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Part 2. 타인, 관계, 오랜 의문들
당신이 쌓은 벽과 내가 쌓은 벽 사이에 꽃 한 송이 피어나고
-시인과 촌장의 노래 「때」 중에서-
걸음을 멈추고 손목시계를 내려다본다. 네 시 정각이다. 오후 네 시, 소설의 제목이다. 벨기에 작가 노통브의 소설 「오후 네시」는 고등학교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치다 정년퇴직한 에밀, 소설의 화자가 아내와 함께 한눈에 마음에 드는 시골집을 구해 여생을 보내기로 하면서 시작된다. 평온할 것만 같았던 그곳의 생활은 어느 날 오후 네 시에 불숙 찾아온 한 방문자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한다.
매일 오후 네 시에 찾아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묻는 말에도 단답형으로 대답할 뿐이면서 고집스레 버티고 앉아있는 이 존재, 베르나르댕 씨의 무례함과 침묵 앞에 노인은 속수무책이다. 아끼던 제자가 찾아온 날에도 어김없이 찾아온 베르나르댕 때문에 제자의 존경을 잃게 되고 그녀가 다시는 찾아오지 않게 될 것임을 안 에밀은 다음날, 마침내 거친 태도로 베르나르댕을 밖으로 쫓아낸다. 그러나 며칠 후 새벽, 발전기의 소음에 깬 에밀은 차고에서 자살을 시도한 베르나르댕을 발견해 구하게 된다.
더러운 집안과 기형적으로 뚱뚱하고 근시인 데다 지능이 없는 아내와 단둘이 사는 그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 에밀은 베르나르댕에게 자살한다면 다시 방해하지 않겠다는 편지를 보내고 그를 방문해 자살을 격려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처음 보는 베르나르댕의 웃음이다. 결국 에밀은 어느 날 밤 베르나르댕의 침실로 몰래 들어가 그를 죽인다.
타인과 마주한다는 일이 고통이 되는 순간들이 있다. 타인과의 소통이 불통이 되는 때가 특히 그렇다. 도무지 말이 안 통하고 이해되지 않는 존재는 두려움마저 선사한다. 어쩌다 이렇게 되고 마는 걸까.
불통에는 개인 차이, 집단, 사회 제도적 문제가 작용한다. 이중 개인 차이는 개인의 경험과 조건, 지각, 태도, 행동들의 다양한 요소들이 있다. 타인과 불통이 되는 데에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에밀 역시 그렇다. 숨 막히게 하는 낯선 타인 앞에서 그는 분열된다.
일체라고 여기던 부인과 심리적으로 갈라지고 속수무책으로 만들던 예의와 교양을 벗어던지게 되며 충동적이고 다혈질적인 본능적인 자아가 갈라져 나온다. 그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던 그였기에 베르나르댕의 침입은 그가 몰랐던 자신의 실체를, 이중성을 드러나게 한다. 타인이 두려운 것은 나에게 물리적 위협을 줄 수 있다는 점뿐 아니라 나도 모르는 알고 싶지 않은 나를 알게 한다는 데도 있지 않을까.
타인과의 소통이란 어쩌면 불가능한 것 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한 채 자주 치우치는 다양한 인지 편향을 보면 더 그래 보인다. 기준점 편향, 편승효과, 맹점 오류, 선택 지원 편향 등등 많은 편향이 작용하지만 그중에서도 많이 알려진 것은 확증편향이다. 확증 편향은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신념, 가치관, 개념에 부합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듣는 인식의 경향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나의 주장을 옹호하는 의견은 편안하지만 반대되는 의견은 불편하고 불쾌하게 느끼기 마련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하지만 확증편향은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는 의견을 아예 배재함으로써 독단에 빠지도록 만들기 때문에 소통을 가로막는 요인이 된다는 점에서 문제다. 사람들이 타인의 생각에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 머릿속에 있는 것들과 들어맞는 부분만 보려고 한다면 우리는 타인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물론 타인에 대해 깊이 이해하지 않아도 세상은 돌아간다.
굳이 타인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까. 마트 캐셔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물건을 사지 못하지는 않는다. 선생님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수업내용을 이해 못하는 게 아니다. 아이를 이해 못한다고 아이가 크지 않는 것도 아니다. 부부는 좀 다르려나. 뭐, 서로를 끝내 이해하지 못하면 헤어지면 된다. 이혼으로 인한 부담이 크다면 그냥 살면 된다. 어떻게 해도 결국 사람이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느낀다면 누굴 만나든 결국 같지 않나. 문제는 타인에게 이해받기를 원하고 이해받을 수 있으리라 믿는 데서 오는지도 모른다.
「오후 네시」에서 에밀은 아내 줄리에트와 완벽한 일체를 이루고 있다고 느꼈지만 베르나르댕의 출현을 계기로 심리적으로 갈라지게 된다. 무구한 줄리에트는 베르나르댕을 자살시도에서 구하는 일이 당연한 도리고 그의 불구인 아내는 불쌍하고 죄 없는 존재로서 돌봐줘야 한다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는다. 그리고 남편 또한 그녀와 같다고 믿지만 에밀은 사람의 선함이나 도리를 따르는 일이 당연하지 않다고, 베르나르댕 이란 존재는 없어져야 할 불쾌함이라고 생각한다.
쥘리에트가 이런 에밀의 진짜 속내를 이해했다면 불행해졌을 테지만 그녀는 남편이 다른 생각을 하리라고는 의심치 않고 둘은 일심동체로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고 믿음으로서 전과 같이 행복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오히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평화를 줄 수도 있다. 물론 에밀이 자기 사고방식에 치우쳐 베르나르댕을 이해했노라고, 그를 비참함에서 구하기 위해 죽음을 선사하는 결말을 보면 이해한다고 믿는 것은 잔인하게 우스운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그냥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게 상책이려나.
사람들이 나를 지나쳐 앞으로 간다. 정장 입은 아저씨들이 뭉쳐서 걸어간다. 손을 꼭 붙잡은 남녀가 웃음을 터뜨린다. 중년의 아줌마가 십 대 소녀를 재촉한다. 동료, 친구, 연인, 가족끼리 서로의 눈에 비친 상대방은 왜곡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까. 왜곡되게 본다면 서로를 알지 못하는 것이고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게 되지 않을까. 이런데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이어나갈까. 거울 뉴런의 작동 덕분이 아닐까.
인간은 함께 있는 상대방을 따라 하기를 통해서 라포, 상호 신뢰를 형성한다. 자연스럽게 같은 동작을 따라 하는 것부터 상대의 말과 같은 요지의 말을 다른 표현으로 반복해 주는 것으로 인간은 호감과 더 나아가 통했다는 감각을 느낀다. 이런 행동으로부터 이심전심을 느끼는 순간에 사람들은 상대방을 분명히 알지 않아도 된다. 깊이 알지 못해도 통한다는 느낌을 주게 행동할 수 있다. 이 느낌을 공감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거울 뉴런으로 타인이 느끼는 감정을 파악한다고, 공감한다고 믿는 것은 행동이 앎을 이끈다는 말이 되나.
이해하지 않아도 공감할 수 있을까. 알지 못해도 느끼면 되는 걸까. 나도 같다고 느낀다. 나는 저 사람을 안다. 나도 똑같이 느끼니까. 정말 그런가? 오후의 나른한 빛 속에서 거리의 풍경은 프레임 수가 적은 화면 같다. 공기는 느리게 사람과 사물을 감싸고 흐른다.
부처가 설법 중에 꽃을 들어 보이자 제자 가섭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섭은 똑같은 동작으로 꽃을 들어 보이는 행동을 하지 않고도 그 뜻을 알고 홀연히 미소 지었다. 염화미소. 가섭은 가르침을 알아들었기에 웃었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진리.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나의, 타인의 마음. 마음? 그거면 될까? 나는 미소 짓는다. 더 알 수 없게 되었구나. 내가 미소 지을 때 미소로 답하는 사람은 나를 이해하는가. 그 미소의 이유는 내 미소와 같은가. 아침을 지난 지는 오래나 저녁이 되려면 아직이다. 오후 네 시, 사람들 사이로 걸어 들어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