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dion Jul 05. 2020

가을의 예감

여름, 문득 두려운 순간으로부터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출렁이는 억새들, 널리 트인 바람과 풀과 흙의 푹신한 감촉, 답답하지 않은 편안함의 감각, 고요한 곳에 혼자 앉아 읽거나 생각하고 걸을  있는 여유공간, 삭막하리 만치 흙을 덮어놓지 않은 도심과 지평선을 까마득히 메운 고층 건물들에 둘러 싸여 정해진 일정을 수행해야 하는 소시민에게 그래서 휴가와 휴일이 더욱 소중해지나보다. 당신은 길을 걷는다. 밖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소음과 빛과 시선의 교차를 지나서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는 중이다. 때는 11 초엽이라  쌀쌀함에 서서히 날이 서기 시작한다. 해가   아침, 해가 저물어가는 저녁나절보다 조금  기온이 오른 오후, 단단히 여미었던 얇은 패딩의 앞섶을 조금 열고 발길을 재촉하여 인파를 빠져나온다. 가로수 밑동에 쌓인 낙엽이 경계를 넘어 보도 이쪽저쪽에 나부끼바람이 앞머리를 시원히 쓸어 올려준다. 벌거숭이 나무 옆을 지나는 행인들은 각자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당신도 모르지만 그들도 당신이 가는 행선지를 알지 못한다. 외로운 계절이다.


외로움은 사람을 취약하게 만든다. 사람이 심리적으로 유약해졌을 때를 노리는 것들은 많다. 정신병, 자살, 사기 같은 나쁜 일들이 생길 가능성도 높아진다. 특히 사기꾼들은 심리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을 기가 막히게  골라내어 이용한다. 겉으로는 건강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마음에서 가장 약한 부분, 콤플렉스와 충족되지 못한  쌓인 욕망 같은 부분을 건드린다. 누구나 표적이   있다. 나는 쉽게 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위험하다. 누구나 취약한 부분이 있다. 당신은 새삼 경계하며 살아야지 싶었다.


이제 당신은 카페에 있다. 때는 유월 중순, 아직 본격적인 더위는 시작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바깥에 오래 돌아다닐 날씨는 아니다. 오후   반인 지금 당신은 카페에 있다. 여름은 피서지의 흥겨움과 짙은 녹음과 화려한 꽃잎처럼 진한 생동감을 던지며 당신을  몰아붙인다. 지난 가을의 다짐을 잊은 듯 당신은 한 무리의 친구들과 신나게 수다를 떤다.


문득 고개를 돌리니 카페의 전면창 앞에  쌍의 남녀가 보인다. 돌아서서 가려는 여자의 뒤에서 그녀의 팔에 매달린 남자다. 카페   건너에서 일어나는  사람의 실랑이는  편의 무언극처럼 소리 없이도 생생하다. 마침내 여자는 떠나고 남자는 홀로 남겨진다.  늘어진 어깨, 쭈그리고 앉은 자세. 남자를 지나쳐 무심한 행인들이 스친다. 그때 당신의 친구가 당신을 부른다. 무얼 보고 있느냐는 말에 당신은 새삼 길바닥에 쭈그린 남자의 부끄러움을 대신 느끼며 얼버무린다. 대화는 그들 모두가 알지만  자리에 없는 친구의 이야기다.  친구의 눈치 없음과 잘난척과 이기심에 대한 암시가 내려진다. 당신은 당혹해서 친구들의 얼굴을 살핀다. 여상한 표정에는 딱히 불편해하지도 재미있어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런 얼굴로 그들은 차례로 동의를 표한다. 당신의 차례가 돌아온다.


당신은 화장실이 가고 싶다고 말한다. 어색하지 않도록 최대한 태연하게,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자리에서 일어선다. 카페의 옆문으로 가는 도중 당신은 고개를 들어 창밖에서 조금 전에 보았던 남자를 찾는다.  사이 들어온 트럭이 남자가 있던 자리 앞에  있다. 방금  것은 환영이었을까? 당신은 고개를 돌린다. 당신의 친구들이 웃으며 이야기 중이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다른 테이블의 소음과 뒤섞여 분명하지 않다.


당신은 길을 걷고 있다. 창밖은 여름이다. 그러나 당신의 머릿속에서 노란 억새가 출렁이고 쌀쌀한 바람이 분다. 해가   아침, 당신은 갈색으로 물든 외길을 걸어간다.

맞은편에도 뒤에도 인적이 없고 차가운 바람 냄새 속에서 고립된다. 여름에는 가을의 예감을 피해   없는 걸까. 당신은 다시 지난가을의 끄트머리에  다짐을 떠올린다.

작가의 이전글 한밤중의 작별 인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