은 분명 두려움과 걱정을 주었고 내세를 생각해내고 믿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내세가 없기를 그래서 정말 끝으로, 무로 돌리고 파하는 사람들도 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보다 삶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큰 순간이 온다. 이런 순간이 없는 것도 아닐 텐데 왜 불멸을 꿈꾸는 사람들은 부단히 도 매달리는 걸까.


육체적 영생, 부활, 영혼의 분리, 유산 남기기 같은 방식들로 사람들은 불멸을 꿈꾼다. 육체적 영생을 위해 과학은 많은 연구를 한다. 기독교는 최후의 심판으로 사람들이 부활하게 된다고 전한다. 심령현상을 믿는 사람들은 영혼이 육체와 분리돼서도 세상에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 자체를 피하기 힘들어도 후세에게 정신적 생물학적 유산을 남김으로써 불멸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있다.


유산이라. 유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진화 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책 「 이기적 유전자」 에서 인간은 유전자를 전하기 위한 운반체로 진화의 주체는 유전자 단위이지 개별 종의 단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밈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인간의 사고와 문화도 유전자처럼 복제되고 전파된다고 주장했다.


나를 움직이는 것이 개별 개체로서 내가 아니라 유전자라고 본다면 나의 모든 희로애락이 의미 없는 반사작용일 뿐이란 말인가? 반항하고 싶어 지는데. 내가 이대로 자식도 없이 후세에 남기는 생각도 없이 죽어버리면 유전자의 프로그래밍 따위는 가볍게 재쳐버리는 거겠지. 그래, 그리고 종교적으로 죄를 지은 게 되다. 지옥에 갈 것이라고 배웠었지.


단테의 신곡 속에는 지옥의 풍경이 등장한다. 지옥의 죄인들이 받는 벌은 전부 신체적 고통을 가하는 형벌이다. 정신적 고통을 오히려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신곡에 나오는 죄인들이 방문자인 단테에게 말할 때 보면 지난 일을 잘도 떠올리고 감정을 내보인다. 생각할 여력이 있어서 그곳에서 지난날의 정신적 고통이 여전히 이어진다면 그게 가장 끔찍하겠지. 그냥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고 믿고 싶다. 불면을 끝내고 싶다. 영원히 잠들고 싶다.


더 이상 주섬주섬 주워들은 정보들을 끄집어내서 생각을 돌리려 하지 마. 나는 얼마나 어설프게 세상을 짧은 지식으로 설명하려고만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지. 나는 이 넓은 세상에서 혼자다. 그러나 죽지 않는 이상 이 세상을 떠날 수 없다. 매일매일의 날씨가, 제도와 법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옭아매지만 그럼에도 혼자다. 나는 나 자신 앞에서 조차 혼자다. 나는 내가 나라는 사실에 적응하기 힘들다. 이 모든 독백이 나의 전부일까?


이 독백 말고도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 나의 기억과 욕망들도 있다. 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 수면 아래에 있다고, 그러니 수면 위로 끄집어내서 치료해야 한다고 정신분석학자들이라면 그러겠지. 그리고 어렸을 때 엄마와 어땠는지 타령이나 할 거야. 숨겨진 트라우마를 기억해내! 억압된 기억 속의 트라우마는 무슨. 나를 힘들게 하는 건 일상이다. 일상이 조금씩 조금씩 속을 파먹어 거대한 구멍이 생겨버렸다. 과거의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구멍이 아니다. 구멍으로 바람이 들어와 스칠 때마다 고통스럽다. 정말 구멍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가슴을 내려다본다. 구멍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들어 새벽의 어슴푸레함을 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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