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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dion Feb 19. 2020

4년 전의 <난ㆍ쏘ㆍ공> 읽기

4년전의 글을 발견했다.

허물어진 안과 밖의 경계, 뫼비우스의 띠 위를 도는 시간

 

30년전 소설과 2016년 사이의 경계


30년아 지난 오늘날 까지 학생들의 필독 목록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 연작 소설집의 시작과 끝은 수학 수업 중인 교실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소설은 이 외화가 난장이 가족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이 등장하는 단편들을 둘러싼 구조다. 독특하게도 이 구성은 동화, 우화와 같은 톤을 취한다. 그리고 그 사이, 내화에 불쑥 사실적인 서식들이 끼어든다. 철거계고장, 입주권, 설문조사 통계, 노사 협의회의 속기록 등이. 거기에 난장이 가족과 연결된 다른 인물들도 난장이 가족을 통해 목소리가 겹쳐지면서 현실과 이야기, 가진자와 못 가진 자의 경계가 무너진다.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이것이 그저 허구라 하기에 동화적 은유와 사실적 배경의 강렬한 대비가 머리 속을 뚫고 들어온다.


이 소설은 그저 지나간 시절에 대한 기록인 걸까.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데 30년도 더 넘었으면 세번은 바뀌고 남을 시간이다. 2016년에 들어선 대한민국은 달동네 판자촌은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지자체 마다 사회복지과가 있어 기초수급생활자를 선정해 보조금을 지급하고 저소득층과 장애인을 돌본다. 일이 단순하고 고된 제조업 공장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으며 산업의 구조 자체가 바뀌어 이른바 창조경제의 시대가 되었다. 우리나라는 20년 전 OECD 정식 가입국으로 선진국 대열에 끼게 된지 생각보다 오래다. 그리고 그 OECD 순위 안에서 많은 부분에서 상위권을 차지 하기까지 했다. 자살률 12년 연속 1위, 산업재해율, 가계부채 증가율. 남녀 간 임금 격차율, 노인 빈곤율 등에서


분명 시대는 변화했다. 하지만 이 개운치 않은 감각은 뭘까. 분배의 불평등과 약자에 대한 폭력은 오히려 더 교묘해져서 사그라들지 않고 있고 우리의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진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 마저 든다. 수십년 전의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재개발을 위해 상가 세입자들을 권리금도 없이 쫓아내어 경찰과 옥상에서 대치하다 사망한다. 부당해고에 농성으로 저항하던 자동차 노조원들이 폭력으로 진압 당한다. 근래의 모습은 이상하게 소설과 나란히 둬도 이질적이지 않다.


물론 어느 사회나 빈부차가 있고 사회문제가 있지 않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요즘은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가 투명해졌고 사람들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는다고. 분명 그렇기는 하다. 이런 저런 사회의 부조리한 사건들이 터질 떄마다 사람들은 SNS로 생각을 모으고 거리에도 사람들이 모였다.


문제는 의식구조 속으로 파고든 '갑질'과'흙수저' 등의 사회구조적 부조리를 답은 단어의 확산이 문제의식을 수면에 올림과 동시에 그것을 심상하고, 그래서 그러려니 여기도록 도와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당장 보이는 외압없이, 조금씩, 감정으로 소비되어 소진될 수 있도록. 모두가 노란 리본을 달고 펑펑 울었으나 다 울고 나자 일상으로 봉합되어 버리듯이. 이 시대는 사람들의 내면과 외부의 사회 현실 사이의 어떤 경계, 순진하다고 할 수 있는 단순한 내면의 기준을 무너뜨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무서운 것은 이른바 사회지도층으로 불리는 소득 상위 1%의 의식구조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는 듯 싶은 것이다. 노동운동에 들어가 난장이의 아들 영수가 말하는 "나는 회사의 높은 사람들이 우리모두가 한 배에 타고 있다는 것을 꺠달아주기를 바랐다. 그들은 안그랬다."라는 대목에서 처럼 말이다. 아예 더 나아가 정부각료가 국민을 향해 개, 돼지라고 발언하며 생물 종 자체가 다르다는 사고를 보여주는 게 오늘날의 일이지 않는가.

소설 속 은강 그룹 회장의 막내아들인<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속 화자 경훈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런 부당함을 당연한 것이라고 역설한다. 적자생존을 앞세운 그의 당연하다는 논리는 그 자신에게도 적용되고 있었다. 형들의 틈바구니에서 아버지의 인정을 받아 자기 몫을 챙기기 위해 맹목적으로 아버지를 따르려하고 여성을 대상화 하여 남성성을 증명하려 한다. 그러나 난장이의 아들 영수가 그의 숙부를 죽인 사건의 재판장에서 은강방직 노동자들을 본 그는 자기 세뇌로 쌓은 사고 밑의 균열을 감지한다.


그는 사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모르는게 아니다. 자기세뇌의 부작용으로 "내 사고와 체질, 습성이 점점 국적불명이 되어간다고......." 라는 사촌의 말을 그도 수긍한다. 그러나 그는 "네일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보자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약하다는 걸 알면 제일 먼저 나를 제쳐 놓을 것이다. 사랑으로 얻는 것은 하나도 없다."며 끝가지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다.


또다른 등장인물인 지섭이라는 인물은 어떤가. 독립운동을 하다 가진 것을 모두 잃은 할아버지를 둔 그는 명문대 법대에서 퇴학 당한다, 책에서는 직접 언급되지 않지만 할아버지와 같은 저항정신을 발휘한 운동권 학생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이 과외하는 학생인 윤호에게 난장이 가족의 생활을 보여준다. 그리고 난장이 가족의 집이 강제로 철거당하는 중에 용역 폭력배에게 구타당한 후 입주과외를 하던 집에서 나와 전국의 공장을 돌며 노동운동을 한다. 어찌보면 오늘날 지섭 또래 청년들의 아버지 세대의 한 시대적 전형과도 닮아있다.


그는 난장이를 우주인이라고 부르며 난장이에게 <일만년 후의 세계>라는 책을 빌려주고 지상과 다른 아름다운 별세계인 달의 천문대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 두 사람은 지상의 부조리함과 고달픔이 없는 이상세께를 꿈꿨던 것이다. 그 이상세께를 그리는 동화적 표현은 서글픈 대비를 주며 현실의 변화에 대한 체념의 정서가 묻어있다. 결국 난장이는 자살하고 지섭은 공장을 전전한다.


클라인 병 속의 N포 세대


위에서 언급한 인물들은 모두 대학에 다니고 있거나 다닌 20대 청년들이다. 구조의 상층부에서 물질적 해택을 

누리거나 상위 구조에 낄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청년들이었다. 그러나 한 인물은 누리는 것을 잃지 않기 위해 눈을 감고 또 한나는 이뤄지지 않을 줄 알면서도 사회 부조리를 바로잡으려고 저항한다.


그럼 대학 진학율 70%에 달하는 2016년의 20대 청년들은 어떨까. 99%의 자식들인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금수저인 경훈은 공감하기 힘들고 오래된 유행인 운동권 지섭도 비교하기 멀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한 사람을 더 대려와 보자. 가난한 탓에 대학에 가지는 못했지만 그들과 비슷한 또래인 난장이의 아들을.


영수는 먹을 것도 장난감도 넣어줄 수없어 주머니가 없는 옷만 입히는 난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인물이다. 살던 달동네에서 쫓겨나 아버지가 자살하고 두 동생과 어머니와 함께 공업도시 은강으로 밀려난다. 그곳 공장에서 일하며 법에서 정한 것보다 긴 시간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으며 일하고 일한 만큼 받지 못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그는 노동자 교회에 다니며 공부하고 사람들을 모아서 정당한 몫을 받으려 행동하는 사람이된다. 가족과 노동운동 사이 갈등하던 그는 과학자가 보여준 클라인 병의의미를 " 이 병에서는 안이 밖이고 밖이 곧 안입니다.안팎이 없기 때문에 내부를 막았다고 할 수 없고, 여기서는 갇힌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벽만 따라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죠. 따라서 이 세계에서 갇혔다는 그 자체가 착각이에요."라고 말하고 희망에 차 달려나간다.

그는 아버지나 지섭처럼 달나라 천문대에 가길 꿈꾼 것이 아니었다. 그저 여기, 현실에서 공정한 방법으로 정당한 몫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어찌보면 단순하고 소박한 믿음을 가진 것이다. 이런 그의 생각을 오늘날의 20대 

청년들이 들으면 순진하다고 말할 것이다.


취업난, 불안정한 일자리,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 물가 상승에 따른 생활비용 지출의 증가 등의 사회,경제적 압박으로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고 뒤이어 집, 인간관계도 포기하고는 무엇을 더 포기할지 몰라 N포 세대로 불리는 2016년의 청년들이라면 말이다.


그런 청년들에게 사회는 개인이 스펙만 잘 쌓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며 모든 부담을 지운다. 거기다 넘쳐흐르는 정보는 스타일리쉬한 것, 맛있는 것, 좋은 것, 소비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보여준다. 인터넷 속 가상의 연결들 조차 부조리의 인식마저 소비와 적자생존의 논리를 내재화함으로써 내면과 외부의 경계가 실시간으로 허물어지도록한다,이런 가운데 정말 벽만 따라 나가면 나갈 수 있는 것 일까. 


오래된 허구의 이야기와 오늘날 우리 이야기가 만나는 지점


이야기의 시작에서 수학교사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차차 알게 되겠지만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 없이 간사한 역할을 맡을 때가 많다. 제군은 이제 대학에 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군은 결코 제군의 지식을 제군이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제군을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 사물을 옳게 이해하는 사람으로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이제 나의 노력이 어떠했나 자신을 테스트 해볼 기회가 온 것 같다. 다른 인사말은 서로 생략하기로 하자."


그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전하려고 했을까. 소설 속 이야기는 꼬이고 돌아 다시 수학시간의 교실로 돌아온다. 시험을 치른 학생들의 수학 점수는 안타깝게도 경쟁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 하지 못했다, 교사는 낮은 점수에 대해 제도와 다른 환경의 문제가 있음에도 자신 혼자 책임지게 되었노라 말한다.


그는 모두에게 공감을 주는 이야기를 하고팠던 자시느이 노력의 결과에 좌절하며 우주여행을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달나라로 떠나려 벽돌공장 굴뚝에서 떨어진 난장이 처럼, 그는 교실을 떠난다.

좌절한 교사는 떠나지만 학생들은 남았다. 소설을 읽은 독자들도 그 자리에 남게 된다. 거기서 부터 30년이 넘게 흘러도 변하지 않은 것, 오히려 내면의 경계마저 허물어 들어오는 무언가에 대해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한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것은 우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교내 독후감 대회를 위해 이 글을 썼던 때로 부터 벌써 4년이 흘렀다는 사실에 새삼 시간의 힘을 느낍니다. 지금보다도 미숙했던 시절의 기억을 되새겨 봅니다. 지난 시간 세상도 변화했습니다. 변화가 전부 긍정적일 수는 없지만 긍정적인 일들도 있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시간은 나날이 고단함을 쌓이게 하지만 견디는 일을 포기 하지 않는 한 의미를 잃지 않을 거라고도 믿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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