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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dion Feb 02. 2021

단편 소설 습작 01

눈 발자국-上

문득 네 생각이 난다. 요즘은 트로이 시반의 노래를 들어. 섬세한 듯 도시 소년의 감성이 세련되게 펼쳐져.  너를  처음 봤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지. 섬세하지만 쿨한 느낌? 묘하구나. 네가 야상점퍼를  벗자마자 드러난 몽실몽실한  크림색 니트 한 장을 간단하게 무심한 듯 걸친 모습이 천연 곱슬인  머리와 색이  옅은 갈색  눈동자와 더해져 아주 선명하게  머릿속에 박혀버렸어. 그때는 우리  모두 아직 이십 대 초반이었어.  왠지 그때가 까마득하게 느껴. 나는 아직도 변변치 못한 글을 붙잡고  씨름하고 있어. 아직까지도 내 글에 진지하게 호평을  해준 것은 네가 유일해.  마이크로 블로그에 반응이 너무 없어서 요즘은  도무지 뭘 올릴 기분이 나지 않아. 너는 나에게 꼭  계속 써나가라고 했지만 네가 나에 대한 개인적 애정에 기울어져 한 말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아.  그런데도 이렇게 계속 그 말을 붙잡는 건 내 집착이려나.

어느새 가을이야.  겨울은 금방이겠지. 널 만났던 계절이   돌아오겠구나. 그런데   나는 솔직히 이 계절을 버텨낼 자신이 없어서 두려워. 가을은 좋지. 내 기억 속의 너는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모습인데 나는 어느새 서른이 되었어. 이런 표현은 너무 진부하지만 내 인생의 여름이  끝을 보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정말 가을이구나.  점점 두려워져. 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늘 그렇듯이 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하고 있어. 하찮은 솜씨로 글을 끄적거리면서 임시직을 전전하고  네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들 주위를 맴돌아. 어떤 19세기 철학자가 시대정신에 의해  역사는 진보한다고 했다던데 정작 역사 안을 사는  일개 범인에게는 시간의 흐름이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 것 같네. 나라는 사람의 삼십 년이 얼마나 티끌보다 의미 없이 가벼운지 몸서리가 쳐져.

겨울의 커피 한잔. 너와 처음으로 단둘이 이야기하게 되었을 때 눈 쌓인 공원에서 테이크 아웃 커피 한잔 씩을 들고 발길 닿는 대로 걸어 다녔었지.  아무것도 타지 않은 아메리카노 한 모금의 따뜻한 향과  쌀쌀한 공기의 대비가 머리를 맑게 깨웠고 너의 침착하고 낮은 음성 속에 담긴 생각의 예리함이 더 깊숙이 마음에 파고들었다.  지금 나는 그 시간들을 생각해.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남은 생애의 절반이라도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아. 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걸까?

정말 지독하게 꼬여 버렸다고 생각해. '첫 단추를 잘못 끼우다'라는 표현이 너무나 잘 들어맞는 상황이었어. 만약 인간이 자신의 현재 선택의 결과를 몇 수 앞까지 연이어서 볼 수 있다면 어리석은 짓을 하는 일이 줄어들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같은 행동을 할까. 그날 저녁 내가  너의 전화를 받았더라면 지금은, 그때로부터 미래는 달라졌을까? 답을 알아도 알 수 없는 질문들만 이어진다.

솔직히 나도 가여운 내 어머니를  내버릴 수 없었던 것인지, 전혀 낯선 땅에서 기댈 곳 없이 살아남는 일이 두려웠던 건지 , 아니면 둘 다였는지 모르겠다. 대사관의 비자 심사까지 통과한 후에도 사실 별 실감이 없었고 티켓을 예매하고 나서도, 짐을 싸는 순간에조차 반쯤 마비된 상태였다. 불을 켜지 않은 채로 점점 어둠이 내려앉는 여섯 평 자취방 안에서 발치에는 얼마 되지 않는 짐가방들을 내팽개친 채로 전원을 끈 휴대폰의 검은 화면만을 응시하고 있는 나.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정말 지독한 겁쟁이였다.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어 젊은 날 전체를 들여다보면 감상이 달라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내가 지난날을 볼 때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한숨과 후회를 남기는 날들이라고 느끼는 일이 너무나 당연해서 더욱더 너에 대한 생각, 만약 너를 따라 떠났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자꾸 사로잡힌다.  사실 나는 그렇게 엄청나게 끔찍한 사건을 겪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행복한 기억이 많은 편도 아니다.  나는 늘 불안했고 숨고만 싶었다. 행복한 기억 따위는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너를 제외하면 버리고 싶은 기억들만이 한가득이다.  만약, 만약에 내가 지금도 너와 함께라면.......

어릴 적에 내가 감기몸살이 낫을 때였다. 이제는 너무 작아져버린 백한 마리 달마티안 캐릭터들이 프린트된 초록색  이불을 덮고 거실에 누워서 나는 깨질듯한 머리에 열이 잔뜩 끓는 몸으로 간신히 버티어 앉았다. 휴대용 가스버너 위에 올려진 냄비에서 푹 쪄낸 배를 꺼내 어머니가 수저로 속을 파내어 내 입에 넣어주었을 때, 오후의 갓 어둑해지는 침침한 빛에 쌓여 달콤한 평안의 맛을 느꼈다. 보호받고 돌봄 받고 있다는 감각이 신체의 아픔조차도 평온의 일부로 만들어버렸다. 이건 나의 몇 안 되는 버리고 싶지 않은 기억 중 하나지. 그 안에는 어머니가 있었고 사실 그렇게 살갑지도 항상 올바르지도 않은 사람이었음에도 내가 여전히 어머니와의 끈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상당 부분이 이 기억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던 나에게 네가 나타났어.

나는 왜 너를 믿지 못했을까? 네가 나의 버팀목이 되어주리라고 철석같이 믿었더라면, 조금 더 용기를 냈더라면. 이제는 너무 늦어버렸다. 졸업논문을 쓰던 그때 나는 내가  나에게 늘 말하던 계획을 드디어 실행하겠다는 선언을 듣고 조금 놀랐지만 사실 한편으로는 기대감이 들기도 했었는데. 내 안에는 홀로 된 어머니를 놓지 못하는 마음만큼 어머니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움트고 있었다. 교내의 카페 안, 그 계획을 네가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천천히 털어놓던 그때 나는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논문을 마무리하느라 밤샘을 한 탓에 터져버린 내 콧속 모세혈관에서 선명한 붉은 액체가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을 때 나는 그것이 콧물인 줄 알고 대수롭지 않게 냅킨을 집어 들었다. 그때 깜짝 놀란 네가 맞은편 의자에서 일어나 내 턱을 쥐고 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네가 손수건으로 내 코를 가볍게 쥐고서 내 머리를 젖혔을 때 나는 너의 가슴팍에 기댄 채 셔츠 안에서 밀려오는 따스한 체온을 느꼈다. 그때  나는 네가 말하는 계획을 더 듣지 않아도 무조건 동의하고 싶어 졌다. 그때는 정말 그랬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때아닌 폭설주의보가 발령된 날의 그 광경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아래 링크로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sadion/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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