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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dion Feb 12. 2021

사람은 정말 모두 평등한 걸까?

소심한 분노 표출로부터

"당신은 그 사람의 사회적 서열이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그 사람을 진심으로 우정의 상대로 생각할 수 있나요?"



혐오는 나와 타인의 경계를 규정할 수없는데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우리의 알맹이가 여릴수록 더욱 극단의 언어와 행위를 통해 보호막을 만들고자 한다. 한 사회 안에서 아무리 고립된 인물이라 해도 그 사회의 트라우마, 병폐로 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더욱 손쉬운 이분법에 빠질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우리'와 '그들'의 경계를 만들고 싶어 한다. 게다가 오늘날 나의 사회는 내가 관용과 사랑을 외치기에 두려움과 피로가 너무 두텁다.

"너는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지적질이야." "깝치지 마라" 이러한 표현 속에는 서열의식이 숨어있다. 사람은 우월하거나 열등하거나 둘 중 하나고 후자로 분류되었다면 감히 문제를 제기해서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해서도 안 된다고. "너는 얼마나 깨끗하다고." 이 말에는 피장파장의 오류가 숨어있음과 동시에 꿀리는 게 있으면 무슨 일이든 당해도 된다는 사고가 숨어있다.

생각보다 나는 화가 많다. 때때로 끔찍한 상상을 한다. 잔인하지만 통쾌한 분노의 해소를 순간적으로 떠올리는 순간이 있다. 매번 그러는 건 아니지만 소위 '깊은 빡침'을 느끼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나를 붙잡는 사회적 위치와 관계, 체면, 도덕적 기준이 내가 이러한 상상을 그대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도록 조절한다. 그러나 가끔 나도 매우 우회적인 방식으로나마 화를 표출한다.

다시는 보지 않을 것 같은, 주어진 상황에 따른 역할에 의해 동시에 나보다 우위에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날카로운 말을 던지고야 만다. 나보다 나중에 주문한 사람보다 늦게 나온 식사에 대한  항의나  길거리에서 판촉물을 들고 끈질기게 따라붙는 아줌마에 대한 불쾌함의 표시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나는 결코 대범한 사람이 못된다. 소심하고 가만히 입 다물고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신조를 지녔다.

내가 이렇게 소극적으로나마 분노의 표현을 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늘 이전에 불쾌했던 사건들의 기억이 연관되어있다. 친구와 이야기하느라 트레이 반납하는 것을 잊은 우리에게 인상을 잔뜩 쓰며 큰소리로 소리친 디저트 가게 주인이나 정신없는 아침에 짝짝이로 신고 나온 양말을 보며 깔깔거리며 손가락질한 거래처 구내식당 여직원들이나 마감 당일까지 끝도 없이 내 작업물에 대한 수정 지시를 끝도 없이 새벽에도 보낸 대표가 대면한 그 자리에서 고치기 이전 것으로 다시 하자는 소리나 저녁 늦은 시간에 비효율적인 자신의 청소 방식을 고집하며 내가 청소하는 일거수일투족을 지적하며 소리 지르고 따라붙던 아버지라든가 하는 사건들 말이다. 각자는 별 것 아니지만 어느새 쌓이면 큰 덩어리가 진다.

그런 일들이 있고 나서 마주한 상황들에서 나는 내가 만만해 보이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전부 따지고 보면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이상하게 내가 가만히 각자에게 각자의 사정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고 이해만 하고 있자니 스스로가 너무 호구로 보이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불쑥불쑥 떠올랐던 것 같다. 그래서 별것 아닌 일에 갑자기 불쑥 날 선 말을 뱉어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물론 그 방식조차 소심함을 벗어나지 못해서 대부분 적극적인 주장이라기보다는  짧고 찌르는 듯한 비아냥이었다.

많이 찌질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 그릇이 거기까지 인 것을. 청소년기에는 나도 우리나라의 서열문화와 결합한 집단주의 문화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나와 그들을 이분법적으로 구분 짓고자 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인권을 지닌 존재로서 평등하다고 굳게 믿으며 부조리함에 대한 경멸을 피력함으로써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위협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대응함으로써 복합적인 현실을 단순화하는 소위 '그들'의 흑백논리와 다를 바 없게 되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공적인 사회생활에서 집단주의 문화를 벗어나는 것은 힘들다. 우리나라가 겪어온 사회경제적 역사 안에서 나는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어떤 목적의 모임이든 사람이 모이면 각자 분위기에 맞춰 역할을 취한다. 가끔은 이게 치열해 눈치게임처럼 잘못된 타이밍을 피하면서도 단계적인 모임의 진화를 위해 나서야 할 때가 생긴다. 사회화가 잘된 사람들은 대게 앞장서서 그 단계를 이끈다. 그렇지 못하다면 일단 가만히 튀지 말고 붙어가야 한다. 누군가와 친해진다는 일은 이런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1대 1로 친해지려고 한다 해도 이 과정 안에서 형성된 역할, 위치를 무시할 수없다. 개인적으로 이야기해봤을 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더라도 이 안에서 서열이 낮다면 더 이상의 사귐은 진행되지 않는다. 친구를 사귐에 있어도 타인의 시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 안에서 자연스럽게 나와 개성이 무척 다른 사람이나 사회적으로 배척받는 사람과 교류하고 이해할 기회는 줄어든다. 그러면서 우리는 더욱더 '우리'에 충성하며 '그들'을 더 쉽게 혐오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가운데 무시당한다는 느낌은 치명적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서열이 낮다는 사실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진화의 과정에서 각인된 메커니즘이 우리에게 분노와 공포를 선사한다. 거기다가 양극화과 심화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열이 높은 사람에게 받은 분노의 감정을 그대로 표출한다는 일은 치명적이기에 더 문제가 된다. 결국 화가 내 안에 쌓인다. 미국의 정신질환 편람 DSM에 우리나라의 화병이 신병과 함께 등재된 일은 아마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의 화는 우리보다 서열이 낮은 사람을 향해 흐른다.

이런 가운데 집단 안에서 서열이 낮은 사람과 진심으로 우정을 키울 수 있을까? 나도 그랬지만 학창 시절 왕따 당하는 학우가 있다는 사실이 부당하다는 걸 알면서도 대다수가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 이유는 서열이 바닥을 기는 부외자와 교류한다는 게 집단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순식간에 추락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오히려 우리는 인정하기는 싫지만 약한 존재에 대한 생래적이라고 느껴지는 혐오마저 느꼈다.

서열이 낮은 존재에 대한 혐오는 강자와의 동일시를 희망하는 방식으로도 나타난다. 폭력적으로 독단적인 가부장에게 반발심을 가졌으면서도 정작 그 앖에 무력한 어머니를 보고 여성성이란 나쁜 속성이고  피해자가 된다는 것과 같다고 판단하는 아들들도 있다. 그래서 아버지를 답고 싶어 하고 남성성에 집착한 아들은 훗날 여성을 창녀 아니면 성녀로 규정하며 여성 연쇄 살인을 일으킨다. 이건 실화다. 영국의 요크셔 리퍼 피터 서트클리프가 그랬다. 그는 여성들이 남성보다 서열이 낮은 존재라고 여겼다. 우리나라의 유영철 같은 연쇄 살인마도 여성을 범행 대상으로 삼을 걸 보면 이런 약육강식적인 정글의 사고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짧고 피상적이어도 사람들은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을 보고 고통에 연민을 느끼며 봉사와 자선 활동을 한다. 그것 조차 없다면 세상은 오래전에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홉스의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의 결과로 멸망했을 것이다. 물론 사회계약을 맺을 수 있을 만큼 인간의 이성을 인정하는 의미에서 계약 이전 상태를 대비시키기 위함이었겠지만 말이다. 여하간 우리는 서열이 낮은 존재를 도우려고 하기도 한다. 사실 그 서열이라는 것이 절대적이지 않고 상황에 따라 매우 가변적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이라는 것이다. 미디어에 나오는 이미지와 그 연장선상으로서 도와줘야 할 우리 아닌 '그들'이라는 이분법이 작용하기 쉽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나와 자주 부딪히는 일상의 이웃들 중 서열이 낮은 존재와 진심으로 동등하게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가는 다른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모든 사람과 진심으로 친해져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냥 문득 서로를 똑바로 들여다보았을 때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동질적인 측면이 있고 이로 인해 다른 차이들이 사랑스러워 보인다면 모든 사회적 위협을 무릅쓰고 '친구'라고 공인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나는 자신이 없다. 나의 사회적 지위는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안정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단 한 가지 내가 내려놓아서는 안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바는 나의 분노 표출이 단순히 나쁘다는 차원이 아니라 거대한 혐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다. 내 분노가 갈 곳을 잃고 쌓여 두려움이 커질수록 혐오로 전이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놓아서는 안 될 듯싶었다.  

솔직히 매번 그런 경각심에 깨어있을 자신은 없다. 나라는 존재의 알맹이는 너무나 무르고 약하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완벽히 선할 수도 완벽히 악할 수도 없는 그냥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냥 질문을 던졌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 사람의 사회적 서열이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그 사람을 진심으로 우정의 상대로 생각할 수 있나? 답은 아직도 모르겠다. 아마 그 답을 알기에 내가 아직 살아온 날들이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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