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생각이음 16화

15. 당신

픽션-Part 3. 나와 나 사이의 틈을 들여다보며

by Sadion








아무도 이것을 눈치채지 못했으나

모든 것은 이루어지고 있음을

기억하라,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도, 우리조차 우리가 살아 있음을 알지 못했으나

덩굴이 나무를 정복하듯이

꽃이 열매를 맺듯이

마침내 이루리라는 것을 기억하라


-나희덕의 시 「살아라, 기억하라」 중에서







머리에 날개를 단 히프노스가 날아오른다. 붉은 꽃밭 건너 지평선 끝에서 하얀빛이 점점 가까워진다. 마침내 빛이 시야를 다 덮었을 때 거기 누군가가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책장을 넘겼다. 당신은 아침에 도서관을 향해 걸었다. 당신은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당신을 지하철을 탔다. 당신은 광장에서 사람들 사이 서 있었다. 당신은 미술관에 들어가 미술 전시를 보았다. 당신은 시장에 들러 빵을 샀다. 당신은 식당에서 생선 구이로 점심을 먹었다. 오후 네시에 길 위에서 소설을 떠올렸다. 시간이 흘러 저물녘에는 장례식장을 지나갔다. 집에 돌아와 당신은 생각에 휘감겨 불면의 늪에서 허우적대었다. 아니다. 당신은 이 모든 것을 그냥 몇 초 만에 넘겨버리고 이 페이지에 와있다. 당신은 잠들어 있다. 어머니의 곁에서.

어른이 된 후의 삶은 해가 갈수록 팍팍해지는 것 같다. 아이였을 적의 당신은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상상했었나. 당신은 컴퓨터 앞에 앉는다. 그리고 타자를 치기 시작한다. 당신은 글을 쓴다. 글을 써나갈수록 당신은 당신을 배신한 고등학교 동창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당신은 많은 말들을 떠올리지만 정작 무엇 하나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지 않나.

그런데도 뭔가 아는 것처럼 이런저런 것들을 주워섬기며 혼란을 더한다. 하루치의 혼란은 어눌한 말들로 이어진다. 아이 때의 당신이라면 이런 말들을 남겨 변명할 생각은 품지 못했겠지. 글이 막바지에 이를 때쯤 당신은 지금까지 쓴 내용을 돌아본다. 이야기는 황혼을 지나 밤중에 돌입했다. 파티가 끝난 후 홀로 남은 느낌이 든다.

1920년대의 어느 밤, 런던 본드가에서 열린 파티의 막바지에 딸을 본 아버지, 리처드는 새삼 딸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챈다. 전쟁으로 아들을 잃고 아내는 크게 앓고 난 후였다. 그렇게 황혼기에 이른 삶에 새삼스레 젊음의 생기가, 희망이 남아있음을 새롭게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당신은 지난 새벽에 읽었던 책을 다시 집어 든다. 소설 속 인물들의 의식 속으로 흘러들어 간다.

‘홈즈는 이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홈즈는 문을 벌컥 열어젖히리라. 홈즈는 겁먹었나 하고 말하리라. 홈즈가 그를 붙들리라. 하지만 안 돼, 홈즈는 싫어, 브래드 쇼는 싫어. 다소 불안정하게 일어서며, 정말로 걸음걸음마다 껑충껑충 뛰며 손잡이에 ‘빵’이라고 새겨져 있는 필머 부인의 날카롭고 깨끗한 빵칼을 생각해 보았다. 아, 하지만 칼날을 더럽혀서는 안 돼. 가스불은 어떨까? 하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어. 홈즈가 올라오고 있었다. 면도칼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종류의 일을 하는 레지아가 어딘가에 싸놓았다. 단지 창문, 블룸스베리 지역의 커다란 창문만이 남아있다. 창문을 열고 자신을 투신하는 귀찮고 성가시고 다소 멜로드라마적인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것을 비극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나 레지아에게는 아니었다.(왜냐하면 그녀는 자신과 함께 있기 때문에). 홈즈나 브래드 쇼는 그런 유의 일을 좋아했다.(그는 창문턱에 걸터앉았다)하지만 그는 맨 마지막까지 기다리리라. 그는 죽고 싶지는 않았다. 삶은 좋은 것이었다. 태양은 뜨거웠다. 단지 인간들-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얼까? 건너편 계단을 내려오던 어떤 노인네가 멈추어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홈즈는 문간에 있었다. 내가 당신에게 그것, 삶을 줄게! 그는 외쳤다. 그리고 필머 부인의 마당을 두른 울타리가 있는 아래로 자신의 거세고 난폭하게 던져버렸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정신병에 시달리던 젊은이는 죽음을 택한다. 이 소식을 그의 정신과 의사였던 브래드쇼는 그날 저녁 리처드의 파티에서 이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를 들은 리처드의 아내 클러 리서는 아무도 없는 빈방으로 들어가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는 죽은 젊은이가 자신과 같다고 느낀다. 당신은 그녀처럼 젊은이와 자신이 같다고 느낀다. 당신은 죽은 젊은이처럼 아직 젊다. 그러나 동시에 클러리서처럼 늙었다.

어느 쪽이든 당신은 어린 시절을 떠났다. 어른이 된 당신의 하루는 지나갔다. 또 다음 하루가 오고 그다음 하루가 오고 그 다음다음 하루가 올 것이다. 그것이 삶이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숨을 쉬고 심장이 뛰고 있다. 이 삶을 계속 이어갈 것인가. 당신은 고민한다. 당신은 이 글의 끝을 고민한다. 파티가 끝나는 밤 딸을 발견한 아버지처럼 무언가 남아있다는 신호를 받게 될까? 오늘 그런 신호를 받더라도 내일 당신은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어 질 수 있다. 당신은 망설인다. 그러나 결국 당신은 그런 신호를 주기로 한다.

당신은 왜 그랬나? 죽음과 삶 사이에서 당신은 한발 물러섰다. 정말 물러섰나? 사실은, 당신은 투신했다. 당신은 일어서 창가로 간다. 창밖으로 수많은 나날들이 스쳐 지나간다. 세상을 향한 첫울음, 첫걸음마, 첫 등교, 스무 살 생일, 대학교 첫 수업, 첫 입맞춤, 첫 직장, 첫 아이....... 태양이 뜰 것이다. 사람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오늘이 아니라도 당신의 마지막 날에는 죽음이 있을 것이다. 삶은 좋은 것인가? 당신은 모른다. 당신은 내일을 향해 몸을 던진다. 멜로드라마 같은 비극은 사실 자세히 보면 희극 아닌가. 인생은 서글프지만 희극이다. 당신은 마지막 문장을 향해 간다. 파티는 정말 끝났고 사람들은 떠나야 한다. 내가 당신에게 그것, 삶을 줄게! 그녀는 외쳤다. 그녀는 맨 마지막까지 기다리리라. 그녀는 마지막 문장을 쓰고 있고 당신은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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