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어떤 믿음
부정을 긍정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어린아이도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구분한다. 단지 남도 좋아할지 싫어할지 타인의 입장에서까지 잘 생각 못할 뿐. 물론 항상 긍정이 좋은 것이고 부정이 나쁜 것에 대응되지는 않는다. 어떤 맥락에서 긍정하거나 부정하는지에 따라 다르고 그 두 개념은 엄밀히 따지면 각자 간에 완벽한 동의어가 아니다. 무언가가 아니라는 것과 무언가가 나쁘다는 게 같지 않으니까. 부정에는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판단의 의미와 동시에 단순이 무언가가 아니라는 뜻도 있다. 그리고 사실 무엇보다 현실에서는 양극단의 이분법만으로 나누기에 세부를 들여다보면 복잡하고 혼재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사람들은 자기를 부정하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하다. 스스로를 부정한다면 자아가 위험해지고 삶의 의미가 사라짐으로.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바가 어떤 각도에서는 현실이 아님을 혹은 옿지 않음을 확인해야 할 순간이 온다. 그러나 그런 순간이 매 순간 이어진다면 자아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자아에 대한 인식이 불안정해질 수도 있다. 이상한 정신적 결벽증의 강박이 정상적인 일상을 영위하기 어렵게 만들지도 모른다. 나를 전부 부정한다고 느낄 수 있으니까.
생존의 위협을 받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생각할 시간적 여유가 없기도 하거니와 가뜩이나 자아의 실체가 위험한 상황인데 자신을 부정하란 말인가. 아주 거대한 물리적 손실과 경제적 위기가 아니라고 해도 일상 속에서 '나'라는 개념이 불명확하거나 '나'라는 의식에 매몰되어있다면 자아에게는 분명 자아성찰은 위협이다. 무엇보다 '나'를 돌아본다고 해서 항상 그 방향이 건설적으로 나아갈 리 만무하다. 자신의 객관적 위치를 판가름할 지표가 없다면 자의식에 매몰되고 말 터다.
그렇다면 올바른 지표를 찾으면 되지 않냐고 할 수도 있겠다. 앞서간 사람들의 지혜라든지. 요즘 같은 정보화시대에는 책뿐만 아니라 강연, 다큐멘터리, 지식정보 채널 등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그런 지식을 많이 아는 고학력자나 명사들은 자아성찰을 통해 언제나 올바른 위치감각을 지니고 있을까. 재미있는 것은 인간이란 결코 타인이 될 수없다는 사실이다. 같은 사회에 속하고 같은 성별에 같은 나이 때라고 하더라도 사람은 각자 자기 자신만이 되어볼 수 있다. 그래서 외부 세계의 지표가 되어준다는 지식조차도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머릿속으로 한 생각을 통해 받아들여진다. 이 때문에 많은 것을 알면 때때로 그러한 가능성을 잊어버리고 스스로의 객관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이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폭력을 불사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회의주의에 빠지고 생존의 위협을 받느니 그냥 뒤돌아보지 말고 무조건 '나'를 긍정해야 하는 걸까. 그런데 정말 자기 성찰은 자아를 부정하는 행위일까. 아니, 애초에 부정하지 않으려면 긍정하는 길 밖에 없을까? 글쎄, 일단은 부정과 긍정의 문제에서 감정의 문제를 끄집어내 보고 싶다. 개인의 생각과 행위에는 감정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분류해서 대처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억압하지 않아 본다면 현상에 대한 파악에 더 집중할 수 있으리라. 그 파악에서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가 나의 입장과 대조해 본다면. 최소한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는 깨달을 수 있을지 모른다.
생각하는 나를 인식해서 생각하는 일은 나의 솔직한 감정을 인정하는 일과 병행된다면 자의식에 매몰되거나 외부 자극에 휘둘리는 사이에 균형점을 찾는 움직임을 지속하게 해 줄 수도 있을지도. 하지만, 그래, 대체 자아성찰을 해서 한 개체의 생존에 무슨 득이 되느냐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항상 자기 성찰을 한다면 이 경쟁적이고 역동적인 현대사회가 유지될 수 있겠는가? 회의론자들은 이념이나 신념에 온전히 복무하지 못해 추진력을 발휘할 수 없지 않은가? 그리고 약육강식의 현실세계에서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법이고 자신이 잘못 알았거나 잘못 행동했다고 인정하는 일은 약점이 잡히는 것이고 도태되는 지름길 아닌가.
사실 그래서 자기 성찰은 위험하다. 자본주의의 논리에 힘입어 긍정주의가 전략적으로 긍정되는 가운데 자존감을 위해서라도 자아를 긍정해도 모자라니까. 사실 자기 성찰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무결점의 성인이 되지도 않으니까. 완벽하게 잘못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차피 긍정할 수 없으니 부정해야 하므로 더욱 그렇다. 그러나 가끔 나도 모르게 꾸역꾸역 우기고 싶어 진다. 완벽하지 않아도 그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려는 노력이 항상 헛되지만은 않다고.
근거가 무엇이냐고? 절대적으로 이게 진리라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냥 내 입장에서 보면 나라는 존재가 결코 완벽하지 않음을, 절대적으로 옳지 않음을 알고 내가 세상을 다 알지 못함을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타인에게도 나와는 다른 어떠한 믿음들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그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믿음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아 무엇에 쓰냐고 할 수도 있겠다. 그냥 우리 모두가 불완전하다고 감히 가정한다면 어쩌면 그래서 더더욱 서로가 필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가 더한 논리적 비약이다. 그러니까 서로를 필요로 하는 방식에는 기생과 착취가 아닌 평화로운 공존이 궁극적으로 더 오래 생존하는 법이 아닐까 하는.