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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dion Feb 05. 2021

단편소설 습작 01

눈 발자국 -下

https://brunch.co.kr/@sadion/55


꼭 위 링크의 상편 먼저 보세요.





눈이 펑펑 내리던 그날 밤에 자려고 누웠을 때, 나는 갑자기 밀려드는 이미지들의 홍수 속에 잠겼다. 드디어 논문이 끝나고 마침 주말이었고  오랜만에 밤에 잘 자지  못하다 한낮에 묵은 잠을 푹 자버린 터라 정신이 너무 말똥말똥했다. 그제야 네가 이야기한 계획, 내가 그 자리에서 동의해버린 그 계획이 떠올랐다. 실질적인 복잡한 수속보다도 앞으로 우리 앞에 펼쳐질 나날들이 심상이 되어 끊임없이 이어졌다. 어느새 상상은 우리가 황혼에 접어들어 우리의 전원주택에서 방학 때 내려온 우리 손주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데까지 가있었다.  그 생각들은 휘발성이 강한 덕에 더욱 동실 거리며 잘 떠올랐다.

그렇게 한없는 백일몽에 젖어있다 보니 어느새 온몸 가득 몽상의 기체가 가득 차 자칫하면 눈 깜작할 사이에 둥둥 떠올라 천장에 부딪혀버리고 말 것만 같았다.  나는 당장 일어나서 걷기로 마음먹었다.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무작정  집을 나와 걷다 보니 어느새인가 나는 너와 처음 단 둘이 걸었던  바로 그 공원 초입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늦은 새벽에 여자 혼자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 따위는 저만치 날아가버린 지 오래였다.  걷는 박자에 맞춰 마음속으로 소리 없이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나는 개선장군처럼 나아갔다.  입구로부터 오분 정도 들어갈 때쯤 나는 멈춰 섰다. 저만치서 분명하지 않지만 뭔가 낯익은 형체를 발견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가로등 빛에 윤곽이 하얀 테두리처럼 빛나는 그 형상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하나가 아니었다.  두 개의 인영이 대치하듯 마주서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팔을 휘저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젖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무언극 속에서 산맥에 양끝 봉우리에서 서로를 부르는 모습 같기도 했다. 나는 이 몽롱한 광경에 앞으로 나아갈 생각도 못하고 그저 손바닥으로 눈을 덮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애초에 바보같이 네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어."
눈을 가리자마자 갑자기 음소거 버튼이 꺼진 것쳐럼 음성이 들려왔다.
"누가 그러라고 했어 네가 선택한 거잖아. 넌 맨날 남의 탓만 하지. 이젠 정말 지긋지긋해."
나는 갑자기 몸이 굳은 것처럼 멈춰서 이 뜬금었는 대사들에 사로잡혔다.
"누가 할 소리. 그 긴 세월 동안 네가 아니었으면 격지 않았어야 할 일을 겪으면서 정말 너라면 지긋지긋해."
"그래? 나야말로 너 같은 인간도 집구석도 징글징글해서 죽고 싶을 지경이다."
"웃기시네 나야말로 너랑 사느니 그냥 죽겠다. 이 얼간아."
"뭐? 말 다했냐?"
"아니, 아직 다 안 했다. 지 능력 밖이면 아예 시작을 하지 말던가. 아니면 나를 팔아먹고 도망가지를 말던가. 필요할 때만 피해자인 척하면서 뒤로 별짓 다해서라도 이기적인 욕심만 채우잖아. 이젠 인간 말종이 되려고 하네."
"인간말종? 이게 진짜 죽고 싶냐?"
"그래 죽여라. 그러셔야 인간 말종 답지. 지 가족 팔아먹는 말자야."

두 사람을 말려야 할까? 저 두 사람이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나는 망설였다. 그러는 사이 곧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놀란 나는 눈에서 손을 떼고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얀 눈 위에서 두 사람이 뒤얽혀 뒹굴고 있었다. 내가 서둘러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마자 이윽고 한 사람이 등을 보인채 다른 한 사람 위에 덮치듯 올라타서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아래에 깔린 사람의 몸이 뒤집어지며  그 얼굴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아직까지 거리가 여전히 먼 편이라 얼굴 윤곽을 확실히 구분하기는 어려웠지만 그 얼굴의 느낌은 어딘가 익숙했다.  
"너 같은 거 믿지 말았어야 했어."
이 외침은 이상하게도 앞에서 울리는 게 아니라 사방에서 메아리쳐오는 것 같았다. 나는 갑자기 거기서 빨리 벋어 나고 싶어 졌고 그게 어느 방향이 되어야 할지도 떠오를지도 상관도없는 건지 이리가 지도 저리 가지도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그리고 앞으로인지 뒤로 인지 나아가다가 그만 헛걸음을 디디고 눈밭 위에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정말 이상했다. 이제까지 끝없는 백일몽으로 잔뜩 흥분되어있던 신경이 갑자기 이완되느라 그런 건지 무언가 탁 끊기는 느낌이었다. 몸을 일으켰을 때, 나는 한 시간이 지난 것 같기도 하고 몇 초가 지난 것 같기도 했다. 원형광장이 펼쳐진 중앙 앞쪽을 보니 아까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주섬주섬 몸을 추슬러 아까 그 사람들이 있던 자리로 나아갔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빈 휜 눈밭 위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는데 문득 무언가가 거슬렸다. 저편의 내가 온 방향과 반대쪽에서 한쌍의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그 공원 위에 쌓인 눈에는 내가 여기까지 온 발자국을 빼면 아까 그들이 뒹굴던 공원 한가운데에서  시작해 한열로 나란히 난 네 개의 발이 네 줄 로이어 진 발자국뿐이었다. 이상한 건 그게 떠나는  발자국인지 다가오는 발자국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얼빠진 상태로 집으로 들어갔고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몰려드는 피로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너의 전화로 점심때에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그 후로는 너도 아는 대로 흘러갔다. 이런저런 준비들, 계획 수정을 위한 회의들, 졸업식, 재정상태 점검 같은 일들 말이다. 우리는 잘해나가고 있었다. 경력과 재정 보강을 위해 잠시 계획을 늦춰야 할 때도 참을성 있게 할 일을 해 나갔었지.

그런데 정말 이상한 건 그러는 동안 바쁘게 하루를 보내고 나서도 이상하게 매일 밤, 특히 혼자인 밤이면 이상함이 느껴졌다.  불을 끄면 언제나 목에 보이지 않는 덩어리가 걸린 것처럼 숨을 삼킬 때마다 걸리적거렸다. 그 덩어리는 심할 때면 목을 타고 가슴으로 넘어와 녹지 않는 얼음처럼 미끈거리며 내 안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드디어 출국이 정해지는 날이 왔다. 우리는 새로운 출발을 자축하기 위해 둘 다 잘하지도 못하는 술까지 사들고 내 자취방으로 왔었지. 우리는 부어라 마셔라 내기를 걸어가며 우리답지 않게 술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데도 아랑곳 않고 마셨다. 그때 나라도 너를 말렸어야 했지만 밤이면 찾아오는 덩어리인지 멍울인지 모를 무언가가 두려워서 나는 더욱 큰소리로 말하고 벌컥벌컥 마셨고.

더 이상은 말하고 싶지 않다. 사실 말할 필요도 없지. 너도 거기 있었으니까. 객관적으로 볼 때 우리 사이에 진짜 별일이 없었다. 누구나 술이 들어가면 전에 없이 목소리가 커지거나 과격해지니까. 나라고 해서 아니었던 것도 아니고. 하지만 내가 전혀 모르던 낯선 모습을 가장 가깝고 소중한 사람에게서 얼핏 보는 것, 오히려 창가의 귀신이 보일듯하다 사라져서 더욱 공포스럽듯 보인다면 어떨까. 그래, 나는 가여운 내 어머니가 아니고 너도 내 냉혈한인 아버지가 아니지. 그건 잘 알고 있었어. 역시 사람은 혀 때문에 비애로운 동물이지.

그 이후로도 우리는 별일 없이 지냈다. 짐을 싸고 서류를 정리하고 현지 숙소에 연락을 했다. 그거 아니? 난 정말 너를 사랑했다고 믿고 있어. 그래, 너는 믿지 못했지만 내가 너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믿고 있지.  아니, 그냥 믿는 게 문제가 아닌지도 모르지. 아직도 남아 있어서 그래. 그때의 하얀 눈 위의 발자국이 아직도 내 여기 어딘가에 찍혀있어서 그럴 거야. 부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참, 목의 지독한 덩어리는 이제 안 나타나는 게 아니라 사실은  아주 가끔 엉뚱한 때에 불쑥 나타나. 어제도 였지. 아마 너무 늦게 자서 그런가 봐. 근래에 밤늦게까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거든. 그 사람 직업 때문에 그래. 뭐, 이것도 곧 사라지겠지.

행운을 빌어 나의 첫사랑, 나의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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