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dion Feb 10. 2020

내일 내 삶이 끝난다면 누가 찾아와 줄까

죽음과 삶 사이의 고독

스틸라이프, 2013, 우베르토 파솔리니


고독사 한 사람들의 장례를 치러주는 공무원 존 메이. 자신이 장래를 치러준 사람들 만큼이나 고독하게 살아온 그는 성심껏 자신의 일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부서 간 통폐합으로 인해 해고를 앞두게 된다. 그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맡은 고독사 사망자 빌리 스토크의 연고자를 직접 찾아다니며 교도소를 드나드는 알코올 중독자에 부랑아였지만 풍부한 인생사를 지닌 그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고립된 채 틀에 박혀 살던 그의 삶에 작은 변화를 맞지만 곧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그의 장례식에는 아무도 오지 않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시각 같은 묘지에 묻히는 빌리 스토크의 장례식에는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여러 지인들이 참석한다. 스토크의 장례식이 끝난 뒤 존의 무덤가에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의 손으로 생의 마지막 길을 인도받은 영혼들이다.  



인간은 혼자다. 죽음 앞에 한 인간의 의미와 존엄은 무의미해지는 것 같다. 그리해서 죽음 앞에 인간은 더 철저히 고독해진다. 그러나 존 메이는 그게 다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시에서 비용 절감을 종용해도 장례식의 형식을 고집한다. 죽은 이들 역시 인간적으로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완전히 혼자인 사람이어서였을까. 그는 인간은 결국 혼자이며 죽음 앞에서 삶의 의미는 사라져 버린다는 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빌리 스토크의 장례식을 통해 증명하고 싶어 한다. 그의 시도는 성공했지만 그의 삶의 변화에 대한 희망은 죽음으로 사라지는 아이러니를 통해 영화는 뭘 말하고자 하는 걸까? 존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까?



빌리 스토크처럼 친구, 동료, 연인, 가족, 사람들을 만나도 마지막이 쓸쓸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존 메이처럼 고독 속에서 용기를 내 변화하려고 해도 이미 늦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에서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일도 죽은 이의 삶의 역사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기억하는 일도 그 시도 자체가 의미 없지는 않다. 결국 존 메이의 노력으로 잊히고 외면받으며 효율성에 따라 처리될 빌리 스토크의 죽음은 그의 인생 속 사람들에게 의미 있게 기억되지 않았나. 존 메이의 죽음 역시 삶을 향한 모든 노력이 소용없다는 의미보다는 언제 끝이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더 지체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용기를 내야 한다는 메시지로 읽힐 수 있다. 삶과 죽음 사이의 고독에는 휴머니즘이 필요하지 않을까.    


내일 내 삶이 끝난다면 누가 나의 장례식에 와줄 것인가. 나의 죽음은 얼마나 인간적일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질 때 나는 멀리 있는 것만 같은 죽음을 통해 바로 여기,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지금 여기에 충실해져야 한다면 아마도 사람과의 관계에 집중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겠다. 존 메이와 같은 쓸쓸한 장례식을 피하기 위해서도. 하지만 설령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장례식으로 끝맺는다 해도 바로 이 순간에 자신의 삶을 충만하게, 굳이 성공하지 않더라도 사람 냄새를 잃지 않고 살아낸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지 않을까? 외로움과 고독은 다르다. 외로움이 단순히 감정이라면 고독은 인간인 우리가 개별 된  자아로서 세상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근원적인 것이다. 결국 고독도 죽음도 박멸하거나 표백해야 할 것이 아닌 삶의 일부임을 새삼 깨닫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인간성에 대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