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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dion Feb 14. 2020

권력과 예술, 전쟁과 루브르

소쿠로프의 박물관 산책 초대


프랑코포니아, 2015, 알렌산드르 소쿠로프



소쿠로프의 전작,「​러시아의 방주」를 보고 다시 보게 된 이 작품은 처음 봤을 때 보다 분명히 보였다. 국립박물관이란 한 국가의 예술과 역사를 담고 있는 공간이다. 그런 의미 때문에 전작에서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러시아의 방주로 표현했었다. 박물관을 다룬 두 작품, 러시아의 방주와 프랑코 포니아는 역사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시간이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그런 시간을 다루는 이 영화의 방식은 독특하다​영화는 현재, 2015년 시점에서 이 영화의 재현 장면 촬영을 끝내고 자택에서 자료를 뒤적이고 있는 감독이 자신이 찍은 재현 장면의 배경인 나치 점령기의 루브르로 들어가는 구성이다. 이 방식은 시간, 공간, 가상, 현실을 뒤섞으며 전쟁에서의 예술품의 운명을 통해 예술과 권력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현재라는 게 드러나는 배경에서 슬레이트를 치는 모습을 보여주며 과거를 재현하거나 과거의 망령들이 옛시대의 옷을 입고 박물관을 활보하고 현재에 있는 화자, 감독이 과거의 인물에게 말을 걸고 직접 공간을 거닐기도 하며 시간과 공간, 가상과 현실이 혼재된 채 헤매지만 감독의 목소리가 ​이야기를 관통하며 주제의식을 이끌어 나간다. 이 모든 것은 사실 책상 앞에 앉은 그의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영상일 수도 있다. 이런 방식으로 이 영화는 자료화면과 내레이션, 재현극이라는 다큐멘터리의 요소에도 불구하고 극영화의 허구의 감각을 유지하고 단순한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나열이 아닌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 알레고리가 된다.  



그런 상징성은 감독이 현재 시점에서 화상통화로 대화하는 미술품을 실은 배에서 두드러진다. 전작에서 박물관이 방주로 묘사되었던 사실을 떠올리면 이 배가 박물관과 연관성을 지니고 있음이 더욱 분명해진다. 역사라는 바다 위 거대한 권력, 혹은 전쟁이라는 파도 앞에서 한 척의 배에 실린 예술품들은 침몰할 운명에 직면한다. 이것은 2차 세계대전 중 루브르가 처한 운명 하나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화자가 동부전선에서 나치와 직면한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루브르와 대조적인 운명을 얘기를 하는 것과 영화 도입부에 자신의 모국인 근대 러시아 예술의 핵심인물인 톨스토이와 체홉을 부른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였다. 그래서 영화는 2차 세계대전기뿐만 아니라 루브르의 역사, 예술품 약탈의 역사를 조명한다. 더 넓은 의미로서 역사와 예술품과 권력의 관계를 다루고자 한 것이다.



프랑스어 사용자 혹은 프랑스 문화권 국가의 지역과 집합을 아우르는 단어인 '프랑코포니아' 라고 제목을 짓고 프랑스 문화의 심장부인 루브르를 소재로 삼아 그 문화적 영향력을 인정하고는 있으나 감독의 시선은 편향된 낭만이 담겨있지 않다. 그는 프랑스인이 아닌 러시아 사람이고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루브르를 통해 고찰하고픈 더 큰 주제였기 때문이다. 권력과 문화와의 관계에서 보자면 프랑스 문화 역시 권력을 지닌 문화로서 영향력을 행사해 왔고 루브르를 전리품들로 채워준 나폴레옹에서 볼 수 있듯 권력과 붙어 세를 불려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임을 보면 그렇다. 그런 프랑스의 루브르가 전쟁으로 인한 권력이동으로 위기에 처하지만 역시 메테르니히 백작이라는 독일 장교 개인의 권력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예부터 예술과 권력 친밀한 사이였다. 전통적으로 권력자들은 예술가들을 후원해왔다. 권력의 주체가 신에서 절대군주로 다시 부르주아로 이동해오는 동안 예술의 주체도 따라 변화했다. 그런  가운데 예술은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서 쟁취의 대상이 되었다. 나폴레옹처럼 정복전쟁의 전리품으로 얻어내는  것에서 경매의 낙찰 경쟁을 뚫고 몇백억에 사는 방식으로 변화했을 뿐 그 점은 변하지 않았다.


후대에 접어들며 예술은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국민의 정신 고양뿐 아니라 문화적 지배권의 확대를 통한 문화 식민을 위한 역할을 예술에게 주었다. 지금은 그 중심이 미국 뉴욕으로 이동했지만 2차 세계대전 전 까지만 해도 세계의 문화 수도가 프랑스 파리였다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프랑스 많은  식민지를 지닌 대표적 열강이었 유럽 열강의 패권 전쟁 이후 미국으로 넘어갔다는 사실과도 연결된다. 이  영화의 러시아인 감독이 굳이 프랑스의 루브르를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어쨌든 소쿠로프의 박물관 이야기 두 편은 꽤나 매력적이다. 그 의미에 대한 고찰도 중요하겠지만 그 연출 방식이 지닌 묘한 매력 역시 주목할만하다. 1인칭 시점 같은 카메라로 공간 속에 뒤섞인 과거와 현재를 따라 걷는 구성은 마치 관객이 표류하는 박물관 속 망령과 산책하는 듯한​ 몽환적인 감각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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