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중세의 미래한다」 전시를 다녀와서
입장권을 사서 첫 번째 전시실로 가려는 계단참에서 나를 반겨주는 작품은 괴기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브라운관 TV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이어진 작업들은 연대순이나 작가별이 아닌 다소 뒤엉킨 듯한 인상의 전시 배치 속에서 각자의 개성을 뿜고 있었다. 작품들은 첫 번째 본 것처럼 잔잔하고 예쁜 느낌과는 거리가 먼 색채의 기괴함과 환상이 배어 있었다. 영상, 설치, 드로잉, 사운드 등 다양한 형태의 작업들로 스무 명의 작가들이 보여주려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니아라 오만이 소재를 달리하며 만든 얼굴들은 사이보그나 동물들과의 혼종을 떠올리게 하며 인류의 정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페터 베히틀러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목발」은 검은 전선이 인간의 형상처럼 움직이며 인생에 대한 부정적 내레이션을 자막으로 쏟아낸다. 또한 전시장 중앙에 위치한 이미래의 「연루된 자들」은 철 와이어와 실리콘 호스, 천과 점토가 오일에 젖은 채 기계장치로 조금씩 움직이는 모습을 통해 유기체나 기계의 연속적 움직임이 주는 묘한 감상을 상기시킨다. 이런 작품들에서 인간이라는 주제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다 두 번째 전시실에 들어가면서 더 선명해지는 것은 기술이 발전한 미래이다. 린 허쉬만 리슨의 「유전자 조작 동물, 작물,실험실」의 유전자 조작 생물의 사진으로 바른 벽과 발전된 기술의 신체 침입을 다룬 영상 「사이보그의 유혹」을 보면 더 확실해진다. 그렇다면 이 전시는 미래의 인간, 포스트 휴먼의 시대를 이야기하려는 걸까.
포스트 휴먼의 미래가 다가왔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작업들은 유토피아라기보다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그린다. 그러나 그 방식이 직접적인 미래나 발전된 기술을 통하지만은 않는다. 최윤의 「너와나의 서울 중세」는 중세 검술을 한강변에서 연습하는 사람들을 찍으며 현대에 등장한 디지털 게임의 가상의 세계 속 중세를 현재, 현실의 서울과 결합시킨다. 마그너스 월린의 「엑시트」는 애니메이션 속 불에 쫓기는 장애인들의 모습에 15세기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드로잉을 차용한다. 최고은의 「봄은 욕망의 정원」은 SM과 페티시, 감시장치와 워킹 기어들이 들어간 창문에 프린트한 작업이지만 전통적인 스테인드 글라스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쾌락의 정원과 신윤복의 「이부탐춘」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 이런 과거의 요소들을 통한 환기 방식은 단순히 미래의 인간에 대한 상상과 예측이 아닌 인간이란 현재와 과거 속에서 어떤 존재였는가를 묻는다. 이 질문은 미래의 인간이란 어떠할 것인가를 생각하는데 필요하다.
전시는 그로테스크함과 블랙유머의 어두운 톤에 어지러운 전시 배치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혼재성으로 과거와 현재를 통한 미래의 인간이라는 주제를 다뤄낸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보는 미래는 진보에 대한 낙관보다 진보의 과정이라 여겨진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아르타바즈드 펠레시안의 흑백 화면 속 패닉에 빠진 동물들의 모습을 연속해서 보여주는 작품 「거주자」들은 인간과 같은 지구의 거주자들인 동물들에게 인간의 존재가 공포의 근원이 되게 된 상황을 짚어내고 게르하르트 노드스트롬은 일련의 드로잉을 통해 환경오염과 전쟁, 불평등과 권력남용을 지적한다. 윌 베네딕트와 스테펜 요르겐센은 여섯 편으로 구성된 우화적인 영상물 「더 레스토랑」에서 초현실적인 이미지와 부조리한 전개를 통해 자연과 대치되는 거대한 마천루 안의 레스토랑에서 진행되는 음식 이야기를 풀어내며 먹는다는 것이 지닌 인류문명의 의미 층위를 드러낸다, 이 방식은 식문화에 담긴 상업성과 제국주의 환경파괴 같은 문제점을 비틀어 들어내게 된다.
전시를 보고 나면 이런 의문이 들게 된다. 인간은 진보하는 것일까. 진보는 어떤 형태를 띄어야 할까. 아니, 진보란 좋은 것일까. 진보함으로써 포스트 휴먼, 인간 너머의 인간이 아닌 상태에 이르게 되면 인간성의 가치는 어떻게 될까. 어쩌면 인간성이라는 개념에 실제로 함유되어있는 요소로 자연에 대한 지배 의식과 폭력욕 같은 부정적인 것들이 포함되어있는지도 모른다. 근대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거대담론에 집중하며 이분법적 질서를 공고히 하는 세계관 안에서 인간이란 자연의 일부이고 꼭 이성적이지 만은 않은 동물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며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측면의 인간성에 집중해왔었으니까 말이다. 이때의 인간성이란 융통성 있는 불완전한 면모의 인간미 있다 라는 것과는 다른 개념일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에는 인간성이 재정의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의 정의가 어떻게 변하게 되느냐에 따라서. 문제는 그 변화의 방향이 디스토피아적으로 흐르게 될 때이지 않을까. 인류가 만든 지금까지의 문제점을 그대로 가지고 오히려 심화시키며 살아간다면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이다. 단순히 발전한 과학 기술로 신체를 업그레이드시키는 수준의 진보, 진화가 아닌 인간소외와 거대한 폭력, 환경파괴를 초래한 지금까지의 편협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찾고 구하는 자세가 인류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벌써 생각보다 전부터 유전자 조작 콩이나 인공심장과 같은 발명들이 있어왔던 데서 볼 수 있듯이 어찌 되었든 변화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신체를 유전자 단위에서 변형하고 기계로 대체하며 감각을 네트워크를 통해 확장 연결해 낼 수 있게 됨으로써 인간의 형태를 변형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필요한 자세는 무관심도 무작정 낙관하기도 아닌 돌아보고 고민하는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