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니 이 영화를 연출 한 사람은 유명한 감독이었다, 마지막 황제와 몽상가들의 감독이 이 사람이었다. 빠르고 현란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 두 작품처럼 이 영화는 지루하다. 배경음악이 심심하고 긴장감보다 장황함과 분열 감이 느껴졌다. 주인공이 자신의 스승을 암살하러 왔다는 설정이 무색하게. 아마 내가 할리우드식 첩보영화에 익숙해서 인가 보다. 긴장감 있는 전개보다 무대 디자인이나 그림처럼 인상적인 미장센의 미적인 감각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주인공은 '정상인'의 삶에 집착한다. 정신병원에 있는 아버지와 운전기사와 바람난 어머니, 어린 시절의 동성애 경험과 살인, 그런 요소들은 그의 삶의 정상성을 위협하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별로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부잣집 딸과 결혼하고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자 파시스트가 되려한다. 그는 자청해서 반 파시스트 진영의 중요인물인 옛 은사를 회유하는 작전에 들어간다.
영화의 첫 장면은 은사를 회유하는데 실패하면 암살하려는 비밀작전을 위장하기 위한 신혼여행으로 도착한 파리의 호텔이다. 눈 오는 날 접선책과 차를 타고 호텔을 나서는 그의 회상이 이어진다. 그는 결혼식을 위해 34년 만에 찾은 고해소에서 자신의 잘못을 말하는 순간에도 뉘우침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제게 중요한 건 사회가 용서하는가입니다."라고 답한다. 그의 '정상적인 삶'에 대한 강박은 개인적 도덕성에 기반을 둔 게 아니라 는 사실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는 오랜만에 만난 스승을 통해 자신의 논문 주제인 '플라톤의 동굴'을 떠올린다. 현실이라 생각하는 세상의 허위와 동굴에 묶인 다수, 죄수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거기에 스승의 부인에게 연정을 느끼며 그의 마음에는 갈등이 인다. 하지만 결국 눈 덮인 숲 속에서 그는 교수와 그 부인이 죽는 모습을 그냥 지켜본다. 끝까지 총도 들지 않고 차 안에 앉아만 있는 그를 본 수행원은 차 밖으로 나와 "저런 호모에 겁쟁이 새끼들은 내 맘대로 할 수 있으면 전부 총살이었다"며 질색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가 빌붙었던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무너지는 날,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를 만나 걷던 중 자신이 죽인 줄 알았던 남색가가 멀쩡히 살아 걸인 소년에게 추근거리는 광경을 목격한다. 그가 고해 중에도 숨겨왔던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순간 그는 교수를 죽인 자신의 죄를 그 남자에게 뒤집어 씌우며 큰소리로 비난하고 그의 맹인 친구마저 파시스트라고 몰아붙이고는 해방감에 가득 찬 인파를 지나치며 우왕좌왕한다. 교수를 죽였던 파리에서 무도장의 춤추는 사람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둘러싸인 그날처럼.
정상을 꿈꿀 때 맹인 친구의 짝짝이로 신은 구두를 혐오의 눈으로 봤지만 도망치지는 않았던 그의 남은 인간성마저 스스로 버리고 도덕적 죄책감마저 웃기는 해프닝으로 증발해 버렸다. 자신을 사랑하는 아내와 귀여운 아이를 얻었지만 그의 삶은 '정상'일 수 있을까. 정상인이 되기 위한 순응의 방식은 실패해 씁쓸한 뒷맛을 남기며 남창의 방 입구에 걸터 않은 그의 뒤로 낡은 레코드 판이 돌아간다.
플라톤의 동굴에 묶인 죄수처럼 모두가 그림자를 볼뿐인지도 모른다. 진실에 다가간다는 일은 정상적이 된다는 것과 같지 않다. 정상 이란 기준은 사회가 정하지만 그림자만을 보고 믿는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사회는 진실이나 이상으로 정상성의 기준을 정하지 않는다. 애초에 이론적 명명을 떠나 개별의 환경과 작은 선택들의 단위로 내려왔을 때 그 정상이라는 기준에 실제로 완벽하게 부합하는 사람이 있을 수는 없다. 정상의 기준으로부터의 이탈을 두려워하며 사회의 부조리와 악에 까지 순응하기보다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로 동굴에 비친 그림자 너머를 생각하는 사람이야 말로 스스로의 중심을, 자아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