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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dion Mar 13. 2020

한밤중의 작별 인사

이 하나의 장면



시간은 12시 20분이다. 아마 너는 자고 있을 것이다. 이 밤, 나는 도주를 희망한다. 생으로부터 도주, 아니 탈출하는 것을 말이다. 그런 순간이 온다. 문득 모든 사람이 믿을 수 없게 느껴지고 나 자신도 믿을 수가 없어 세상이 두렵기만 한 순간을 맞이한다. 의심은 믿음의 독이다. 우리는 믿음 없이 살 수 없지만 의심 없이 살기도 어려운 동물이다. 그런 문제점에도 삶을 지속해야 하기에 믿음과 의심 사이를 오가며 불안에 몸을 담글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 불안은 몸이 오래전 동굴에 살던 조상들의 맹수로부터 도망치도록 설계된 호르몬의 작용을 융통성 없이 그대로 따르며 현대 도시인인 나의 일상을 좀 먹는다. 어쩌면 나의 탈주 욕구는 삶보다는 불안을  피하고픈  마음일지도 모른다. 믿음에 좀 더 단단히 발을 붙일 수 있다면 도망치지 않아도 될까?


믿음.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할까. 신을? 이성을? 과학을? 예술을? 혹자는 사랑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래, 사랑이라. 누구의 사랑을? 신, 어머니, 연인 같은 것을? 그 누구의 사랑도 무조건적이지 않다. 구약의 신은 적지 않은 인물과 도시, 종족에게 벌을 내렸다. 모든 어머니들이 자식을 사랑한다면 친자식을 학대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뉴스는 왜 끊이지 않고 나올까? 자식의 인생을 끝까지 도우려는 어머니가 분별을 잃음으로써 오히려 해악을 끼치는 경우는 어떤가. 연인은 더 얘기하지 않겠다. 자기애와 헌신 사이의 간극이 늘 연인들을 힘들게 한다는 점만 얘기하겠다. 의심을 줄이려면 믿음의 대상이 절대적이어야 할까?


나는 자주 죽는 것을 생각한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생각은 문득문득 머리 한편을 나눈다. 그냥 이 생각만으로 삶에 대해 선택지가 늘어나는 아니, 생기는 착각이 위안을 주기 때문 일 수도 있겠다. 나는 사랑을 믿기보다  통제된 죽음이 평온을 주리라는 것을 더 믿었던 것이다. 죽음이 불안과 고통을 멎게 해 주리라는 보장이 있나? 글쎄 죽음은 모든 산자에게 미지의 영역이다. 나에게는 다른 믿음이 필요하다. 절대적이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미지의 영역으로 도피하지 않고 살 이유가 될 수 있다면.


그러나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지 회의가 끊이지 않고 든다. 설령 절대적인 것, 진리 같은 게 있다 한들 그에 대한 믿음이 삶의 세부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나는 모른다. 삶이 밀물이라면  썰물도 있겠지만 안전거리를 확보하지  못하면 휩쓸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가능한 삶으로부터 멀어져야 할까? 아마 너는 사랑을 이야기하며 나를 붙잡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네가 잠들기를 기다려 쓴다. 어쩌면 사실은 네가 붙잡아 주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곧 떠난다. 혼란을 잠재울 수 없어 잠들 수 없는 이 밤에.

2013.12.31

여전히 너를 사랑하는 재구가


탁자 위에는  뒷면을 빼곡히 메운 종이  장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하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재구가 사라진  안에서 하민은 흐린 시야로 하염없이  재구가 남긴 글을 보며 앉아만 있었다. 벽시계의 분침이  바퀴 넘게 돌고 나서야 그녀는 겨우 고개를 들어 현관 쪽을 보았다. 나가서 재구를 찾아보아야 했다. 새벽 어스름은 어느새 걷히고 창문으로 햇살이 밀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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